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류대학고(2)

2008. 7. 10. 20:32글쓰기/이 세상은 사각의 정글이 아니다!

이 7가지 외에도 일류의 증거는 수없이 많다. 3류대 졸업생들은 애면글면 참 힘들게 세상을 산다. 사회에 나와 어섯눈 뜨고 비로소 이런 뿌다구니에 생채기를 입고서야 저런 사실을 알았을 때는 발괄할 곳도 없어 엉절거리며 망연할 따름이다. 물론 모든 3류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3류대 구성원들, 특히 학교, 선생이 그리고 직원들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할 문제이다. 자기들에게 편안한 가정을 꾸리도록 월급을 준 저 학생들은 교문을 나서는 순간 갈 곳이 없다.

혹자는 주판질을 하여 이 모든 것을 3류의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몰아친다. 애초에 혜안慧眼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잘못을 공부 못한 3류대 생과 졸업생이 지기에는 문제가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부에 관심이 지나치다. 잘났건 못났건 모두들 공부에 관해서는 내공이 여간 아니다. 그래서 자신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으면서도 소란스럽게 옴니암니 3류를 외대거나 아예 ‘재생불량성再生不良性’으로 진단하고 재재대는 이들도 퍽 많다.

하지만 ‘병촉야유(秉燭夜遊,촛불을 잡고 밤중에 노닌다는 뜻으로, 횃불을 밝히고 밤이 깊도록 유락한다는 의미)’처럼 책을 잡아 놀지 못함을 한하고 이제 와서 ‘수행병하(數行竝下,독서하는 안목의 날카로움을 말함)’를 탓한들 증이파의曾已跛矣로 이미 그릇된 일이니 속절없다. 그렇지 않아도 형영상조(形影相弔,자기의 몸과 그림자가 서로 불쌍히 여긴다는 뜻으로, 의지할 곳이 없어 몹시 외로워함을 이르는 말)요, 달리 변통할 재주가 없는 ‘우물고누 첫수’인 인생들이다.

3류는, 1류가 책 볼 때 딴 짓을 했거나 아니면 부모의 은공을 덜 입어 기본적으로 두뇌가 모자란다는 등속의 그런저런 곡절이 있다. 그러나 3류라는 말 요술이 이토록 매섭게 인생의 여울목을 저토록 거세게 지킬 줄 알았다면, 어리눅게 3류대에 등록금을 그토록 갔다 바치지는 않았을 것이요, 경제학에서 말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법칙(The Law of Unintended Consequnces,경제학 용어로,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인간 본성이나 시장 원리에 어긋나면 본래 목적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이론)”이라는 용어를 진작에 알았던들 생각을 달리하였을 것이다. 정녕 공부에는 일호반점一毫半點도 뜻이 없는데 소견消遣삼아 다녔다고 하기에는 들인 노력이 적지 않다.

좋건 궂건 초라한 날들도 삶의 골조骨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영 부정한다면 그 많은 3류는 다 어쩌란 말인가. 백발白髮이 성성하고 허리가 굽어도 ‘지지리도 공부 안 한, 여줄가리 3류’라고 돌림매질을 해 대어 무엇 한단 말인가. 그러니 인생을 한 번쯤 꺾어 돌린 것을 그다지 타박치 말았으면 한다. 가장 못 참을 것은 3류의 허락 없이 보내는 살천스런 1류의 월권적越權的 시선視線이다. 자존심을 유린蹂躪 당하니, 더 이상 지청구를 퍼붓지 말았으면 한다. 1류로 놓고 보자면, 대한민국 스물에 하나만 빼고는 2․3류이니 이들을 모두 ‘우수리 인생’으로 여길 것이 무에 있는가. 짧지 않은 인생에서 20대의 대학입학은, 결과가 아닌 과정일 뿐이다. 단판 씨름으로 일생을 내 놓으라는 것은 야속한 일이다.

자연인自然人으로서 3류는 1류와 하등 다르지 않지만 서도 대한민국의 3류들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1류보다 낮은 지위에 머무르는 것은 1류의 가치를 존중해서이다. 그래 󰡔��명심보감明心寶鑑󰡕�� 「정기正己」편에는 이런 말도 있잖은가.

“자기가 귀하더라도 남을 천히 여기지 말며 자기가 크다고 남의 작음을 멸시하지 마라 勿以貴己而賤人 勿以自大而蔑小.”저편에서 이편을 저토록 생각한다면 이편에서는 그보다 더한 생각을 하는 것이 사람 사는 이치이다. 오늘도 새로 세워진 저  1류의 독과점 자리는 본래 3류의 삶의 공간도 됨을 한번쯤 생각해야한다.

궁상이 지나치면 글이 추하다지만 빼든 붓이니 몇 자 더 적겠다.

