3의 수사학, 그 시뮬라시옹의 폭력.

2009. 1. 29. 10:23글쓰기/이 세상은 사각의 정글이 아니다!

3의 수사학, 그 시뮬라시옹의 폭력.

우연히 라디오를 들었다.

오늘 신문에 보도된 대학 진학률 이야기다.

“83. 8%(작년엔 82. 8%)가 대학에 진학한답니다. … 대학원 졸업자도 2000년 이후 … 고학력 인플레이션입니다.…”

아나운서의 애처로운 목소리는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입사시험에서, ‘토익 900점, 대학 평점 4.3, 4개의 자격증…이런 성적인데도 서류전형에서 100전 100패를 당하였답니다. 이유는 지방대 출신이기 때문이랍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

우리 사회는 저 지방대 출신을, 2류 혹은 3류라 비하한다.  

‘모 대학’은 1류, ‘모모 대학’ 2류, ‘그 밖의 대학은 3류’ 아예 이렇게 대못을 질러놓았다. 대학을 1,2,3류로 나누고 출신대학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시각은 그릇된 1류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대학의 이미지가 곧 그 사람 자체가 아니다. 장 보드리야르는 이를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폭력’이라고 정의하였다.

‘시뮬라시옹’은 시뮬라끄르가 작용하는 것을 말하는 동사이다. ‘시뮬라끄르(프랑스어:simulacre, 영어,그리스어:simulacra)’는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초과실재로 모사본(模寫本)에 지나지 않는다. 초과실재, 즉 모사본이란 실재를 베꼈지만 결코 실재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 시뮬라끄르인 모사본이, 때로는 실재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된다.

아나운서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방송한 저 지방대 출신으로 말머리를 돌려보자. 열심히 공부한 저 지방 대생은 실재이고, 초과실재 시뮬라끄르인 모사본은 지방대학인 셈이다. 시뮬라끄르인 모사본 지방대학은 3류이고, 바로 이 ‘3류’라는 초과실재 시뮬라끄르라는 이미지가 열심히 공부한 저 지방 대생이란 실재를 가려버린 것이다.

이렇듯 사회적 통념에 의해 실재와 초과실재의 구별치 못하는 것을 ‘시뮬라시옹의 폭력’이라한다. 열심히 공부한 저 지방 대생이란 실재를 타고 앉아 횡포를 일삼는 초과실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병적인 현상이다.

우리사회는 차 종, 아파트 평수, 사회적 신분, 직업 따위로 그 사람됨을 단정지어버린다. 실재를 실재로 보지 못하고, 잘못된 초과실재를 진실이라 믿는 사회, 실재는 증발하고 초과실재인 시뮬라끄르만이 판을 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안타깝다.

우리 사회가 ‘3류대’에 가하는 폭압적 예증은 주변에 풍부하여 굳이 덧말이 필요 없기에 ‘3류대’의 ‘3’에 대해서만 좀 더 살펴본다. 정녕 ‘3’이란 숫자는 저토록 멸시의 대상인가?

가위․바위․보! 이어지는 삼세번!

하나, 둘, 셋, 찰칵!

佛․法․僧 三寶, 草家三間, 三政丞, 天地人, ‘3원칙’, ‘3단계’, ‘3대 과제’ ‘3분 통화’ …

완벽, 편안함, 정결, 두루 갖춤, 종결, 우주 따위를 나타내는 ‘3:삼’의 효용성이다.

조선 후기 우리 문학사에 굵직한 선을 긋고 간 연암 박지원을 알 것이다. 연암은 스스로를 ‘下士(3류)’라 하였다. 결코 삼류가 아닌 저 이가 삼류라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삼류에 대한 겸손이요 아량이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자기다짐이다.

세계적으로도 이 ‘3’을 성스러운 숫자로 여긴다. 프랑스어로 “뜨레 비엥(Tres bien )”이라는 말이 있다. “훌륭하다”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으니 여간해서는 듣기 어렵다. 영어 “베리 굳” 보다도 훨씬 칭찬의 강도가 높다고 한다. 여기서 ‘뜨레(Tres)’가 바로 뜨레스, 즉 3이다.

3은 이렇듯 우리의 삶에 완전성과 도전성, 정서적 안정감과 함께 승자의 아량까지 담고 있는 너그러운 용어요, 한 번의 실패를 딛고 일어나라는 꿈의 용어이다. 이렇듯 ‘3’과 ‘인간’이라는 연계성을 생각한다면, 3은 우리 모두에게 이상적인 용어임에 틀림없다.

 

인생의 방정식을 꽤 어렵게 풀고 있는 저 ‘100전 100패의 사내(여인인지도 모름)’에게 서류전형조차 떨어진 이유를 ‘競馬場의 不進馬’ 정도의 우격으로 들이대서야 어디 쓰겠는가? ‘지방대생’ = ‘쓸모없는 무능한 사람’이 정녕 정언적 진술이란 말인가? 언제부터인가 ‘삼류’와 ‘일류’라는 사회적 체득이 이토록 ‘우리 대한사람의 몸에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각인’되었단 말인가?

‘일류’를 놓고 보자면, 이미 ‘대학을 졸업한’ 저 ‘100전 100패의 사내(여인인지도 모름)’에게는 획득 불가능한 가치’요, ‘불가역적 상황’이다. 다시 저 시절로 돌아 갈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 ‘토익 900점, 대학 평점 4.3, 4개의 자격증…’으로 저 시절을 보상한 셈이다.

3류를 만회하려 노력한 저 ‘100전 100패의 사내(여인인지도 모름)’에게 ‘3’ 혹은 ‘삼류’는 결코 자기성장을 멈춘 <양철북>의 오스카적 용어가 아니다. 그래, 저 ‘100전 100패의 사내(여인인지도 모름)’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여보게! 인생을 항해라고들 하잖나. 아, 풍랑 없는 바다가 어디 있겠나. 그러니 잠시 풍파를 만나 표류하는 중이라 이해하게나. 다들 그렇게 사는 걸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는 대중과 대중문화 그리고 미디어와 소비사회에 대한 이론으로 유명한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이다. 시뮬라시옹은 그이 책《시뮬라끄르와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에서 나온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