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이야기

2008. 8. 26. 21:49글쓰기/글쓰기는 연애이다

어제 먹은 술로 오늘 하루 아무 일도 못 했다.

그래 오늘은 술 이야기나 좀 하겠다.

술에 몹시 취하여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경우를 두고 ‘술에 먹히다’, 혹은 ‘술이 사람을 먹다’라고 한다. 술을 제법 먹는다하면 이 정도에 누구나 한번쯤은 이른다. 대개가 이 지경에 이른 다음날이면 열에 아홉은 여지없이 숙취로 인한 머리를 감싸 안고는 빈 주머니를 털어대며 어제 일을 후회하게 된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서도, 내 나이 또래는 ‘국문과’를 ‘술문과’라고 불렀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전공도 국문학을 전공하고 그것도 고전문학, 여기에 집안 내력까지 더해, 꽤 술을 좋아하는 터다. 그래 술에 관한 비사는 여남은 갖고 있다.


어느 때 겨울방학 무렵, 모의고사 문제로 모인 모임이 있었다. 수고했다며 그 쪽에서 한 턱 내는데다 채점수당도 받았고 하여 얼얼하게 술에 취했다. 당시엔 지금처럼 대리운전이 정착되지 못한 때였다. 더욱이 날씨가 너무 춥고 또 집도 멀지 않은 터라, 그냥 차를 끌고 나섰다. 시동을 걸었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11:00’라는 숫자가 깜빡거렸고, 잠시 후 ‘내일 눈이 오겠으니…’라는 달콤한 목소리가 흘렀다.


갈증이 나고 몹시 추워 눈을 떴다. 휘 둘러보니 우리 집 거실이었다. 찬 거실에 옷을 입은 채로 내가 옹송그리고 누워 있었다. 그래 ‘이 사람이, 술에 취해 들어왔다고 이 겨울에 여기다 내 팽개쳐!’하며 안방 문을 열었다. 불은 켜져 있는데 집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애들 방에도 없었다. 아이들을 깨워 물어봐도 엄마가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한다.

거실의 시계는 새벽 4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한 겨울, 이 새벽녘에 집 사람이 어디로 갔지.’

목에 매달린 넥타이를 잡아 뺐다. 주머니를 뒤졌다. 온전했다. 수첩을 꺼내보았다. 어제 받은 봉투가 없다. 몹시 갈증이 났다. 냉수를 들이켜고는 어제 일을 더듬었다.

  

집의 중간 쯤 왔을까.

횡단보도에 서있는데, 난데없이 트럭 한 대가 내 차 옆으로 바짝 다가와서는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 창문을 내렸더니, 내 나이쯤 되 보이는 사내였다. 그 사내는 술기운에 이미 초점이 흐려진 내 눈에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길옆에 차를 좀 대어 달란다. 사내의 사연은 꽤 슬펐다. 기억의 퍼즐을 맞추자면, 그 사내는 지방에서 서울로 생선을 싣고 다니는 장사치인데, 서울에선 물건을 받아줄 곳이 없어지고, 그래 빈손으로 내려가자니 기름값도 없고 하여 트렁크에 있는 생선을 좀 사달랬다.

지금도 그렇지만 난 본래 귀가 얇다. 학교에 들어오는 물건은, 망원경, 스쿠알렌, 음악테이프, 인삼세트, 도장, 더덕, … 따위를 죄다 사들여 집에서 잔소리깨나 듣는 편이다.(참고로 학교에 들어오는 행상의 물건치고 제대로 된 것은 거의 보지 못하였다.) 맨 정신에도 이러하니, 술 한잔한데다, 난감한 사내의 모습이라. 채점수당으로 받았던 근 20여만 원이 넘는 돈은 사내의 주머니로, 대신 내 차엔 서너 상자의 생선 박스가 실렸다.  

간신히 집으로 들어 와 넥타이를 풀며 걱정하던 집사람에게 키를 건네주었다. 차에 생선이 있는데 내가 술이 취해 들고 오지 못했다고, 그대로 두면 얼 것 같으니…. 그리고 집 사람이 나간 뒤 언제나 하던 대로 문을…, 현관문이 꼭 잠겨 있었다.    


이키나! 

베란다 문을 열고 나섰다. 아파트 안인데도 한 겨울의 냉기에 진저리가 쳐졌다.

8층을 한달음에 내려가 ‘왈칵’ 아파트 정문을 밀쳤다. 눈발이 먼저 내 얼굴을 스치고 하얀 눈세계가 펼쳐졌다. 4년을 산 포도마을 209동 아파트 앞이 그렇게 낯설고 넓은 곳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 동과 마주하고 있는 210동 아파트 벽, 두 줄기 자동차 불빛에 하얀 눈이 나비처럼 날았다.  

‘산타모, 경기 37두 7801.’ 그 차 안에서 집 사람이 엷은 겉옷 바람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난 그 뒤부터 절대 차의 창문을 안 내린다.

  

술 먹는 사람에 얽힌 이야기야 밤새 해도 모자라니 저 바다 건너 사람들 한번 살펴보자.

사람 사는 세상 저기와 여기가 다르지 않은지 우리네와 비슷하다. 이름하여 ‘비어 고글 효과’, 즉 ‘맥주 안경 효과’라는 것이 그렇다. 영국의 한 교수는 음주 후 이성에 대한 매력도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그리곤 술로 인한 효과라 하여 ‘비어 고글 에펙트(beer goggles effect)’라고 명명하였다.

이 ‘맥주 안경 효과’를 우리말로 바꾸면 ‘술 한 잔 뒤  콩깍지 효과’이다. ‘콩깍지’란 본디 콩을 떨어낸 껍데기를 의미하는 말이지만, 지금은 눈을 가려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비유로 널리 쓰인다. 제 아무리 좋은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조그마한 콩깍지 하나 눈에 대놓으면 상대를 볼 수 없다. 상대를 제대로 볼 수 없으면서 ‘사랑한다’느니, ‘결혼한다’하니, 사람들이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눈에 콩까지를 씌우는 놈이 술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본래 술이 아슴아슴 취하면 동공이 풀려 눈에 허연 것이 붙은 듯 아물아물하니 사물을 정확히 보지 못한다. 그런 상태로 앞에 이성을 두고 앉아있으니 사람인 이상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콩깍지 효과’가 길지 못하다는 점이다.

여하간 ‘술은 백약의 장(長)’이라고도 했다.

술은 알맞게 마시면 어떤 약보다도 몸에 가장 좋다하니 적당히만 마셨으면 한다.


2008. 8. 26.

간호윤 

'글쓰기 > 글쓰기는 연애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장의 벽돌>  (0) 2008.08.31
공부를 하며-  (0) 2008.08.31
다시 시간  (0) 2008.08.25
벌초(伐草)  (0) 2008.08.24
‘혹시’의 꾐  (0) 2008.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