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15)

2022. 8. 9. 14:00신문연재

 「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15)

(15)오동누습(吾東陋習), 우리나라의 제일 나쁜 더러운 버릇을 고쳐라

시천창창(視天蒼蒼,하늘을 보니 파랗기만 한 데) 천자불벽(天字不碧,‘하늘천’자는 푸르지가 않다)
창오가야(蒼烏可也,푸른 까마귀라도 괜찮고) 적오가야(赤烏可也,붉은 까마귀라도 좋다)
 

“아! 저 까마귀를 보자. 그 날개보다 더 검은빛도 없으나 갑자기 비치어 부드러운 황색도 들고 다시 비치여 진한 녹색으로도 된다. 햇빛에서는 붉은빛을 약간 띤 누런색으로 번쩍이다가 눈이 아물아물해지면서는 비취색으로 변한다. 그렇다면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해도 좋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일러도 좋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 선생의 <능양시집서>에서 끌어온 글이다. 진실은 늘 보이는 곳에 그렇게 숨어 있지만, 지식만을 암기한 눈으로는 찾지 못한다. 우리는 보통 까마귀의 빛깔이 검다고만 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폐쇄적이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지식일 뿐이다. 연암은 한 마리의 까마귀에서 부드러운 황색의 까마귀, 진한 녹색의 까마귀, 등자색을 띤 자줏빛의 까마귀를 본다. 

 

이어지는 글을 통해 연암의 지혜를 좀 더 보자. 

 

“저 새는 본래 일정한 빛깔이 없거늘, 내가 먼저 눈으로써 빛깔을 정해 버린다. 어찌 다만 그 눈으로 확정 지었겠는가. 보지도 않고 마음속으로 먼저 정한 것이다. 아! 까마귀를 검은빛에 가둔 것만도 족한데, 다시 까마귀로써 천하의 온갖 빛깔을 고정하려 드는구나. 까마귀가 정말 검기는 하지만 누가 다시 이른바 까마귀의 푸르고 붉은색이 곧 검은색 안에 들어 있는 빛인 줄 알겠는가.” 

 

연암은 사물을 ‘본래 일정한 빛깔이 없다’는 ‘본무정색(本無定色)’ 넉 자에서 새로운 지혜를 얻었다. 눈이 색을 본다는 것은 단순한 암기에 의한 착각일 뿐이다. 실상은 빛의 간섭현상 때문에 색이 여러 빛깔로 보인다. 빛과 색 사이의 물리적 현상에서 얻을 수 있는 연암의 사고과정은 단순 지식과 외물의 현상보다는 이면을 치밀하게 살핀 결과이다. 그 구체적인 표현이 ‘창오가야(蒼烏可也) 적오가야(赤烏可也)’다. 이렇듯 까마귀의 색을 검다, 붉다, 푸르다 속에 잡아둘 게 아니다. 교육현장에는 이러한 교육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작금의 우리나라는 교육은 어떤가? 「국민대 ‘김건희 논문 표절 봐주기’…학계, 국민검증 돌입 국내외 학자 2천 명 참여한 지식네트워크 ‘국민대, 상식 이하 결론…학계 차원에서 공동대응’」 이 신문 기사가 우리 대학의 현주소다. 경제력 10위권, 자칭 선진국이라는 대한민국. 분명 학력은 높고 지식은 넘쳐나는 데, 양심은 저열하고 지혜는 없다. 예의‧정의보다는 불의‧요령이 세상살이에 더 편리하고 불로소득을 노리는 부라퀴 같은 사람들이 더 잘 산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은행의 노예가 되었다. 무서운 게 이 모든 것이 합법적이다. 살아본 경험을 요약하자면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두 그들만의 리그요, 닫힌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30년 넘게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이 모든 원인에 우리의 단순 암기 지식 교육이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살아남기 위한 경쟁으로 단편적 글자의 해석과 지식에만 온 정성을 다하니 까마귀는 검을뿐이다. 계절로 비유하면 지식만 암기하니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요, 만물이 소생하는 지혜의 봄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런 지식 암기 교육의 대명사가 『천자문』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 선생은 이를 ‘오동누습’이라 하였다. 다산은 <증언>에서 초학자가 체계 없는 『천자문』을 쓸데없이 암기하는 것을 두고 “이것은 우리나라의 제일 나쁜 더러운 버릇이다(最是吾東之陋習)”라고까지 극언한다. 

 

연암 역시 <답창애지삼>에서 “마을의 꼬마 녀석이 『천자문』을 배우는데 읽기를 싫어하여 꾸짖었답니다. 그랬더니 녀석이 말하기를, ‘하늘을 보니 파랗기 만한데 ‘하늘 천’자는 푸르지가 않아요. 이 때문에 읽기 싫어요!’”라 하였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본 하늘은 그저 파랄뿐이다. 

 

그런데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하고 맹목적으로 외운다. 해석하자면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인데 하늘이 왜 검은가? ‘하늘 천(天)’자에는 전혀 그런 내색조차 없는데 하늘 아래 최고의 진리로 여긴다. 『주역』 〈곤괘〉에 “무릇 검고 누런 것은 하늘과 땅이 뒤섞인 것이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를 끌어와 대여섯 살 코흘리개들에게 설명한들 이를 이해할까? 

 

『천자문』 첫 자부터 저러하니, 이로부터 ‘배우고 묻는다’는 학문(學問) 본연의 자세는 사라지고 만다. 이러니 숟가락이 밥맛을 모르 듯 국자가 국맛 모르 듯 글맛을 어찌 알며 어찌 인간 교육이 되랴. 교과서에서 암기한 알량한 지식나부랭이 몇을 전부라 여겨 저 잘났다고 가들막거리고 아기똥하게 세상을 되질하는 자칭 지식인들이 즐비하다. 그야말로 암기 공부한 것이 비단보에 개똥일 뿐이다. 전 세계 가장 높은 대학 진학률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집단지성이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천자문』이 이 땅에 들어온 지 1500년이 훌쩍 넘었다. 이제는 『마법 천자문』 등으로까지 무한 번식하며 아이들을 괴롭힌다. 보암보암 도덕성도 전문성도 모자라는 듯한 교육부 수장이 5세로 학령을 낮추자 하기에 적이 우려되어 써 본 글이다. 

http://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6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