인생이란 밭을 일굼에 대학은 에멜무지로 맨 밭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도 손에는 호미가 들려 있으니, 마음만 야무지게 다져먹는다면 얼마든 갈아엎을 수 있다. 화가 난 농부의 삽질이 더한 법이니 내재한 분노를 잘만 승화시키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그런데 광분狂奔하는 대한大韓의 교육열은 비꾸러져 시종始終을 오로지 여기에 둔다. 1류대를 인생의 올인(all in, 주로 도박판에서 쓰이는 단어로 ‘모든 것을 걸다’의 의미)쯤으로 여긴다. 오죽하면 신문 간지로 그토록 끼어 들어오는 학원 인쇄물은 1류대 동문 화보일까. 이젠 좀 적당히 1류를 떠받들자. 1류대 만능주위萬能主義라는 집단적 망령을 가라앉혀야 한다. 1류대 출신도 3류대를 용납하라. 그들은 순일純一하여 1류의 패覇를 읽지 못한다.

그러니 2․3류의 용씀을 어느 분의 말씀처럼 ‘질 나쁜 패자 부활전을 겉꾸밈하는 하류지식인의 몸부림’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덧거리질은 오만무례傲慢無禮이다.

3류도 3류를 용납容納하여 더 이상 굴욕적인 등수로 여기지 마라. 3류가 내빼면 2류도 1류도 없다. 내가 3류이니 자식만은 1류를 만들고자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만, 퇴행적退行的 사고임에 틀림없다. 1류만이 살아가는 세상은 없거늘 어찌 3류를 비극적 메타포로 읽겠는가. 그들의 꿈을 훔치는 도둑질을 하지 말았으면 한다. 내자가추(來者可追, 지난 일은 어찌할 수 없으나 앞으로의 일은 따라 잡을 수 있음)이니 저때는 그만 따지고 새날을 볼 것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한번 삼류는 영원한 삼류이다’라고 결코 삼류의 족쇄를 풀어 주지 않는다.

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는 3류 대학은 빨리 망했으면 한다. 그래서 부모 심정에, 자식이 3류 대학이라도 나와야 사람노릇 할 것 같아 뼈 빠지게 공납금 대는 학부모들을 더 이상 등치지 말아야 한다.

보론補論이다.

우리는 머리가 좋은 사람만 공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빈말은 아니다. 좀 느리고 기억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떨어지는 만큼 골독하니 책을 잡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글구멍이 트일 수도 있다. 논문도 발품을 들여 찾으면 보이니 그만큼 엉덩이로 버텨내면 된다.

그러나 도시 이러한 설득이 먹히지 않는 곳이 학계이다. 어떤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요즈음 숙지고 있다지만, 학계는 전연 사정이 다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의 최대 호사는 ‘그들만의 리그’가 진행 중인 학문의 세계를 주제넘게 넘보는 일이 되어 버렸다. 학문의 성숙을 ‘시간성과 인내력의 온축蘊蓄’, 혹은 ‘종소리는 때리는 자의 응분應分에서 찾으려 든다면 몹시 당황할 때가 많다.

두뇌지수가 높아야만 글을 쓰고 학교등급에 따라 논문의 등급이 매겨지는 경우를 종종 보기 때문이다. 공부가 만용蠻勇인 한 그 사회의 미래는 밝지 않다. 글줄깨나 읽은 분들 중 그렇지 않은 분들도 더러 계시지만 저 분들은 최종 학위를 어디서 했느냐 보다는 어느 대학 출신인지를 더 먼저 묻는다. 학교를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의 인끔은 저들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대학 사정표로 주판질하여 왼새끼만 연신 꼬아대는 분도 많다.

이쯤 되면 저편과 이편은 벋버스름하여지니 배우는 자로서 교류는 영판 서어齟齬하다. 겸하여 한솥밥 먹지 않았다고 잇새도 어우르지 않는 축들을 보면 스산하기 짝이 없다.

어떤 대학을 나온 이상 졸업한 지 10년이 되었건 20년이 되었건 소용이 없다는 요지경 산수 셈이 적용된 것이다. 하후하박何厚何薄을 오로지 대학에 둔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공부가 어디 이러저러한 이끗만을 보고 하는 것인가를 생각하면 참 이심已甚스럽다.

대부분 인생의 훈수를 두는 글들에서 ‘노력’과 ‘열정’만 있으면 1류가 된다는 말을 믿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은 객쩍은 것일까.

마지막으로 릴케(Rilke, Rainer Maria, 1875~1926, 독일의 시인)의 일화로 이 글을 마치겠다.

어떤 사람이 릴케에게 어떻게 하면 작가가 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이렇게 답하였단다.

“그야 간단하다네. 내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글을 써야 겠다’는 생각만 있으면 된다네.” 릴케의 대답 또한 ‘열정’만 있으면 된다는 뜻이 아닌가 한다. 


* 이글을 쓰는데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역,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세종서적, 1998이 많은 생각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