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경룡전> 에 보이는 악인

2008. 7. 18. 15:29악인열전(惡人列傳)

2. <왕경룡전>


<왕경룡전>은 17세기 초, 작자를 알 수 없는 기녀(妓女)를 소재로 한 한문전기소설(漢文傳奇小說)이다. <옥단전(玉檀傳)>, <왕어사경룡전(王御史慶龍傳)>이라고도 한다.

경룡은 기생 옥단에게 빠져 백년가약을 맺지만, 돈이 떨어지자 기생어미의 간계로 내쫓긴다. 갖은 고생 끝에 결심을 새로이 한 경룡은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암행어사가 되어 위급한 처지에 빠진 옥단을 구출해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이 이야기의 동선이다.

<왕경룡전>은 중편소설이며 어떠한 형태로건 중국 소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만 확실하지만 우리 소설로 보아 무방하다. 그런데 같은 애정소설인 <운영전>이나 <상사동기>에 비하면 밋밋하기 짝이 없다. 소설 구성은 치밀하고 시도 상당히 정제되었지만 맥없이 전개된다. 작품을 흐르는 것은 꾀와 자본주의적 맹아인 ‘돈’이 확실히 보인다는 점이 새롭다. <왕경룡전>의 작품성은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옥단은 자본주의의 표지인 ‘돈’으로 살 수 있는 여인이다.

그러나 옥단이 “꽃 찾는 길손에게 부탁하오니 부디 화류계엘랑 비기지 마오(寄語尋芳客, 莫比花柳場).”라는 말처럼 그녀도 진정한 사랑을 원한다. 이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왕경룡전>은 지독한 남성주의가 판치던 조선 중기에 여인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낸 소설이란 점이 신선하다. 그래, 기우뚱해져버린 남성의 사회에서 사랑만큼은 좌우대칭을 취하려는 의도가 선연하다.

창기는 음란하고 사특한 여인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다. <왕경룡전>에서 옥단은 기생이다. 꿀물을 마신 뒤 갈증이 더 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조건부 사랑에 대한 탐닉 또한 이러한 이치가 아닐 듯싶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옥단은 신실한 정절을 지닌 여인으로 격상되었다. 비기자면 기생인 ‘해어화(解語花:기생을 말하는 꽃에 비긴 것)’를 군자의 꽃인 ‘국화’처럼 만들었다.

그래, 옥단을 따라 경룡을 따라 줄달음 치다보면 주인공들의 내면 심리를 못 본다. 영 재미없는 소설이 돼버린다. 천천히 소설의 장면을 돌리는 ‘각설(却說)’마다 숨을 고르며 읽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래야 기생어미가 화류계에서 손님 호리는 청루전환법(靑樓轉換法)과 경룡이 화류계 여인을 후리는 청루농주법(靑樓弄珠法)도 여간 아닌 줄 안다. 속고속이는 농익은 꼼수는 오늘의 이야기 아닌가. 또 옥단의 신분상승에서 오는 영원할 우리 조선인의 환원주위(還元主義) 표지인 ‘품종과 계보 업데이트 작전’은 어떤가. 이는 후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애정소설의 대명사, <춘향전>의 한 연원으로 부족함이 없이 나아간다.


이제 좀더 소설의 내용을 따라 붙어보자.


때와 장소는 가정(嘉靖) 말년, 서주(徐州). 그러니까 1560여년 경쯤이니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0여년 전, 중국 강소성(江蘇省) 북서부에 있는 도시인 서주에서 일어 난 일이다. 강소성은 예로부터 신라인의 산둥반도와 함께 왕래가 잦았던 곳으로 신라인의 집단거주지인 신라방(新羅坊)이 생긴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익숙한 지명이기도 하다. 

저 시절의 소설이 다 그렇듯, 왕경룡 또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재기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아버지 위공은 벼슬이 각로(閣老)라는 높은 벼슬아치였는데, 윗사람의 뜻을 거슬러 관직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왕각로는 낙향하면서 아들 경룡을 시켜 장사꾼에게 빌려준 은자(銀子)를 받아오라고 하고 먼저 길을 떠난다.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이 때 경룡의 나이는 18세였는데 부지런히 배우면서 장가들 생각 없이 문 밖 출입을 금하곤 종일토록 글을 읽으며 나날을 보내던 책상물림이었다. 경룡은 돈을 받아 내려오다가 서주(徐州)에 들러 주모의 소개로 기생 옥단(玉檀)을 사귀게 된다. 옥단의 나이는 14세이며, 자색이 빼어나 기생집을 모조리 뒤진들 얻지 못 할 여인이었다. 책상물림으로 지내던 귀공자가 이러한 어여쁜 기생을 만났으니 그 뒤야 불문가지다. 아버지에게 갖다 줄 수만금을 모조리 탕진한다.

