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의 귀환, <강원도민일보>에 실린 <별난 사람 별난 이야기>

2023. 1. 19. 14:40간호윤 책 다시 읽기

기자라면 이 정도의 열의와 깊이가 있는 기사를 써야 한다. 적어도 신문에 기사를 내려면 저자와 대화를 하려는 성의(미리 책에 대한 이해와 질의거리까지)가 있어야 하며 책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과 이해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언론에 소개된 내 책 기사 중, 가장 폭 넓고 깊은 성찰이 보이는 기사이다. 김진형 기자께 고마움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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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야담의 시대’ 춘천 출신 언론인 송순기 있었다

일제강점기 매일신보 기자를 지냈던 춘천 출신 언론인 송순기(宋淳夔, 1892∼1927)라는 사람이 있다. 봉의산인(鳳儀山人)과 물재(勿齋), 혹은 물재학인(勿齋學人) 등의 필명으로 활동한 그는 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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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진형 
  •  입력 2023.01.19
  • 지면 22면

‘조선 야담의 시대’ 춘천 출신 언론인 송순기 있었다

한학 조예 깊은 전방위 지식인

1921년 책 ‘기인기사록’ 발간
국문학자 간호윤 번역·해설
다양한 기담 속 여성 인물 조명
소설·한시·논설·기행문 섭렵
36세 요절로 잘 알려지지 않아
매일신보 근무 친일 여부 논란
필명 ‘봉의산인’ 등 고향 애정도

▲ 사진 위쪽부터 시계방향으로 1927년 9월 13일 매일신보에 실린 송순기의 부고 기사, 문창사의 최연택이 쓴 기인기사록 서문, 1922년 매일신보에 실린 기인기사록 광고. 책 서문에는 “이 책 은 단지 기이한 일과 기이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중에는 남의 착한 행실을 드러내고 의로움에 감동한 일이 제법 많으니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가르치고 모범이 될 만하다. 어느 누가 대수롭지 않은 일들을 기록하였다거나 한가한 이야기로만 돌리겠는가”라고 적혀있다.

일제강점기 매일신보 기자를 지냈던 춘천 출신 언론인 송순기(宋淳夔, 1892∼1927)라는 사람이 있다. 봉의산인(鳳儀山人)과 물재(勿齋), 혹은 물재학인(勿齋學人) 등의 필명으로 활동한 그는 1919년부터 1927년까지 매일신문 편집기자, 논설부주임, 편집 겸 발행인을 지냈다. 기사뿐 아니라 전방위적 글쓰기로 야담·소설·한시·논설·기행문·전(傳) 등 다양한 장르를 두루 섭렵한 근대 지식인이자 한학에도 조예 깊은 유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고향 춘천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1921년 송씨가 쓴 ‘기인기사록’은 신문에 현토식(懸吐式) 한문으로 연재한 우리의 야사, 문집, 기담 등을 묶은 책이다. 출간 100년이 지나 이 책 속 야담을 쉽게 풀어 쓴 ‘별난 사람 별난 이야기’가 나왔다. 20년간 송순기 글 번역에 매진해 온 간호윤 인하대 초빙교수가 기인기사록 상권 중 요즘 시대에도 도움될 만한 글 27편을 선별했다.

‘기인기사록’의 글은 신문 연재 특성상 1700자 내외의 이야기로 이뤄져 있다. 송순기는 짧은 글에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긴 글은 과감히 줄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 부인의 예지담, 일지매와 임백호의 인연담, 효종과 이완의 북벌담, 여인들의 박학과 시재담, 자신의 눈을 찔렀던 화가 최북의 이야기 등이 실려있다. 송순기의 야담에는 일제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고민과 함께 남녀평등 사상도 뚜렷이 나타난다. 사임당과 난설헌은 물론 다양한 여성 문인들을 소개한다. 책이 단순히 상업적 출판에 목적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 별난 사람 별난 이야기 송순기 지음 간호윤 번역·엮음

야담은 야사(野史)를 바탕으로 흥미 있게 꾸민 이야기다. 간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네 이웃 사람들의 엇구수한 삶의 소리”다. 허구도 있지만 현실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사회 인식이 담겨있다. 각 이야기 뒤편에는 간호윤 교수의 해설이 이를 보충한다. 이를테면 “오늘도 여당 야당으로 나뉘어 격전을 치르는 저 여의도는, 조선 임진년 저 시절, 동인 서인이 패싸움을 하던 저 경복궁의 사정전과 다를 바 없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다”고 언급한다.

간호윤 교수는 18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1930년대는 야담의 시대였다”며 “당시 매일신보 광고 등을 보면 기인기사록 또한 인기를 끈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1970년에도 우리는 할머니 무릎을 베고 야담을 듣고 자랐다”며 “우리의 숨이 담긴 이야기가 낡고 고리타분하다는 인식이 아직 사회 저변에 깔려있다. 우리 삶이 그대로 남아있는 고전과 이야기를 고찰해야 한다”고 했다.

송순기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는 그의 활동이 문학계와 일정한 거리가 있었고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36세에 요절했다는 점을 꼽았다.

친일 행적과 관련한 문제도 있다. 송순기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발행인을 맡아 활동했기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돼 있다. 그러나 단순 친일파로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 간 교수 주장이다. “조선인들의 꿈을 훔치는 글”을 쓰지 않았고, 우리 고유의 야담 보급에 힘썼다는 것이다. 간 교수는 “송순기의 글에서 친일에 대한 합리적 논증을 뒷받침할 만한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며 “기인기사록 하권은 당시 금서로 지정됐는데 임진왜란 때 한국으로 귀화한 일본인 장수 김충선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송순기의 글을 번역하면서 그가 우리 것에 대한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송순기는 고려시대 일본 정벌에 나섰던 명장 김방경을 존경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송순기는 고향에 대한 애정도 깊었다. ‘춘천자’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으며 1920년에는 ‘춘천일별기’라는 글을 썼다. ‘강원도유도천명회’에 글을 싣는 등 춘천 유학 발전을 위한 활동도 했다.

간 교수는 “송순기가 가진 지식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오래 살았다면 우리 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을 것”이라며 “그의 고향 춘천에서 송순기의 행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