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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15. 13:22간호윤의 책들/아! 나는 조선인이다(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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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읽고 삶으로 육화시키길
다연학술연구소장 간호윤 박사
이연경 『2126호』 (기사입력: 2017/10/25 10:33)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란 말이 무색하다. 우리나라 성인의 일 년 독서률은 9권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낮다. 그런 와중에 고전을 읽으라고 권하는 이가 있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국어 선생으로 십 수 년, 다시 고전 작가로 십 수 년을 살아온 간호윤(57) 박사. 30여 권의 적지 않은 책을 쓰면서 깨달은 바는 고전이 우리 삶의 길잡이가 된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이야기가 담긴 고리타분한 책이 아니라 현재를 밝히고 미래를 들여다보는 맑은 거울이다.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로 지정된 베스트셀러 <다산처럼 읽고 연암처럼 써라>(조율)에 이어 <아! 나는 조선인이다>(새물결플러스)를 펴내며 연암과 18세기 조선의 실학자들을 21세기 한국으로 다시 소환한 간호윤 박사를 부천에 자리한 다연학술연구소 휴휴헌休休軒에서 만났다.


한자를 배워 고전에 눈뜨다
간호윤 박사는 경기도 화성, 물이 많은 동네 흥천興泉에서 태어났다. 예닐곱 살 때부터 큰할아버지께 명심보감을 배웠다. 큰할아버지처럼 한자를 줄줄 읽고 싶었다. 열두 살에 서울로 전학왔다. 흥천에서는 반장도 하고 괜찮은 녀석이었지만 서울에서는 한낱 촌뜨기이자 놀림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시절 꿈꾸었던 국어 선생의 꿈을 이루었다. 학력고사 시절 인문계 고등학교 국어선생으로서 늘 공부를 강조했다. 아이들을 가장 늦게까지 잡아두는 선생님으로 유명했다. 그러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인하대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교사와 학생을 병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주변의 압박과 개인적인 어려움은 날로 커져갔다. 결국 1년 휴직을 하고 공부에 전념했지만 다음해 바로 복직할 수밖에 없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공부만 하기엔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


양식장에서 벗어나 바다로
그렇게 다시 돌아온 학교는 이전과 다르게 보였다. 그동안 학교가 세계의 전부였는데, 드넓은 세상에서 돌아와보니 가두리 양식장에 불과했던 것. 교장선생의 유리창 닦으라는 소리도, 장학사가 오니 책상정리 하라는 소리도 다 어리석게 들렸다. 더 이상 다니지 못하고 사직을 결정한다. 박사학위를 딴 것도, 다른 직장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16년차 교사였기에 4년 후면 연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연금을 목적으로 의미없는 삶을 사는 것보다 빨리 그만둔 것을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인하대와 서울교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다양한 강좌를 열어 시민들과 소통하는 시간도 갖는다. 고전에서 배운 내용을 현대적인 언어로 잘 버무리고 해석해 많은 이들과 나누는 것을 일생의 소명으로 알고, 책 쓰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제 전공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입니다. 연암 박지원의 주변을 늘 탐색하다 보니 18세기 학자들을 다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18세기 유학은 왕권을 강화하는 도구적 지식으로 전락했고, 글쓰기는 출세를 돕는 주요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연암은 실학자였습니다. 삶이 ‘무엇’이 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개개인의 삶이라곤 없는 왕권 사회에서 ‘나는 조선인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벼슬자리 대신 삶을 송두리째 빈천과 바꾸었습니다.”
당시 실학은 ‘민족성과 고유성’, ‘인간성과 보편성’, ‘민중성과 현실성’을 아우르는 학문으로서 ‘실존실학實存實學’이었다고 말한다. 글줄마다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이 자연스레 언급되며, 건전한 가치관과 도덕과 정의와 양심을 본밑으로 한 인간주의의 샘물이 흘렀다는 것. 좋고 싫음이 아닌 ‘옳고 그름’을 말하는 인간 중심의 실존실학 논리였다. 간호윤 선생은 실학이 아직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학문으로서 기능한다고 강조한다.