몇 년이 그렇게 흐르고 경룡이 돈이 떨어지자 기생어미는 돌변한다. 옥단에게 돈이 떨어진 경룡을 내 쫓으라고 한다. 그러나 옥단은 그 사이 경룡에게 정을 주어버렸다. 기생어미의 말을 듣지 않자, 기생어미는 간교한 술수를 부려 집을 옮겨서는 경룡을 내친다.

쫓겨난 경룡은 기생어미가 시킨 도적들에게 맞아 기절하였다가 마을 노인에게 구출되고, 그 길로 양주 (楊州)지방 광대의 무리에 예속된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전날 옥단을 소개하였던 주모를 만나 사정을 이야기하게 되고, 주모는 경룡의 편지를 옥단에게 전해 준다. 편지를 받은 옥단은 기뼈하며 경룡을 만난 다음, 황금을 주면서 새 옷을 사 입고 다시 집으로 찾아오라고 일러준다.

경룡은 옥단의 말대로 비단옷을 사서 입고 빈 상자를 재물로 가장하여 그 집을 찾아간다. 전날의 기생어미는 다시 반기며 이전의 잘못을 사과하면서 극진히 접대한다. 이날 밤 옥단과 경룡은 기생집의 보화를 훔쳐 집을 나오고, 이튿날 관가에 기생어미를 고발하게 된다.

마침, 기생어미에게 돈을 주고 옥단을 첩으로 삼으려던 조모(趙某)는 화가 나서 옥단을 자기집으로 납치해간다. 그러나 조모의 처는 옥단을 시기하여 남편과 옥단을 독살하려고 밥에 독약을 넣었는데 남편만 그 밥을 먹고 죽는다. 관가에서는 남편을 죽인 죄로 본처와 옥단을 함께 옥에 가두게 된다.

한편, 경룡은 옥단을 잃은 뒤 그 길로 본가에 돌아가 부친으로부터 엄한 훈계를 받은 다음, 학업에 열중한 결과 장원급제를 하고 암행어사를 제수 받는다. 옥단의 연락을 받은 경룡은 곧 암행어사로 출두하여 옥단을 구하고 이들은 행복을 누린다.


‘기녀의 순정’과 ‘기녀에게 빠져 패가망신 후 암행어사가 되어 연인을 구하는 도령’이란 설정이 우리가 잘 아는 <춘향전>과 맥락을 잇대고 있다. 그런데 <왕경룡전>은 기생과 부잣집 도령과의 사이에 기생어미, 옥단을 첩으로 삼으려던 조씨 성을 가진 상인, 그리고 옥단을 시기하여 남편과 옥단을 독살하려는 조모의 처가 악인으로 등장하여 이야기에 긴장을 불어 넣는다.

기생어미부터 차례로 살펴보자.


재물

기생어미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돈이다.

인간 삶의 기본 룰인 ‘신의’고 ‘정리’는 애당초 없다. 경룡이 옥단과 동거하여 5, 6년이 지나 경룡의 돈주머니는 헤실바실 바닥이 나서 급기야 그 집에서 밥을 얻어먹는 신세가 되자, 기생어미가 옥단에게 은밀히 하는 말이다.


“왕 공자의 재산은 이미 다하였기에 더 이로울 것이 없단다. 네가 만약 잠시 피해 있으면 왕 공자는 반드시 떠날 게다. 왜 너는 가난한 사내만을 지키면서 빈 것을 지고는 높은 가치를 두려하니?”


그러나 옥단이 “왕 공자는 저 때문에 겨우 몇 해를 살면서 이미 만금을 바쳤어요. 재물이 바닥나자 버리고 배반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거절하자 기생어미는 조운(朝雲)이란 으밀아밀 모의를 한다. 이 말 속에서 옥단을 거두어 기른 것도 한낱 돈 때문이라는 것이 그대로 드러난다.


“옥단을 거두어 기른 것은 다만 한 번 합환合歡하는 값만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지. 오히려 값으로 치자면 천금도 적어 걱정해야 하는데, 이제 어찌 옥단을 한낱 왕가의 물건이 되게 할 수 있겠니?”


그래 아무 날, 서관(西館)의 기생 아무개가 상복을 벗게 되어 옥단도 가지 않을 수 없다하여 경룡을 꾀어서는 길을 떠난다. 길을 떠난 다음날, 노림(蘆林)의 입구에 닿자 기생어미는 거짓 놀라는 체하며 너스레를 떨며 옥단과 경룡을 속여 이렇게 말한다.


“내가 떠나 올 때에 길 떠날 채비를 너무 바쁘게 했나봐. 재물을 저장한 방에 자물쇠 잠그는 것을 잊어버렸으니 다소의 재물이나마 누가 도둑맞지 않게 지켜 주었으면 좋은데.”


