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전>에 보이는 악인

2008. 7. 10. 14:59악인열전(惡人列傳)

고소설에서 악인이 처음 등장하는 작품은 <백운과 제후>이다. 그러나 <백운과 제후>에서 악한 무리로 등장하여 백운과 제후를 납치해간 도적은 그 성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김시습의 작품인 『금오신화』에서도 동일하다. 『금오신화』소재 5편의 소설에서도 뚜렷한 악인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이생규장전>에 홍건적이 이생과 최낭자를 사랑을 가르는 악한 무리로 나타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소설 중, 악인이 최초로 등장하는 작품은 <운영전>의 특과 안평대군이다. <운영전>은 17세기 초, 작자 미상의 궁녀들의 애정을 소재로 한 한문애정전기소설(漢文愛情傳奇小說)로 <유영전柳泳傳>이라고도 한다. <운영전>은 액자소설(額子小說)의 수법을 적절히 살린 우리나라 중편 애정전기소설로 격조와 품격이 가위 최고 수작이다.


유영이 안평대군의 저택인 수성궁에 놀러갔다가 천상 사람이 된 김진사(金進士)와 운영(雲英)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듣는다. 운영은 안평대군의 궁에 있는 열 시녀 중 한 명이다. 어느 날 운영과 김 진사는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리고 이들의 만남은 곧 뜨거운 사랑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특의 농간으로 둘의 사랑행각은 드러나고. 운영이 먼저 자결하자 이어 김 진사도 그녀의 장사를 치른 다음 자살한다.


이 작품은 우리 고소설에 ‘비극’과 ‘사회사적인 의미’에 수많은 연구의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러나 이외에도 <운영전>의 작품성은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이 글을 따라 읽으면 다른 애정전기소설과는 다른 묘한 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등장인물들이 여타 소설들에 비하여 많고 목석이 아니다. 안평대군, 아홉 시녀, 노예 특, 무당, 심지어는 액자를 구성하는 형식적 인물인 유영까지 철저하게 계획된 인물들이다. 이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운영전>은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어느 한 사람만 빠져도 소설의 긴장감은 순식간에 풀릴 것 같다. 또 하나는 시(詩)이다. 각 편이 절창으로 이 소설을 맛깔스럽게 한다. 이러한 것을 소설비평어로는 감자여(甘蔗茹)라고 한다. ‘감자여’란 사탕수수 맛이다. 또 잘 음미하면 시 속에서도 소설의 내용이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은 조곤조곤 읽어야 한다.


마치 두 사람이 언성을 낮추고 사실을 따지 듯, 그래야만 운영의 시처럼 “하늘이 내린 연분 끊어지지 않았네(天緣未絶見無因).”까지 다가갈 수 있다. 시 한 편 한 편, 행간 속에 오밀 조밀 숨어 있는 운영과 김 진사의 사랑, 그리고 그 틈새를 스치는 인물들을 찾을 수 있다. 애정전기소설의 일조량이 가장 폭넓게 쬐인 작품으로 손색없다.


특히나 서술(narration)에 주목하여 읽는다면 고소설 미학을 한껏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이제 좀더 <운영전>의 내용부터 살펴보고 본격적으로 악인을 찾아보자.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4년(1601)의 어느 봄날,


지금의 청파동에 살던 '유영'이란 선비는 수성궁에 놀러 간다. 수성궁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세조의 왕위 찬탈 후 억울하게 주살된 안평대군의 사저이다. 수성궁 가운데서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서원으로 들어간 유영은 바위에 앉아 소동파의 시를 읊조리며 가지고 갔던 술병을 풀어 다 마시고 취하여 잠이 든다.


잠시 후 술이 깨었는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 발맘발맘 가보니, 한 소년이 절세미인과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은 유영을 일어나서 맞이했다. 그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인 '운영'과 '김진사'였다. 운영은 자신들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유영에게 들려주니 이러하였다.


