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 18세기, 실학은 없다. - 나는 조선인이다』

2017. 7. 28. 13:33간호윤 책 다시 읽기

새물결출판사에서  8월 15일 출간될  『! 18세기, 실학은 없다. - 나는 조선인이다』의' 머리말'과 책 말미의 '나가는 말'이다.  꼬박 세 해를 품 팔아 품삯으로 이 책 한 권을 받았다. 이익, 우하영, 이중환, 안정복, 이긍익, 한치윤,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백동수,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이옥, 김려 등 열다섯 분, 이 분들이 저술한 <곽우록>, <시무책>, <택리지>,<동사강목>,<연려실기술>,<해동역사>,<의산문답>,<연암집>,<청장관전서>,<무예도보통지>,<이십일도회고시>,<북학의>,<척재문집>,<이언>,<담정총서> 등 열다섯 권의 책과 함께한 나날들, '머리말'을 가다듬는 것은, 이제 이 책이 내 손을 떠나 온전히 출판사의 몫으로 넘어간다는 의미이다. ------이제 이 책은 내 삶의 저편으로 간다. 난 또 오늘과 내일로 수굿이 걸어가야 할 것이다.  이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 18세기, 실학은 없다. - 나는 조선인이다  
머리말
나는 조선인인가?
18세기, 실학은 없었다. 실학은 오로지 저 이들만의 용어였다. 조선의 권력은 아무도 실학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들의 권력과 기득권을 탐하려는 불온한 용어로 여겼다. 18세기는 정관사(定冠詞) The!의 세계였다. 정관사는 명사 앞에 붙어서 지시나 한정을 뜻한다. 인간 앞에 양반이란 정관사가 붙어야만 인간이던 시절이었다. 양반의, 양반에 의한, 양반을 위한 조선, 18세기 조선은 양반, 그들만의 세계였다. 이 그들만의 세계에서 일부 조선 지식인들이 도발적인 의문을 품었다. 그렇게 혁신은 위기를 품은 변방에서 시작되었다. 저 이들과 저 이들 글은 조선이 위기임을 적시하고 있었다. 중앙에는 아직도 새날을 알리는 미명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책은 이러한 변방에서 혁신을 외친 저 이들과 저 이들 글을 독해한다.
·정조시대, 흔히들 문예부흥시대라 하지만 조선은 아직도 중세였다.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 중이었다. 조선은 왕 나라였다. 만인지상(萬人之上) 임금과 만인(萬人) 백성만이 존재하고 왕국과 가문 질서만이 삶이었다. 저 이들 글을 통해 본 조선은 정치, 경제, 사회문화 모두 마치 고드름처럼 한 방향으로만 자랐다. 첫새벽부터 일어나 오체투지로 살아가는 조선 백성들로서는 극한 한계상황이었다. 더욱이 관료들은 부패와 무능, 금권만능과 협잡, 지식인은 패거리 문화와 사치 풍조가 만연했다. 조선 지도층은 고약스럽고 폭력적으로 변해버린 18세기 조선식 유학을 숙주로 곳곳에서 악취를 무한 배설했다.
유학은 왕권을 강화하는 취음제, 혹은 향신료이거나 도구적 지식으로 전락했다. 글쓰기는 출세를 위한 중요한 조력자일 뿐이었다. 유학이 지향하는 이상향 대동세계(大同世界)는 중세란 터널에 갇혀버렸다. 조선은 그들만의 이상향으로 빈소리와 헛소리로 먹을 것을 준비해 놓지도 않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식사를 권하는 양반세계(兩班世界)일 뿐이었다.
이러한 국가조선 현안에 일부 유학자들이 나섰다. 앞 문장 일부 유학자들을 풀이하면 조선 변방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지식인들이었다. 정치를 했더라도 미관말직에 지나지 않았다. 인생역정은 기구하였으며, 가난은 삶 자체였다. 하지만 저 이들은 분명 새로운 유학 지식인 출현이었다. 저 이들의 삶은 무엇이 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살아가야하는 것인가에 맞추었다. 그렇게 중세 조선 터널, 저 멀리 미미한 빛이 비쳤다. 그것은 분명 한 방향으로만 자라는 고드름을 녹이기에 충분한 빛의 내비침, 실학이었다.
