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 (7) 아시타비(我是他非) 대학, 사유(四維)의 하나인 염치교육이 펼쳐져야

2022. 4. 19. 09:27신문연재

[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 (7) 아시타비(我是他非) 대학, 사유(四維)의 하나인 염치교육이 펼쳐져야
  •  승인 2022.04.18 18:44
  •  수정 2022.04.18 19:22
  •  2022.04.19 15면
 
사유란 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네 가지 벼릿줄로 예(禮)·의(義)·염(廉)·치(恥)이다

내로남불! 이중 잣대를 비꼬는 신조어란다. 한자어로 바꾸면 아시타비(我是他非·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이다. 염치없는 짓이다! 부산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에 이어 고려대도 조민 씨의 입학을 취소하였다. '부정입학'이란 뜻이다. 그 근거라는 게 논리는 박약이요 견강은 부회하니, 치졸하기가 억지춘향격이다. 지면이 아깝고 먹물에 부끄러워 독자의 몫으로 약(略)한다. 그렇게 많은 입학생 중, 단 한 사람만 '부정입학'이라는 명사 범주에 집어넣었다. 범주라면 응당 '동일한 성질을 가진 부류나 범위'가 있어야 한다. 입학 취소 원인에 대한 잘잘못을 따진다면 입학시킨 학교 측에 잘못이 더 있다. '부정입학'하려는 학생을 대학에서 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권력과 돈깨나 있는 자들의 자제들이 입시에서 혜택을 보는 것이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마땅히 당시 입시와 관련된 보직 교수들과 입시처 담당 직원들이 징계를 먼저 받는 게 공평한 도리이다. 그런데 무슨 논법인지 잔인한 처벌을 학생만 받았다. 학생을 육성하는 학교, 그것도 '큰 배움터'인 대학교에서 한 일이기에 그 졸렬함이 소학교 문전도 못 간다. 정권이 바뀌자마자 그 욱일승천하는 기세에 연합하려 한 행위여서 더 괘씸하다. 대학은 정치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학문의 해방구로서 쩡쩡 죽비소리가 들려야 하거늘 웬 아부 놀음인가. 저들은 권력이 여울로 소금 섬을 끌래도 나부시 복종할 태세이다. 대학에 만장(挽章)이라도 채워야 하려나 보다.

 

더욱이 '자식을 보기엔 아비만한 눈이 없고 제자를 보기엔 스승만한 눈이 없다' 하였다. 제자와 스승으로 만난 자들 중, 그 어느 스승도 양심선언을 하거나 이 대학의 행위를 꾸짖는 자가 없다. 마치 침묵이 선생다운 선생의 가장 좋은 알리바이라도 되는 듯이. 그 행위를 비하자면 대학이나 교수나 정의니, 진리니, 지식이니, 상아탑에 가당치도 않다. <대학> 첫 구절 “대학의 도는 명덕(明德·사람의 도리에 맞는 행동)을 밝힘에 있다”는 샛눈으로도 안 된다. 몰염치의 극치이다. 인재를 찾으려는 북이 커야 북소리가 클 터인데 저런 옹졸한 소리를 내는 북소리 듣고 영재들이 오겠는가. 더욱이 모든 학점을 이수하여 졸업장까지 받았다. 지금의 대학 격인 성균관에 기거하는 유생들은 식당 출입 기록으로 각종 시험의 참가 자격을 얻었다. 출석 일수에 따라서 자격을 부여한 셈이다. 대학 4년에 대학원 과정까지, 그 10여 년의 출석률을 셈 쳐 볼만도 하다.

 

새로 들어서는 정권이 통합이니 탕평이니 하여 성균관 이야기 하나 더 첨부한다. 성균관대학 입구 탕평비에 영조임금 친필이 새겨져 있다. <논어> '학이' 편에 보이는 “군자주이불비 소인비이부주(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이다. 연속극에서 당파 싸움을 하도 다뤄 '탕평책' 운운은 각설하고 글귀만 해석하자. 다산 정약용 선생은 <논어고금주>에서 “군자는 덕(德)을 함께하는 사람이 있어 항상 마음으로 친밀하게 지내 세력으로 결탁하는 일이 없지만, 소인은 세력과 이익의 사귐이니 언제나 힘으로 어울려 당파를 만들고 마음과 의리로 친분을 굳히지 못한다”하였다. 군자들이 가르치고 군자를 길러내는, 대인의 학문을 하는 대학이다. 어찌 정치판에 휘둘려 저렇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소인배 짓거리를 하는가. 이 모두 대학(인)에 '염치교육'이 없어서다.

