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 (19) 선생(先生), 행동이 바르고 그 입이 깨끗하다

2022. 10. 3. 19:54신문연재

[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 (19) 선생(先生), 행동이 바르고 그 입이 깨끗하다

 

이름값에 걸맞게 행동하고 말하라

 

이 가을, 용산 발(發) 숙살(肅殺)의 암울한 기운이 스멀스멀 방방곡곡으로 기어든다. 백주 대낮에 “이 XX들…”이라 한 희대의 정범(正犯)이 간나위 교사범(敎唆犯) 패거리와 짬짜미하여 국민을 공동정범(共同正犯)으로 만들려 한다. 문둥이 시악 쓰듯 하는 행태가 꼭 냉수에 이 부러질 우스운 짓이나 등골이 서늘하고 소름까지 돋는다. “정치는 고매한 행위입니다. 저는 그래서 정치를 못합니다.” '변상욱 쇼'를 진행하는 이의 품격 있는 말이다. 저 말 한 마디로 언어의 품격이 살고 정치는 우리 삶에 품위있게 다가온다. 세계 정치무대에 한 나라의 대표로 나가 욕설을 하였으면 염치없어 고개도 못 들 텐데, 그 장본인과 권력 꽃놀이패들이 모주 먹은 돼지 벼르듯 국민을 겁박하고 언론사를 고소하였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품격 있는 언어는 고사하고 고매해야할 정치까지 쇠껍데기를 쓰고 도리질을 해대어 난장판을 만드니 그 입 걸기가 꼭 사복개천이다.

가만히 '정치가 고매하여 못 하겠다'는 저 이의 말을 옴니암니 뜯적거리니 허유와 소부가 떠오른다. 요임금이 보위를 물려주겠다 하니 허유(許由)는 귀가 더럽혀졌다고 영천에서 귀를 씻은 후 기산으로 들어갔고, 소부(巢父)는 영천 물이 더럽다고 소에게까지 마시지 못하게 하였다는 고사이다. 저 이도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이 쪽팔려서 어떡하나”라는 욕설로 정치 평론하는 자괴감이 들어 그런 것 아닐까.

차설(且說)하자. 파리 대가리만한 자음과 모음도 부끄러워 글을 못 잇겠단다. 이번 회는 문 밖만 나서면 너나나나 할 것 없이 '선생(先生)' 소리를 들으니 그 이야기 좀 해야겠다. 얼마 전쯤이다. 서재 근처 미용실을 찾았더니(내 서재 근처에는 이용원(理容院)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미용실을 이용한다.) 해끄무레한 청년이 카운터에서 “어느 선생님께 시술받으시겠어요?”하는 게 아닌가. 식겁하여 나왔다. 이발하는 곳에 내 선생님이 웬 말이며 또 이발하는 기술이 의료 행위인 시술이라니. 멀쩡한 내 머리를 어떻게 수술한다는 말인가? 국어사전을 아무리 뒤져도 이발사를 선생님이라 호칭하며 이발 기술을 가리켜 시술이라 한다는 정의는 없다. 이 시술이 이제는 온 미용실로 퍼진 듯하다.

선생님(先生-님)은 '선생'을 높여 이르거나 나이가 어지간히 든 사람을 대접하여 이르는 말이다. 유의어로는 스승, 은사가 있다. 선생은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 혹은 학예가 뛰어난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김 선생'이나 '과장 선생'처럼 성(姓)이나 직함 따위에 붙여 남을 높여 이르지만, 내 머리털을 깎고 다듬어 주는 이를 선생이라 호칭하지는 않는다. 영어사전에서도 티처(teacher)는 교사, 선생을 칭한다. 그러니 이발 기술을 전수하는 선생과 제자 사이에 호칭이지 손님에 대한 호칭은 아니다.

더욱이 '시술(施術)'은 의술을 베풀 때 쓰는 특수 용어이다. 뜸 시술, 박피 시술, 흉터 시술처럼 의학 전문 용어이다. 주로 미용을 목적으로 하는 보정 시술(補正施術)도 있지만 이 또한 의학에서 얼굴이나 신체의 부족한 부분을 바르게 하는 시술이다. 즉 시술이란 환자의 환부를 치료하는 수술 용어이다. 외국도 동일하다. 옥스퍼드 사전에서도 시술(procedure)을 내과적 수술 (medical operation)이라 풀이하고 있다. 이 외에 최면술 따위의 술법도 시술이라 하지만 이발 기술에 웬 시술이란 말인가.(이발소의 상징인 삼색등이 빨강은 동맥, 파랑은 정맥, 흰색은 붕대로 1500년 대 프랑스 이발소에서 환자를 치료했다는 기록을 믿어서인가?) 마치 양복을 잘 갖춰 입고 갓 쓴 모양새요, '가게 기둥에 입춘'격이니 개도 웃을 일이지만 그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미용실이나 이용원에 대한 직업 기술 품격을 높이고자 '선생님'이라 호칭하고 '시술'을 쓴 것이리라.

언젠가부터 국격을 높이려는 의도인지 국가공무원들조차 모든 민원인에게 '선생님'이라 호칭한다. 언어에 과부하가 걸려도 단단히 걸렸다. 언어는 한 나라 문화의 지평이요, 살아있는 생명체다. 우리가 언어를 소중히 여겨야 할 이유요, 언어의 품격을 지켜줘야 할 의무이다. 언어의 품격이란 그 뜻에 맞게 사용하고 그 뜻에 맞게 행동함이다. “엄 행수(嚴行首)는 똥을 퍼 먹고 사니(嚴自食糞) 하는 일은 더러울망정 입은 깨끗하다네(迹穢口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 선생이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이란 소설을 쓴 동기다. 소설에서 선귤자(蟬橘子)는 이름난 사대부들이 그의 아랫자리에서 노닐기를 원하는 대학자였다. 그는 똥을 푸는 엄행수라 '예덕(穢德,더러운 일)'이지만 '선생'이란 극존칭을 붙여 부르며 공경한다. 이유는 행동이 바르고 그 입이 깨끗해서란다.

그런데 '바이든'이 '날리면'이라더니 이제는 '이 XX'도 기억에 없다 한다. 야만의 언술이다. 한 입으로 온 까마귀질 하는 격이요, 입 가리고 고양이 흉내를 내는 꼴이다. 선조들은 자기 입으로 한 말을 바꾸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행위를 '고수관(高壽寬)의 변조'라 일갈하였다. 당나라 재상 풍도(馮道)의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 입은 재앙의 문)'이요,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 혀는 몸을 베는 칼)'도 경계 삼을 말이다. 이왕 선생, 대통령, 국회의원이라 불리면 이름값에 걸맞게 행동하고 말했으면 한다. 호칭만으로는 품격이 높아지지 않는다. 그러려면 먼저 그 입을 깨끗한 마음으로 헹궈 내야한다. 입에서 구렁이가 나가는지 뱀이 나가는지 몰라서야 쓰겠는가.

 

▲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인하대학교 초빙교수/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