저 이들, 일부 유학 지식인들은 제 삶을 스스로 통제하였다. 핵심은 신민(臣民)과 문중(門中)이 아닌 였다. 저 이들은 존엄한 조선인 개인으로서 길을 비틀거리며 걸었다. 개개인 삶이 없는 왕권사회에서 저 이들은 나는 조선인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실행하려 삶을 송두리째 빈천과 바꾸었다.
저 이들에게 학문과 글쓰기는 더 이상 관료가 되기 위한 학문도 성정을 읊조리는 문학도 아니었다. 저 이들은 가난과 멸시의 삶을 글쓰기와 환전하여 학문을 통한 사회개혁을 꿈꾸었다. 개인에서 국가로 학문 영역이 확대됨이요, 성리담론이란 학문 알고리즘에서 실용적 배움이란 패러다임으로 전환이었다. 문자라는 상층문화 전유물이 하층문화를 조망하는 공유물로 전환이기도 했다. 이게 신조선이라는 이상향에 대한 실학이었다.
이른바 실학, 혹은 북학으로 저 이들은 요동치는 대외적 현실과 영정조 탕평책 속에서 조선을 중세의 터널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빛이 되었다.
탈중화(脫中華), 탈성리학(脫性理學)은 그 시작이었다. 이를 조선학(朝鮮學)’이라 부르고 싶다. 조선학은 관념화하고 박제된 정신에서 생생이 살아 요동치는 몸으로 전환이었다. 유학은 비정한 정신에서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 오감이 감도는 인간적 몸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비정한 유학에서 몸은 정신의 타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저 이들 글은 몸이 주체였음을 분명히 했다. 몸은 주체로서, 정적인 문화에서 동적인 문화로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저 이들 글은 단순히 읽고 쓰는 게 아니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다섯 가지 감각이 모두 작동하는 살아 숨 쉬는, ‘민족성과 고유성’, ‘인간성과 보편성’, ‘민중성과 현실성을 아우르는 학문으로서 실존실학이었다. 글줄마다 경세치용이요, 이용후생은 여기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글에는 건전한 가치관과 도덕과 정의와 양심을 본밑으로 한 인간주의 샘물이 흘렀다. 좋고 싫음이 아닌 옳고 그름이란 인간중심의 실존실학 논리였다. 실존실학은 바퀴살처럼 사방으로 내뻗치며 조선의 미래를 방사(放射)했다. 저 이들 글은 정치, 경제, 사회문화에 걸쳐 다양하면서도 전문적인 식견과 철학으로 조선 비전을 담았다.
나는 조선인이다!’
도발적인 질문은 이 일곱 자에 방점을 찍었다. 이게 조선학으로 유학 현대성이요, ‘()’으로서 엄밀성, 즉 논리적 준거이다.
이 책은 그 18세기를 대표하는 15명 지식인들 조선학을 살피고 나아가 이 시대 우리가 나아갈 바를 짚었다. 18세기 저 지식인들 목소리는 오래된 미래요, 이 시대에 지남(指南)으로 작동할 기제(機制)로서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시절 대한민국 또한 저 시절과 다를 바 없어서다.
이 책은 저 지식인들 집사임을 자임하고 싶다. 충실히 저 이들 글을 이 시절에 내놓고 싶어서다. 저 이들이 내놓은 해묵은 숙제를 이 시절에 하라고. ‘근대실학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이미 근대는 저 시절에 시작되었고 아직도 실학은 우리가 나아가야할 길을 알려주는 학문이다. 지금 우리가 추구하려는 사회도 이미 저들이 그려낸 사회였다.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당신은 한국인인가?’
2017년 7월 28일
-
-
-
-
-
 