 

“염치는 사유(四維)의 하나이다. 사유가 제대로 펼쳐지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 꼴이 되지 못하고 사람도 사람 꼴이 되지 못한다… 어린아이가 귀한 보물을 가슴에 품고 시장 네거리에 앉아있어도 제아무리 탐욕스럽고 교활한 자들이지만 눈을 부릅뜨고 침을 흘릴 뿐 감히 빼앗지 못하는 것은 염치 때문이다.” 18세기 실학자 우하영 선생이 지은 <천일록> 제5책 '염방(廉防·염치를 잃지 않도록 방지함)'에 보이는 글이다. 사유란 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네 가지 벼릿줄로 예(禮·예절)·의(義·법도)·염(廉·염치)·치(恥·부끄러움)이다. 네 가지 중 선생은 염치를 가장 먼저 꼽고는 이를 잃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고 역설한다. <관자> '목민편'에서 관중은 사유 중, “하나[예]가 끊어지면 나라가 기울고 두 개[의]가 끊어지면 나라가 위태로우며, 세 개[염]가 끊어지면 나라가 뒤집히고 네 개[치]가 끊어지면 나라가 멸망한다”고 했다. 우하영 선생은 염치를 잃어버린 위태로운 18세기 조선을, '제6책' <어초문답>에서 “지금 눈앞에 돌아가는 세상 꼴을 보면 온갖 법도가 모두 무너져서 떨쳐 일어날 수 없고 공과 사가 바닥까지 떨어져 어찌해볼 도리가 없게 되었으니 참으로 위태롭고 근심만 깊어 갑니다”라 진단했다. 그리고는 처방전으로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떳떳한 본성을 들었다. 이 본성이 염치이다.

 

염치는 인간만이 갖고 있는 본성이기에 이를 진작·흥기시키면 된다는 말이다. 선생이 처방한 약은 의외로 간단하다. 선생은 “공자 마을 사람들로 대우하면 사람들이 모두 공자 마을 사람들과 같이 된다. …만일 염치 있는 사람들을 높인다면 어찌 본받아 힘쓰고자 하는 사람이 없겠는가?” 하였다. 염치는 서로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선생 말대로라면, 만약 저 사람이 염치없는 행동을 하면 그 이유는 저 이가 아닌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 내가 저 사람을 공자 마을 사람으로 대하고 염치 있는 사람을 높였다면 저 사람이 어찌 염치없는 행동을 하겠는가? 대학이라면 교수라면 이런 보약을 학생들에게, 사회인들에게 한 첩씩 먹여야 하거늘, 오히려 염치없는 환자가 되어 복용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여러 첩이나.

조민 씨 나이쯤 되는 여성에게 '입학 취소' 견해를 물어보았다. 냉소적으로 돌아온 답변은 첫 줄에 쓴 '내로남불' 넉 자였다. 반평생 넘게 학생들을 가르쳤다. 우리 교육 문제는 교육이 아니라 선생이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낀다. 선생이라면 '나는 바담풍해도 너는 바람풍하라'고 가르쳐야 한다. 어찌 최고 교육기관인 대학과 교수들이 '아시타비'의 지목 대상이 되었는가.

 

제 아비는 이미 '새벽 호랑이'가 되었다. 그 딸자식에게까지 가혹한 형벌을 꼭 씌워야 하나. 염치의 '치(恥)' 자는 耳(귀 이)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면 얼굴이나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게 된단다. '내로남불'과 '아시타비'로 무장한 대학과 선생들이여! 모쪼록 귀만이라도 붉어지셨으면 한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인하대학교 초빙교수, 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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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 (7) 아시타비(我是他非) 대학, 사유(四維)의 하나인 염치교육이

내로남불! 이중 잣대를 비꼬는 신조어란다. 한자어로 바꾸면 아시타비(我是他非·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이다. 염치없는 짓이다! 부산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에 이어 고려대도 조민 씨의 입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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