인정물태를 글로 옮기다
연암의 한문단편소설 중에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이 있다. 똥 푸는 사람을 예덕 선생이라 높여 부른 것. 청나라에 다녀온 연암이 인상 깊게 본 것은 자금성이 아니라 똥더미였다. 퇴비를 쓴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때까지 더럽다고만 생각하고 활용하지 못했던 퇴비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유심히 보고 배우고자 했던 것이지만 이런 글들이 환영받진 못했어요. 당시 연암처럼 인정물태人情物態 즉, 그 당시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과 사물의 모습을 써내려간 양반은 드물었어요. ‘문필진한文必秦漢 시필성당詩必盛唐’이라 해서 문은 한나라와 진나라 때 것을, 시는 성당 때의 것을 써야 한다는 것이 그 시대의 불문율이다시피 했기 때문이죠. 정조도 공자왈 맹자왈을 읊는 대설大說이 아닌 연암의 자잘한 소설小說을 싫어했어요.”
흔히들 문예부흥시대로 알고 있지만 영·정조 시대는 아직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하는 중세시대였다.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 금권만능과 협잡으로 백성들은 극한의 한계상황을 견뎌야 했다. 왕국과 가문의 질서만 강조되는 정치·경제·문화가 모두 한 방향으로만 자라는 고드름같은 시기였다. 문예가 꽃을 피울 수 없는 한겨울이었던 셈이다. 그 시기 고드름을 녹이는 한 줄기 빛이 실학이었다. 개개인의 삶이라곤 없는 사회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게 했다. 그래서 간호윤 박사는 책에서 18세기를 대표하는 지식인들 15명의 ‘아! 나는 조선인이다’라는 자기 정체성의 깨달음을 대표적인 저서와 함께 들여다 보았다.
“실학의 깨달음이나 효용이 과연 18세기에만 필요했던 것일까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학이 날개를 펴지 못하고 있어요. 제가 나온 국어국문학과도 문패를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토인비가 21세기 문명권은 전제정치의 중앙집권화를 탈피하고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했습니다. 이미 몇 개의 대학이 전제 학문을 합니다. 전국의 교수가 이 몇 개의 대학을 나온 사람들입니다. 춘향전을 전하는 대신 ‘춘향전에 나타난 프로이트 심리연구’를 논문으로 작성한다면 민중이 볼 수 있느냐는 거죠. 그전에는 구전되던 야담과 수수께끼가 이제는 학자들의 책상에 올려져서 학문적으로만 연구되고 있어요. 현대에도 실학이 필요한 지점이자 제가 고전을 좀 더 쉽게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정직하고 순수하게
간호윤 박사의 호는 휴헌休軒이다.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로 ‘정직하고 순수하다’는 의미다.
“묘비명을 ‘여기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글을 열심히 쓴 사람 눕다.’라고 했으면 좋겠어요. 지금 다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친다면 과거처럼 공부만 시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한 배를 탔으니 선장인 나를 따르라 하는 대신 각자가 자신의 배를 타고 맘껏 항해하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모선인 내게 와서 상의하라고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고전을 많이 가르칠 것이다. 고전古典 의 고자에는 열 십자十와 입 구口가 있다. 십 대代에 거쳐 입으로 전함직한 책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좋지만, 좋은 책 한 권을 깊이 오래도록 읽으면서 그 책의 내용을 자기 삶으로 육화시켰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가 연암을 좋아하듯 저자를 좋아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평생 읽을 책을 만난다면 그 책이 나를 다독여주고, 나를 찾도록 돕습니다. 18세기 실학자들이 자신을 찾고 ‘나는 조선인이다’라고 고백했듯이 말입니다.”
간호윤 박사는 “말똥구리는 제 말똥구슬을 아껴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고, 용 또한 여의주를 가졌다 하여 말똥구리의 말똥구슬을 비웃지 않는다.”는 연암의 글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내게 주어진 깜냥대로 내가 가진 능력만큼 해내고 사는 것이다. 비교 대상은 남이 아닌 어제의 나다.
고전을 읽고 그렇게 살기 위해 애쓴다는 간호윤 박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길이 신앙을 향한 우리의 여정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끊임없이 고전을 통해 연암과 대화하며, 그가 걸어간 삶의 발자취를 쫓아 그렇게 살고자 애쓰고, 30여 권의 책을 통해 자신의 앎을 전파하는 간호윤 박사가 진정한 고전 전도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