글을 마치며
 
운전무이(運轉亡已)’라는 말이 있다. 운전무이란 우주 만물은 늘 운행 변전하여 잠시도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변치 않는 것은 없다. 저 시절, 눈길 받지 못했던 문헌들이 지금은 우리에게 미래를 보여준다. 저 이들의 글을 읽으며 이 시절 문화창조융합운운의 용어를 떠올리니 말이다.
혹 누군가 우리나라 문화를 세계에 알리려 한다거나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깨닫고 싶다면 저 이들의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좋겠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지어 국방이나 산업, 수출까지, 그야말로 전방위에 걸쳐 어느 방면이든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살 찌우고 안 찌우고는 석수장이 손에 달렸든가. 책의 최종 저자는 독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 이들 글 피륙에 한 땀 정도일 뿐이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넓은 대청마루에서, 혹은 뜨끈한 온돌방에 몸을 맡기고 쓴 글들이 아니다. 저 이들 글은 하나같이 찌는 듯한 여름엔 홑적삼 바람으로 살을 에는 겨울에는 누더기 옷으로 싸매고, 때론 귀향길 허름한 주막집에서 때론 길가에서 폐포파립 차림으로 철골(徹骨)로 먹을 갈고 마음을 도스르고 붓을 잡아 육필(肉筆)로 한 땀 한 땀 써내려갔다. 그렇게 저 이들이 써놓은 글 피륙은 이 조선을 덮고 세계와 우주까지 언급하고 있다. 모쪼록 이 글이 18세기를 보는 한 창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려면 저 이들처럼,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확고한 신념이 필요하다. 핵심은 사는 게 아니라 내 길을 내가 사는 것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 질문은 이미 대부분 사회와 학교가 던진 것을 복습일 뿐이다. 선택지에는 옳다, 그르다 둘 중 하나거나 많아야 5개 중 하나를 찾는다. 부자냐 가난하냐? 맞냐 틀리냐? 잘사느냐 못 사느냐? 성공이냐 실패냐?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질문에 답하는 공부를 학문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질문이 옳은지 그른지 부터 생각해 보아야한다. 나는 과연 존엄한 인간으로서 정중한 대접을 받는가? 내 삶은 도덕적이며 정의롭게 사는가? 이 사회와 세계를 위하여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옛것이라는 진부한 논리와 선진물물에 대한 사대적 권위와 관습화하고 규격화된 학문의 올무를 벗어나 마음을 열고 저 이들의 글을 보라. 저 이들 글은 건전지 닳은 시계바늘이 아니다. 저 시절과 이 시절은 시간으로는 거리가 확연하지만 글은 이 시절과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적대적 공생관계라 한들 한 치도 어그러짐이 없다. 연극 금언 중, ‘진짜처럼 연기하지 말고 진짜가 되라는 말이 있다. 저 이들 삶은 저 이들 글이었다. 저 이들이 써 놓은 글에서 혹 숨결을 느낀다면 저 이들은 이 시대 우리가 살아갈 길을 확연히 보여 줄 것이다.
 
추신: 글을 쓰는 중, 여러 사람에게 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 넣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았기에 첨언한다. 다산 선생이 500여권 이상의 저작들을 출간하였는데 왜 넣지 않았느냐는 뜻이다. 선생 저서는 대부분은 1801(순조 1) 40세 되던 해 강진으로 유배간 뒤에 18년 동안에 이루어졌다.
또 한 가지 이유도 있다. 필자는 이 책의 후속 작으로 ! 19세기를 준비 중이다. 19세기에 선생이 없다면 문학사가 너무 앙상할 것 같아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만드는 데 영감을 준 이문회우 이윤호 선생님의 쾌차를 빌고 새물결출판사와 글자 한 땀 한 땀을 기워진 편집자 유진님, 그리고 열다섯 분의 전각을 마음으로 발라 숨결을 넣어주신 김내혜 선생님께 정중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이 책에서 인용한 글들을 번역해 놓으신 모든 선후배, 동학제현께 일일이 찾아뵙고 감사를 표하지 못함을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당신들께서 이 책을 만드신 참 저자들이십니다. 뵐 때마다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