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6. 10:10ㆍ삶(각종 수업 자료)/나의 이야기
<소손녕과 소배압의 사이>
가끔씩 내가 알고 있던 사실(事實)이 진실(眞實)이 아닐 때가 있다. 『기인기사』상, 마지막 <강감찬>을 번역하며 사실과 진실 구별이 참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책에서는 강감찬과 싸운 장수가 ‘소손녕(蕭遜寧?~997)’으로 되어 있다.
분명 『고려사절요』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절요』제3권 ‘현종 9년(1018), 송 천희 2년ㆍ거란 개태 7년 12월 무술일’ 항목 기록은 이렇다.
“거란의 부마 소손녕(蕭遜寧)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략하면서 군사 10만 명이라고 소리쳤다. 왕은 평장사 강감찬(姜邯贊, 948~1031)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 평남 안주)에 주둔하게 하였다. 흥화진에 이르러 기병 1만 2천 명을 뽑아 산골 속에 매복시키고 또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아두고 적을 기다렸다가, 적이 이르자 막은 물을 터 놓고 복병을 내어서 적을 크게 패퇴시켰다. 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서울로 들어오자 민첨이 자주(慈州) 내구산(來口山, 평남 순천)까지 뒤쫓아 와서 적을 크게 패퇴시키고, 시랑 조원이 또 마탄에서 적을 쳐 머리 1만여 급을 베었다.”
그러나 이 기록에서 ‘소손녕’이 잘못되었다. 현종 9년, 1018년 거란의 침입은 소배압(蕭排押,?~1023)을 도통으로, 소굴렬(蕭屈烈)을 부통으로 삼아 10만의 대군이 내침한 3차 침입이다. 강감찬과 싸운 거란 장수는 소손녕이 아니라 그의 형인 소배압이었다. 소배압은 당시 거란의 뛰어난 명장이었다. 이때 강감찬의 나이가 71세였고 소배압도 그 정도 나이였을 듯하다.
소손녕은 소배압의 동생으로 본명은 소항덕(蕭恒徳) 또는 소긍덕(蕭恆德)이다.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소손녕(遜寧)은 소항덕의 자(字)로 『고려사』에 본명이 아닌 소손녕으로 나오기에 이 이름으로 더 알려졌다. 소씨(蕭氏)는 대대로 요의 황족(皇族)인 야율씨(耶律氏)와 결혼했는데, 형인 소배압은 요 경종의 딸인 위국공주와 결혼했으며, 소손녕도 경종의 막내딸인 월국공주와 결혼해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다. 소손녕이 고려를 쳐들어 온 것은 거란의 1차 침입인 993년이다. 이때 서희(徐熙)와 담판으로 강동 6주를 내주고 강화한 뒤 철군하였다. 소손녕은 997년 아내 월국공주가 병에 걸리자 소태후가 궁녀를 보내 간병을 시켰는데 소손녕은 이 궁녀와 간통했다. 월국공주는 이를 알고 분에 못 이겨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죽었고 이 사실을 듣고 격노한 소태후는 소손녕을 잡아서 처형했다고 한다.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해가 997년이다. 40대 중후반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니 강감찬의 1018년 흥화진 전투와 귀주대첩은 소배압과 싸운 전투였다. 소손녕이 죽은 지 20여년 뒤 일이다. 많은 책들이 『고려사절요』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었다. (실학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쓴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기까지를 다룬 통사적인 역사책인『동사강목』같은 경우도 이 기록을 그대로 따랐다.) 또 인터넷을 찾아보니 1018년 흥화진(興化鎭) 전투를, 홍화진으로 오기하거나 1019년 귀주대첩으로 오인한 경우도 꽤 보였다.
강감찬과 귀주대첩을 안 것은 코흘리개 시절인 초등학교 때부터이다. 하지만 ‘소손녕과 소배압의 사이’, 그 사실(事實)과 진실(眞實)의 오인(誤認)은 그로부터 반백년이 더 지나서 알았다. 그나마 내가 이 야담을 번역하지 않았으면 끝내 모를 일이었다. ‘소손녕과 소배압의 사이’ 그 어느 곳에 배움이 오도카니 숨어있다는 사실을 이제 새삼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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