 운영의 고향은 본래 남방으로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 속에서 삼강오륜과 당나라 시를 배우며 성장했으나, 13세 때 안평대군의 부름에 따라 입궁했다. 풍류를 좋아하던 안평대군은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난 궁녀 10명을 뽑아 별궁에 두고 시와 문을 배우게 하며, 이들에게 궁 밖에 나가서도 안 되며, 궁 밖의 사람들 가운데 궁녀의 이름을 아는 자가 있어서도 안 된다는 엄명을 내린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온 대군이 궁녀들에게 시를 짓게 한다. 궁녀들의 시를 보고 난 다음 대군은 운영의 시 속에 외로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정감이 담겨져 있음을 알고 운영을 추궁한다.


운영의 시에 외로움이 배인 사연은 이러하다. 하루는 김진사라는 나이 어린 선비가 수성궁을 방문하여 시를 짓는데, 운영으로 하여금 벼루 시중을 들게 한다. 운영은 김진사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를 사모하게 되고, 이후 김진사는 수성궁을 자주 방문하게 된다. 그러나 서로 만날 수 없는 입장이어서 문틈으로 엿보다가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시를 몰래 전한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사랑은 다른 궁녀들과 김진사의 하인인 '특'의 도움을 받아 수성궁의 담을 넘나들며 더욱 깊어 간다. 이로 인해 궁중 담 안의 눈에 김진사의 자취가 드러나게 되고, 운영이 지은 시와 김진사가 지은 상량문에서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다면서 대군은 운영을 의심한다. 이에 자신들의 밀회가 드러날까 두려워한 운영은 궁을 벗어날 궁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운영과 절친하던 궁녀 '자란'은 만류한다. 고민하던 운영이 드디어 수성궁을 탈출하고자 하지만, 운영의 재물을 탐내던 김진사의 노복 '특'이 배신하여 두 사람의 밀회는 탄로나고 만다.


크게 노한 대군이 운영과 다른 궁녀들까지 죽이려 하자 궁녀들마다 나서서 운영을 변호한다. 이에 분노가 누그러진 대군이 운영을 별궁에다 가두지만, 그날 밤 운영은 비단 수건으로 목매어 스스로 죽는다. 운영이 죽자 김진사는 절에 가서 운영의 명복을 비는 재를 올린 다음, 슬픈 마음이 병이 되어 죽는다.


김 진사와 운영은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사랑을 세인에게 전해 달라고 당부한다.


유영이 다시 취중에 졸다가 깨어 보니 김 진사와 운영의 일을 기록한 책만 남아 있었다. 유영은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명산대천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그 마친 바를 알 수는 없다.




이렇게 보면 악인은 두 사람으로 최상층 인물인 안평대군과 특이란 최하층 노비이다. 이 두 사람의 악인이 주인공들을 파멸로 이끈다.


우선 안평대군부터 살펴보자. 안평대군은 운영과 9여인의 삶을 틀어쥐고 있으며 운영과 김진사의 사랑을 끝까지 막는다.


 http://cafe.daum.net/hskk2005-3/1b2O/77?docid=1Dosh|1b2O|77|20080507224210&q=%BE%C8%C6%F2%B4%EB%B1%BA%C0%C7%20%B1%DB%BE%BE&srchid=CCB1Dosh|1b2O|77|20080507224210



 


안평대군의 글씨


만리 관산에 계수나무 그림자 드리운 가을/


누가 높은 루각에 기대어 옥피리를 부는가/


그 소리 은하수 끝까지 퍼져가니/


아, 저기에 내 친구가 있구나




사랑


이 소설에서 안평대군은 물론 실존인물인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은 아니다. 소설의 사실성을 증대시키기 위한 장치일 뿐이지만, 안평대군에 대해 잠시 짚어보자. 잘 알다시피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시문(詩文)·그림·가야금 등에 능하였으며,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혔다. 문종 때 는 조정의 막후 실력자로서 둘째 형 수양대군과 은연히 맞섰다. 그러나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꾸며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일 때 반역을 도모했다 하여 강화도로 귀양갔다. 그 뒤 교동도(喬桐島)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사사(賜死)된 비극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안평대군을 왜 소설 속 악인으로 등장시켰을까?


