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소설비평용어사전

2008. 8. 10. 10:49간호윤의 책들/아름다운 우리 고소설(2010년)

한국 고소설비평 용어 사전

인문 > 한국문학이론 > 한국문학비평

 

 

[머리말]

고소설의 총체성을 밝히려는 연구에서 소설비평을 제외할 수 없듯이, 고소설비평 용어의 문제는 더욱 그렇습니다. 고소설비평 용어의 해결 없이는 고소설비평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어렵고 나아가 고소설의 총체적 이해는 난망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비평용어들은 이러저러한 생각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저자 나름대로 고소설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용어들을 시론적으로 간추리고 설명을 보태었습니다. [양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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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설비평이란 무엇인가?
한국 고소설비평 용어 사전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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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머리말입니다.

 

머리말





하나

좀 긴 머리말을 쓰겠습니다. 

바야흐로 소설의 전성시대입니다.

여기저기 소설가가 넘쳐납니다. 소설을 써 부자가 된 이들도 빗살처럼 줄지어 빽빽하게 늘어세울 수 있습니다. 소설비평가도 넘칩니다. 너도나도 ‘소설갑네’, ‘소설평론갑네’ 하고 한 마디씩 거듭니다. 그야말로 서점에 가면 소설에 대한 글들이 노적가리 쌓이듯 넘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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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저 시절은 이러한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고소설의 궤적을 발맘발맘 따르다보면 때론 죽음을 넘고 반역의 논리까지 만납니다. 채수가 󰡔��설공찬전󰡕��이란 소설을 썼다고 교수형을 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그러하고, 정조 임금이 서학(천주학)과 소설을 국가의 근간을 해치는 두 적으로 적시한 것이 또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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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소설에 관한한 누구나가 아니라 누구만의 시절이었습니다. 이 구만 소설을 쓰고 평을 하였습니다. 누구만 썼기에 글의 겉과 그 속은 대단히 조직적일 것입니다. 저들의 소설이, 비평이, 가볍지만 가벼울 수 없는 이유입니다. 저들은 그렇게 시대로부터 ‘억눌린 자들’이었기에 우리 소설사의 한 한담으로만 내칠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이 ‘누구만’의, ‘억눌린 자들’의 세계에 대한 접근입니다. 고소설의 시대, ‘소설비평’이라는 용어조차 없던 때였습니다. 현대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다면야 단순한 평일지 모르나, 저 시절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금기에 대한 용기 있는 행동의 표지’입니다. 요즈음 소설비평처럼 여간해서는 알지 못하는 소리만 늘어놓고 소설평이라는 꾀부림이 아닙니다.

서양의 지식만을 수수하여 학문의 깃대기둥으로 삼는 이들이 많습니다. 지나친 이들은 저 시절, 저 들이 힘겹게 만들어 놓은 고소설에, 아예 ‘졸’이라 대못질 두어 개쯤 질러 놓는 이들도 있습니다. 고소설(비평)의 역사는 이론의 역사가 아니라 경험의 역사요, 근본적 원리에서 출발하기 보다는 현상으로부터 출발해야 함을 깨닫지 못한 소치입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듯이 오늘은 과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 ‘조선의’라는 관형어 뒤에 붙은 ‘소설’의 고난과 그 촌평이 오늘날 우리 비평의 효모였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오늘날의 소설가류들, 통시성과 역사성으로 빚어진 우리의 소설사에 무임승차해서는 이러쿵저러쿵 외댈 것만은 아닙니다.

외국 학자의 용어사전까지 번듯이 만들어 내는 판입니다. 저 시절 그렇게 억눌려 온 자들의 존재증명에 대해서는 비판의 장도를 휘두를 이유가 없으며, 현대 비평가들에게만 비평의 독점적 권위를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이 책 속의 용어들이 비평어로 살아남을지 의미 없는 존재로 묻힐지는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의 용어들을 ‘이 시절과 저 시절의 관계망 구축’으로 이해했으면 합니다.


 

우리의 고소설론(비평)은 많은 연구 업적에도 불구하고 작품 연구에 비하여 아직도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소설비평 용어는 고소설 연구의 한 방편으로서만 이해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고소설의 총체성을 밝히려는 연구에서 소설비평을 제외할 수 없듯이, 고소설비평 용어의 문제는 더욱 그렇습니다. 고소설비평 용어의 해결 없이는 고소설비평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어렵고 나아가 고소설의 총체적 이해는 난망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비평용어들은 이러저러한 생각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저자 나름대로 고소설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용어들을 시론적으로 간추리고 설명을 보태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용어가 정합성이나, 엄밀성을 갖춘 고소설비평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느 용어는 평자의 소박한 감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어느 용어는 단순한 촌평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필자의 깜냥 부족으로 빠뜨린 것도 있으며, 설명이 시원치 않은 용어도 있을 겁니다. 그저 ‘후일 깁고 다듬을 것이다’란 뭉수리한 말로 하나마나한 답을 낼 뿐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여기에 추려 놓은 용어들이 당대에 분명히 소설비평의 한 형태로 존재하였고, 고소설비평의 범주와 양식적 특성을 보여주는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입니다. 점차 이에 대한 연구 결과물들이 지속적으로 보태어질 경우, 우리 고소설비평도 이론적 체계를 정립할 것이요, 현대비평으로 이어지는 연진과정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고소설비평 연구로 보아, 연구자들 간의 합의로 숙성․발효된 비평어를 기대하는 것은 이른 감이 있고, 이 방면에 대한 연구인력 또한 그리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모든 연구자들의 보편성을 담은 용어 선정 문제보다, ‘고소설비평어의 연구 필연성’에 더 무게를 두었습니다.


셋 

나는 ‘학문’을 합니다.

학문은 ‘배우고[] 묻는다[]’는 뜻이라 압니다. 그래 학문은 명사로되, 배우고 묻는 실천 행위를 기반으로 하기에 동사입니다. 실천행위, 이 역동성이 없으면 학문은 그 본연을 잃습니다. 천 리길도 첫 걸음을 떼 놓기 전에는 공염불일 뿐입니다. 천 리길의 첫 걸음을 떼는 심정으로 고소설비평에 다가들었습니다. 저자의 깜냥을 되질하지도 않고 고소설비평 용어를 정리하여 내 놓는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우리 고소설비평가들의 비평 방법론이나 학문적 태도는 기본적으로 당시 문학론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다는 점을 적극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비평가들 대부분이 한문학에 대한 이해가 풍부한 식자층이었다는 점에서, 한시비평과의 연계적 고찰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쉽게도 본고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치밀한 고찰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현재 우리의 한시비평은 적지 않은 연구 업적이 축적되었습니다. 이러한 연구 업적에 힘입어 우리의 고소설비평이 한시비평어와의 연계선상에서 논의될 때, 더욱 용어의 개념을 온전히 정립할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이에 대한 연구는 추후를 기약합니다.

되뇌어 표제어의 선정서부터 설명에 이르기까지, 객관성을 기했다하지만 저자의 주관성이 개입된 것들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학․선배 제현께서 다른 입장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기에, 건강한 비판은 겸허히 수용하여 깁고 다듬을 것을 다시금 첨언합니다.

고소설비평에 대한 물꼬를 트는 마음으로 몇 자 적었습니다.



2007년 11월 20일

휴휴헌에서 간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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