그리고는 경룡에게 청하여 집에 다녀오게 하고는 줄행랑을 놓아버린다. 물론 기생어미의 악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옥단을 첩으로 삼고 싶어 하는 조 상인에게 천금을 받고는 팔아버린다. 그런데 옥단이 조 상인에게 시집갈 뜻이 없자 기생어미는 갖은 포악을 부려 옥단을 내 쫓으니 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창모는 옥단을 미워하여 항상 죽이려고 하였으나, 이웃 사람들이 알까봐 두려워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전날의 조趙 상인은 옥단을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창모에게 주었던 돈을 돌려받으려 하니, 창모는 그 재물이 아까워 몰래 약속하여, “이리이리 하시오.”라고 했다.

두서너 달이 지나자 창모는 옥단을 꾸짖으며 강다짐했다.

“너는 왕랑 때문에 내가 길러 준 은혜를 배반하고 끝내 나를 어미로 여기지 않는구나. 비록 내 집에서 살고 있으나 다시는 이익 되는 것이 없을 것이니 북루를 비워라.”

조운이 마침내 구박하여 내쫓았다.


물론 계교꾼 기생어미는 이보다 먼저 몰래 같은 마을의 장사꾼 과부 할미에게 많은 보물을 주고 비밀스런 계략을 짬짜미했었다. 옥단이 쫓겨나면 할미가 옥단을 가엽게 여기는 척하며 잠시 머물게 하다가 계교를 써서 조 상인이 납치해가도록 한 것이었다.

<왕경룡전>에선 이 기생어미에 대한 결과는 나와 있지 않으니, 제 2, 3의 옥단이 많이 나왔을 듯하다. 물론 기새어미의 주위는 늘 돈으로 치일 것이다.


 사랑

<왕경룡전>의 또 한 명의 악인 조모(趙某)를 보자. 그는 글자를 알지 못하는 무식쟁이이나 장사를 하여 부를 이룬 인물로 옥단을 첩으로 삼으려 한다. 물론 돈을 써서 그러한 것이지만, 목적은 사랑이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 있은 뒤에는 늘 색이 따는 것 같지만, 결과는 씁쓸하다. 자신의 처는 바람을 피고 자신 또한 처가 옥단을 죽이려 넣은 독약이 든 죽을 먹고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여인을 탐한 결과가 참혹하다.  


간통

<왕경룡전>에서 기생어미 못지않은 악인은 조상인의 아내이다. 조 상인의 아내는 바람기를 지닌 여인이었다. 그래 옥단이 무당의 남편 필적인양 편지를 보내자 쉽게 이를 받아들여 간통을 한다. 그리고 옥단이 무당 남편과의 관계를 안다는 것을 눈치 채자 서슴없이 옥단의 죽에 독을 넣어 죽이려한다. <왕경룡전>이 절정에 오르는 부분이기도 하니 살펴보고 넘어가자.


옥단은 여러 달을 거처하면서 살펴보니, 처가 비록 자색은 지녔으나 평소에 정조가 없음을 알았다. 또 이웃집의 무당 부부가 오랫동안 이 집안과 교유하고 있었는데, 무당 남편도 역시 품행이 바르지 못하고 오직 주색만 탐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 상인의 아내가 서로 만나자는 편지를 쓴 것처럼, 그 필적을 비슷하게 모방하여 무당 남편에게 보내고 또 무당 남편의 편지를 역시 이와 같이 써서 조 상인의 아내에게 보냈다. 두 사람은 서로 믿고서 은밀히 보쟁였으나 모두 깨닫지 못하였다.

이런 후로는 새벽에 가고 저녁에 오는 일이 금방 일상사가 되었다.

옥단이 하루는 그들이 와 만나는 기회를 틈타 창 밖에서 몰래 살피다가,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엿보고 있다는 형상을 드러내 보였다. 두 사람은 옥단이 그 남편에게 알릴 것을 두려워하여 함께 계교를 꾸며 그 흔적을 없애버리려 했다.

때마침 그 남편이 밖으로 나가 이웃집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에 돌아왔다.

조 상인의 아내는 아주 맛있는 죽을 쑤고 죽 속에 독을 넣어 남편과 옥단에게 주었다. 옥단이 막 머리를 빗다가 죽을 보고 독이 들었나 의심이 되고 또 자기에게만 독을 풀었는지 염려가 되기도 하여 말했다.

“그 죽이 매우 맛있게 보이니 내가 많은 것을 먹겠어요.”

자기 앞에 놓인 것을 바꾸어 상인 앞에 놓았다. 그리고 화장하고 머리를 빗질하는 것을 핑계로 꾸물거리며 먹지 않고 조 상인이 다 먹은 후에야 거짓으로 손을 대는 척하다 엎질렀다.

잠깐 있으니 조 상인은 땅에 거꾸러져 피를 토하고 죽어 버렸다.


결국 이 일로 조 상인의 처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옥단과 조 상인의 처, 무당의 남편은 조 상인 독살 혐의로 관아로 압송되고, 과거에 급제한 경룡의 기지로 두 사람의 죄상이 드러나 죽임을 당한다.

<왕경룡전>에는 이렇듯 ‘재물’과 ‘지나친 사랑’과 ‘간통’이 악인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