아마도 부귀와 향락, 정치와 비극적인 죽음이 그를 소설적 인물로 만든 것일 수 있지만, 작중인물로서 안평대군이 악인이 된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운영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특히 안평대군은 운영이외에도 아홉이나 되는 궁녀를 거느리고 있다. 그의 여인에 대한 행위는 독하기 이를 데 없다. 운영과 김진사의 관계와 이 두 남녀의 만남을 도와준 네 명의 시녀들을 행각을 눈치챈 부분이다. 




“이 다섯을 모두 죽여 다른 사람을 경계토록 하여라.”


또 매를 치는 자에게 이렇게 말하였지요.


“곤장 수를 헤아리지 말고 죽을 때까지 쳐라.”의 죽음까지도 요구하는 것을 보면, 권력을 이용한 저 당시 양반들의 사랑이 꽤나 밉다.  


대군은 크게 노하시며 남궁 궁녀들을 시켜서 서궁을 뒤져보게 하시니, 저의 의복들과 보화가 전부 없었지요. 대군은 서궁 시녀 다섯을 뜰 가운데에 끌어다 놓고 눈앞에 엄하게 형장을 갖추어 놓고 영을 내리셨어요.




사랑이란 저토록 모지락스러운 것이지만 안평대군의 저러한 행동 속에는 당대의 가치관이 숨어 있음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꼼수


악인의 한 특징은 꼼수를 많이 쓴다는 것이다.


<운영전>에서 또 한사람은 악인은 특特인데 꼼수가 여간 아니다. 특은 김진사의 하인이다.  이 특의 존재가 참 흥미로운데, 소설 속에서 운영의 이야기를 잠시 따오면 이렇다.




“특은 본디 꼼수가 많다고 했지요. 진사님의 안색을 보고는 나아가 무릎을 꿇고 “진사 어르신, 반드시 오래 사시지 못할 것 같아요.”라고 하고는 뜰에 엎드려서는 울었지요.


진사님께서 그 사정을 모두 말씀하시니, 특이 말하였답니다.


“왜, 일찍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마땅히 꾀를 내 보겠습니다.”


즉시 사다리를 만들었는데, 아주 가붓하고 편리하였으며 접었다 펼 수도 있었습니다. 접으면 병풍처럼 착 달라붙고 펴면 대여섯 길 정도가 되었지만 손쉽게 운반할 수도 있었지요.


특이 “이 사다리를 가지고 궁의 담에 오르시고 안에서 접었다 폈다 하시고 내려오실 때도 그와 같이 하세요.”라고 알려드렸어요.




김진사가 운영을 만나지 못하여 끙끙 앓자, 수성궁을 넘어 들어갈 수 있도록 꾀를 내는 부분이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특의 꾀대로 진행된다.


“보지 못하면 병이 마음과 골수에 박혀 있고 보면 죄를 헤아릴 수도 없구나. 근심하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어쩌면 좋지?”라고 김진사가 운영을 만나는 괴로움을 토로하자 


특은 “아, 그러시다면 왜 남몰래 업고 도망치지 않으시는 거지요?”하여 둘의 도망을 부추긴다.




재물


<운영전>에서 특이 재물에 관심을 갖는 것은 특이하다.


이야기는 흘러 결국 김진사와 운영은 특의 술수대로 넘어가면서 특의 재물 욕심이 드러난다. 운영은 안평대군이 사랑하는 여인이었기에 재물이 넉넉하였는데, 이를 도망 나오기 전에 궁 밖으로 빼돌리려한다. 특의 속내는 이 귀중한 보화를 얻고는 운영과 진사를 산골로 끌고 가서 김진사는 죽이고 운영과 재물을 차지하려는 대범한 계획을 세운다.


운영이 이를 눈치 채고 김진사에게 말하나 세상 물정 어두운 김진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이 노복이 본래 음흉스럽긴 하지만 지금까지 나에게 충성을 다 해 왔소. 오늘날 낭자와 좋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다 이 노복의 계책이요. 어찌 처음에는 충성을 바치다 끝내는 악한 일을 하겠소?”




그리고 김진사는 특에게 재물을 잘 맡아 숨겨두도록 한다. 그 뒤에 운영이 궁에서 나오지 못하자 특은 계획을 수정하여 재물을 제 것으로 하기위한 간교함을 부린다. 도적을 맞았다고 언구럭을 펴는 그 가증스런 대목을 보자.




