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적 사고

2009. 1. 29. 00:16글쓰기/글쓰기는 연애이다

코끼리적 사고

 

서커스단의 코끼리는 지름 5cm 밖에 안 되는 쇠말뚝에 다리 하나를 묶어 놓습니다. 코끼리는 쇠말뚝을 절대 뽑을 수 없는 것이라 얌전히 있습니다. 아기 코끼리일 때 힘이 부쳐 뽑지 못하였던 것이거늘. 이런 코끼리적 사고, 공식화된 생각이 우리 사회엔 만연합니다.

우스꽝스런 몸짓 속에 날카로운 풍자를 담은 찰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188- 1977)은 세계인이 다 아는 희극 배우입니다. 그가 한 번은 채플린 닮기 대회가 있어 나갔답니다. 당연히 채플린이 본인 흉내 내기 대회에 나갔으니, 일등이야 떼 논 당상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결과는 3등이었습니다. 자칫 등 수 안에 들지도 못할 뻔한 것이지요.

감히 논할 바는 아니나, 조선의 공부 천재 이황과 이이 선생도 다를 바 없습니다.

굳이 설명도 필요 없는 퇴계 이황(李滉,1501-1570) 선생은 20세경에 건강을 해칠 정도로 『주역』 등의 독서와 성리학에 몰두했으나 3번이나 과거에 떨어졌습니다. 지금도 대학을 졸업했을 27살에야 겨우 향시에 1등, 생원시험엔 2등, 진사회시엔 2등을 하였고 32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문과별시에 2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과거 급제했을 때, 이황 선생의 나이는 34살이었습니다.

세상사 이러한 역설적 상황이 어디 이 예만 있겠습니까. ‘내 힘들다’와 ‘자살’이란 절망적인 용어를 거꾸로 하면 ‘다들 힘내’와 ‘살자’라는 의지의 용어로 바뀌지 않는지요. 홍수가 나면 오히려 먹을 물이 없습니다. 동서남북만 해도 그렇지요. 아, 동서남북이야 정한 이치입니다만, 전후좌우는 제가 서 있는 방향에 따라 다른 법 아닌지요. 공기역학에 따르면 나비는 날 수 없습니다만, 나비는 이 꽃 저 꽃 잘도 날아다닙니다. 나무가 푸르른 것도 그렇습니다. 나무가 탄소동화작용을 할 때, 붉은 색은 흡수하고 초록색을 반사해서 푸른 것이지요. 설명할 필요도 없이 푸른색은 나무가 버린 색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무가 버린 푸른색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희망을 주는 빛이요, 청춘의 색이라고 까지 찬사를 서슴지 않지요.

세상사 이러한 일이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그런데도 공식화된 생각, 코끼리적 사고로 세상을 살아야한다고 버럭버럭 우겨대는 무람없는 치들이 여간 많은 게 아닙니다.

잘 아는 3류쯤 되는 이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1류와 3류는 당연히 차별이 있어야 한다.”고.

그 이는 3류이면서도 2류와 3류를 참 경멸합니다. 3류이면서도 2,3류에게 조소를 날리는 것이 그의 비장의 장기입니다. 그렇다고 1류를 무조건 숭배하느냐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3류인 자신을 비하하는 말만큼이나 1류의 폐단을 까발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리곤 본인을 3류라 여길라치면 목숨을 걸고 덤빕니다.

 

각설하고-.

차별의 근거로 그는 ‘3류는 1류만큼 노력을 하지 않았다와 머리가 나쁘다.’를 땅땅 어르며 종주먹을 들이 댑니다. 맞는 말입니다만, 허나 사실일지언정 진실은 아닙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배경이 암담한 어둠뿐인 사람도 있고, 살다보니 배경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한 이도 수다한 세상입니다. 태생부터 독하게 맘 먹고 공부해도 머리가 안 따라주는 경우도 있고, 더러는 삶이 꼬여 남에게 뒤처지는 불운아도 꽤 됩니다.

하지만 심안이니 혜안이니 따지는 똑똑한 자의 눈이 아니라도, 이 21세기가 야생의 생존보다 치열한 세상이라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닙니다. 바지저고리가 아닌 다음에야 노력을 덜 한 자로서, 그래 ‘너그럽게 보아주십사’하는 읍소를 생파리 잡아떼듯 쌀쌀맞게 거절해도 받아들여야함도 너무 잘 압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3류가 3류에게 갖는 공식화된 편견과 차별입니다. “같은 부류 사람들 간의 동질감에 기초를 둔 공식화된 생각”으로 보는 시선을 거두어 달라는 소리입니다. ‘공식화된 생각’, 선입관이라고나 할까요. 살다보니 생각 중에 가장 몹쓸 것이 이 공식화되어버린 생각이 아닌가 합니다. 이는 이제나 저제나,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나 비슷할 것입니다. 그래 ‘아둔한 옛 것’이라 불린 몽고(蒙古)제국을 연 징키즈칸이 생각납니다. 그는 자기를 부를 때 테무친이라는 이름을 부르라 했다지요. ‘징키즈칸’이라 부르면 이미 다른 이들과 차별을 두는 것이기 때문이라 그러했답니다. 저러한 징키즈칸이니, 겨우 200만 명도 안 되는 백성들로 2억이나 되는 중국, 이슬람, 유럽을 정복한 것이 아니겠는지요.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히틀러의 세계정복지도를 합쳐도 다 그리지 못할 ‘해가 지지 않는 대 몽골제국’은 바로 저 ‘차별’이란 한 마디 명사가 시발점입니다.

잠시 글 줄기가 도랑을 벗어났습니다. 여하튼 3류도 2류도 다 소중한 삶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겁니다. 1류가 2류를, 1,2류가 3류를 방귀폭 밖에 안 되게 낮잡아보는 것이야 도리가 없다지만, 같은 2류끼리, 3류끼리 어찌 그다지도 몰강스럽단 말입니까. 그저 한발한발 힘겹게 세상사는 이들 아닙니까. 우리말에 ‘맨꼬라비’를 ‘바닥 첫째’라 불러 힘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저 꼴찌가 사라지면 꼴지에서 둘째가 꼴찌가 됩니다. 누군가는 꼴찌여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따지자면 꼴찌에게 감사해야할 노릇 아닌지요. ‘코끼리적 사고’에서 벗어나 서로 어깨동무 좀 하고 삽시다.

 

“타인에 대해서 그들만의 특성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닌, 같은 부류 사람들 간의 동질감에 기초를 둔 공식화된 생각이야말로 차별대우의 본질이다.”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필라델피아>는 조나단 드미가 감독을 하고, 톰 행크스, 덴젤 워싱턴 등이 출연한 영화이다. ‘인간의 인종, 종교, 사회적 신분 등에 관계없이 인간의 존엄성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테마를 지적으로 따라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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