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양론(2)

2008. 8. 1. 13:59고소설비평용어/고소설비평용어

채수(蔡壽, 1449~1515)의 󰡔��설공찬전薛公瓚傳󰡕�� 사건에서도 이 말이 보인다. 김수동(金壽童, 1457~1512)은 󰡔��설공찬전󰡕��을 지었다고 교수형에 처하자는 정치적 반대파에게 ‘기양’을 들어 이렇게 말한다.


채수의 죄를 교수로써 단죄해야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도正道를 붙들고 사설邪說을 막아야 하는 대간의 뜻으로는 이와 같이 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채수가 만약 스스로 요망한 말을 만들어 인심을 선동시켰다면 사형으로 단죄함이 가하지만, 다만 기양技癢의 시킨 바가 되어 보고 들은 대로 망녕되이 지었으니, 이는 해서는 안 될 것을 한 것입니다[聞蔡壽之罪 斷律以絞 臺諫扶正道 闢邪說之意 固當如是 壽若自造爲妖言 鼓動人心 則可斷以死 但爲技癢所使 聞見而妄作 是所不當爲而爲之也]. (󰡔��중종실록󰡕�� 6년 9월 20일, 정묘)


‘교수絞首(사형수의 목을 옭아매어 죽임)라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치기어린 비평어로는 볼 수 없잖은가.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에 보이는 기양의 정의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기양伎癢이란, 인간에게는 긁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가려움증과 같이 표현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기술 내지 재주를 말한다. 기양은, 이 쓰지 않고 견딜 수 없는 표현욕구를 이름이다[伎癢者 謂人有技藝 不能自認 如人之癢也 伎癢 謂懷伎欲求表現也].


풀이하자면, 심성적 동기로서 단순한 표현욕을 말하는 것으로 소설에 한정되어 사용된 용어는 아니었다.

󰡔��중종실록󰡕�� 19년 5월 10일의 기록, 김희수의 글씨 평에 관한 사신의 논을 보자.


사신은 논한다. “졸렬한 옛 필적을 바치는 것이 어찌 옛사람이 옳은 도리나 이치로써 웃어른과 왕의 잘못을 고치도록 말한 글을 바치는 것만 하겠는가? 아깝다. 이것은 김희수가 글씨를 잘 쓰므로 그 기양이 그렇게 시킨 것이다.”[史臣曰 與其進古蚯蚓筆迹 曷若進古人規諫之書 惜乎 此 希壽工於筆 故爲技癢所使 而然也]


기양의 쓰임은 이렇듯 폭이 넓었다. 결코 녹록치 않은 비평어임에 분명하다.

유만주(兪晩柱, 1755~1788)의 󰡔��흠영欽英󰡕��을 보자.

유만주의 󰡔��흠영󰡕��에서도 기양技(伎)癢이라는 고소설비평어가 보이는데, 소설을 공격하는 논자들로부터 소설 저작자를 방어하는 용어이다. 그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그러나 󰡔��수호전󰡕��의 평어가 신출귀몰 하다는 것과는 같지 못하다. 요컨대 이것은 공의 기양이 연의에는 뛰어나다는 것이다[然似不如 水滸評之神出鬼沒 要是此公之技癢 長於演義]. (유만주, 󰡔��흠영󰡕�� 6, 서울대학교 규장각, 1997, 234쪽)


김성탄의 󰡔��수호전󰡕�� 평이 특히 뛰어난 것은, 이 기양 때문이라는 유만주의 이야기이다.

조선초의 고소설비평이, 소설과 이를 폄하하려는 자들의 엇박자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뜬금없는 질문이다.

왜 글을 쓰시오?(Why do you write literature?)

왜냐하면 기양技癢(Burning to show talent)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지요(Because Ki-yang is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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