하루는 특이 스스로 옷을 찢고 자기 코를 쳐 피가 흐르게 하고 온몸을 더럽히고 머리를 헝클고는 맨발로 왜틀비틀 들어와서는 엎드려 울며 말했지요.


“제가 강도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말하지 못하고 기절한 것 같이 하였답니다.


진사는 특이 죽으면 보화를 묻은 장소를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친히 약물을 먹이고 온갖 방법을 써서 살려내셨지요. 술과 고기를 먹이니, 10여 일만에 일어나서는 말했답니다.


“저 혼자 외로이 산중을 지키는데 수많은 도적들이 쳐들어 와서는 형세가 박살낼 듯 싸다듬이하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도망쳐 겨우 실오라기와 같은 목숨은 보전하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저 보화가 없었더라면 저에게 이 같은 위험이 닥쳤겠습니까? 타고난 운명의 험악함이 이와 같은데 왜 속히 죽지 않는 것이지!”


그리고는 발로 땅을 구르고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지요.


진사님은 부모님께서 아실까 두려워서 따뜻한 말로 위로해 풀어 달래서는 보냈습니다.




이 뒤에 김진사가 이를 눈치채자 특의 간악한 행동은 더욱 도를 더해간다.


특은 궁궐 담장 밖에 사는 맹인 점쟁이에게 언구럭을 편다.




“내가 며칠 전에 이 궁궐 담장 밖을 지나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궁궐 안에서 서쪽 담을 넘어 나왔소. 나는 그가 도적인 것을 알고 크게 소리를 지르고 쫓아가니 그 사람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버리고 도망했구려. 나는 그 물건을 가지고 돌아와서 본댁 주인이 오기를 기다렸지. 그런데 우리 주인은 본디 염치가 없어서 내가 물건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는 몸소 와서는 찾더군. 내가 ‘다른 보화는 없고 다만 비녀와 거울 두 물건 밖에는 없습니다.’라고 하니, 곧 우리 주인이 몸소 들어와 찾더니 마침내 두 물건을 찾았는데도 욕심에 차지 않았던지 나를 죽이려 하지 뭐요. 아, 그래 내가 지금 달아나고자 하는데 어떻겠소?”


결국 이 말이 세간에 퍼져 궁중에까지 들어가 궁 사람이 안평대군에게 알렸고 이 일로 운영은 대군의 노여움을 사 자결하게 된다.




교활


비슷한 시기 바다건너 영국의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1616)가 지은 《햄릿》 《리어 왕》 《오셀로》 《맥베스》 등 4대 비극을 악인형 인물들과도 보편성을 갖는 단어이다. 4대 비극을 악인형 인물은 공히 야심, 질투, 위선, 배신, 잔인, 그리고 교활함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절정으로 치달으며 특은 점점 더 교활해지고 과감해진다.


특은 사실을 안 김진사에게 이렇게 교활하게 말하여 다시 신임을 얻어 낸다.




 “노복이 비록 어둡고 어리석지만 또한 목석木石은 아닙니다. 이 한 몸이 지은 죄는 머리털을 뽑아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이제 죄를 면해 주신다 하니 마른 나무에 잎이 돋고 백골에 살이 돋는 것 같습니다. 이러하니 어찌 진사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 김진사, 이 말에 또 운영의 재를 올리려 쌀 40석을 만들어서는 특에게 준다.


특은 절로 갔지만, 3일 동안 궁둥이만 두드리고 누워 있다가 지나가는 마을 여인을 강제로 끌고 승당僧堂에 끌고 들어가 겁탈하고 이렇게 부처님께 불공을 드린다.




 “진사는 오늘 빨리 죽고 내일 운영은 다시 살아나 특의 짝이 되게 해주시오.”




결국 이 모든 사실이 드러나고 특은 김진사의 기도대로 허방다리에 빠져 죽는다.


보통 악은 선과 대립되는 경향이 많으나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딱히 김진사가 특에게 못 되게 굴지도 않았으며 또 특이 운영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이토록 간악한 짓을 하는 것일까?


이상 <운영전>의 악인형 인물들에서 사랑, 꼼수, 재물, 교활 등의 용어를 찾을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00년전 1600년대 악인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