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아! 나는 조선인이다/18세기 실학자들의 삶과 사상』을 받고 감격하다

2017. 11. 9. 10:13간호윤의 책들/아! 나는 조선인이다(2017년)


  간호윤 선생이 정말 좋은 책을 내셨다.『아! 나는 조선인이다/18세기 실학자들의 삶과 사상』은 놀라운 책이다. 귀한 책이어서 읽는 것이 송구스러울 정도다. 친필사인을 하여 보내주시어 감격하였다.


  간호윤(簡鎬允) 선생은 경기도 화성 흥천 두메산골에 살던 어린 시절, 한학자였던 백조부에게『명심보감』『소학』『추구』등을 배우면서 고전과 한문학에 빠져들었다. 순천향대 국어국문학과와 한국외국어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인하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교대, 인하대, 중앙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고전의 재해석을 통한 현대적 글쓰기에 천착해왔다. 연구실이나 논문집에만 갇혀 있는 고전(古典)은 고리삭은 ‘고전(苦典)’일 뿐이며, 연구실에 박제된 한문학, 고전문학은 마땅히 소통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고전을 현대인들의 눈높이에 맞춘 저서에는『억눌려 온 자들의 존재증명』『종로를 메운 게 모조리 황충일세』『개를 키우지 마라』『읽고 쓰는 즐거움』등이 있으며, 전문서에는 『한국 고소설비평 연구』『조선후기 필사본 한문소설집 선현유음』『마두영전 연구』『한국 고소설비평 용어 사전』『주생전·위생전 자료와 해석』 등이 있다.



  책 소개


  18세기 조선은 양반의, 양반에 의한, 양반을 위한, 양반, 그들만의 세계였다.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는 모두 첫새벽부터 일어나 오체투지로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극한의 한계 상황이었다. 더욱이 관료들 사이에는 부패와 무능, 금권만능과 협잡, 지식인 사이에는 패거리 문화와 사치 풍조가 만연했다. 조선의 지도층은 고약하고 폭력적으로 변해버린 18세기 조선식 유학을 숙주로 곳곳에서 악취를 무한 배설했다. 이 세계에서 조선의 일부 지식인들은 도발적인 의문을 품었다. 혁신은 그렇게 위기를 품은 변방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글을 통해 조선이 위기임을 적시했다. 조선 변방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지식인들, 미관말직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무엇’이 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게 중세 조선의 터널 저 멀리 미미한 빛이 비쳤다. 실학을 통해 그들은 요동치는 대외적 현실과 영·정조의 탕평책 속에서 조선을 중세라는 터널에서 벗어나게 하는 빛이 되었다.


  이 책은 그 18세기를 대표하는 15명 지식인들의 조선학을 살피고 나아가 이 시대 우리가 나아갈 바를 짚는다. 이들은 가난과 멸시의 삶을 글쓰기와 환전하여 학문을 통한 사회 개혁을 꿈꾸었다. 그래서 글줄마다 경세치용이요, 이용후생이 자연스럽게 언급되었다. 또한 글에는 건전한 가치관과 도덕과 정의와 양심을 본밑으로 한 인간주의 샘물이 흘렀다. 좋고 싫음이 아닌 옳고 그름이란 인간 중심의 실존실학은 바큇살처럼 사방으로 내뻗치며 조선의 미래를 방사했다. 여기에는 정치와 경제, 사회와·문화에 걸친 다양하고도 전문적인 식견과 조선의 비전이 담겨 있다. 따라서 18세기 저 지식인들의 목소리는 오래된 미래요, 이 시대에 지남(指南)으로 작동할 기제로서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시절 대한민국 역시 저 시절과 다를 바 없어서다. 옛것이라는 진부한 논리와 선진문물에 대한 사대적 권위와 관습화하고 규격화된 학문의 올무와 차꼬를 벗어나 마음을 열고 이들의 글을 보자.


  실학은 아직도 우리가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학문으로서 기능한다. 15명의 지식인들은 지금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사회를 앞서 그려낸 바 있다. 이들이 써놓은 글에서 혹 숨결을 느낀다면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나아갈 길을 확연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고전을 너무나 사랑하는 간호윤 박사의 알기 쉬운 풀이와 맛깔 나는 글 솜씨는 글 읽는 재미를 배가시킬 것이다. 고전을 보다 쉽고 재미있게 읽고 싶은 독자들, 고전을 통해 그 시대 지식인들의 지혜를 읽기 원하는 독자들, 그리고 그 깊은 샘에서 끌어올린 지혜를 통해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을 뚜렷이 보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즐거움과 깨달음을 줄 내용들이 가득하다.


목차

글을 시작하며


1부 국가란 무엇인가?: 성호학파, 중농주의


1장 성호 이익『곽우록』, 곽식자가 육식자를 근심하다

2장 취석실 우하영『천일록』, 내 일념은 동포를 모두 구제하는 데 있다


2부 우리는 누구인가?: 국가의 존재 의의, 역사, 지리


3장 청담 이중환『택리지』,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기록하다

4장 순암 안정복『동사강목』, 내 나라 역사를 찾아서

5장 완산 이긍익『연려실기술』, 난 술이부작한다

6장 옥유당 한치윤『해동역사』,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는다


3부 인간이란 무엇인가?: 연암 학파와 인간주의, 이용후생 정덕, 정의와 양심


7장 담헌 홍대용『의산문답』, 우주의 신비를 알고 싶다

8장 연암 박지원『연암집』, 종로를 메운 게 모조리 황충일세

9장 청장관 이덕무『청장관전서』, 학문은 실용이다

10장 야뇌 백동수『무예도보통지』, 조선 무예를 연마하라

11장 영재 유득공『이십일도회고시』, 21개국 왕도를 회상하다

12장 초정 박제가『북학의』, 북학을 말하다

13장 척재 이서구『척재집』, 조선의 역사와 현실문제에 관심을 갖다


4부 글쓰기란 무엇인가?: 인간의 존재 의의, 사실적 글쓰기


14장 문무자 이옥『이언』, 글쓰기는 근심의 전이 행위다

15장 담정 김려『담정유고』, 백정 딸의 인생역정을 그리다


글을 마치며

참고 문헌


  책 속으로


  선생은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놀고먹는 자가 많은 폐단을 지적하였다. 선생은 그 놀고먹는 자를 병충해 같은 좀벌레, 즉 “육두”(六?)라 부른다. 육두는 농업에 힘 안 쓰는 농민, 과거 시험 준비만 하는 사대부, 힘깨나 쓰는 벌열, 기교를 부리는 광대, 승려, 게으름뱅이를 가리킨다. 과거 시험만 준비하는 사대부(양반)가 저기에 보인다. 양반들은 실제 생업에 종사하지 않기 때문에 먹고살자면 오로지 관작만을 목표로 삼았다. 관작을 얻어 관리가 되면 생재가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반이라면 누구나 먼저 관리 되기에만 열중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양반 신분은 세습되므로 그들의 수가 늘어나는 만큼 관리 후보자 수도 늘게 마련이라는 논리를 편다. 따라서 정례적인 과거 시험 합격자 수만을 따져도 한정된 관직에 모든 양반을 수용할 수가 없다며 재물을 낭비하는 관서, 특히 군현이 너무 많이 설치된 점을 지적해 토지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장 성호 이익『곽우록』」중에서)


  선생은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는다는 ‘무징불신’(無徵不信)의 태도로 학문을 했다. 『중용』 28장에 “상고 시대가 비록 좋으나 증거가 될 만한 바가 없다. 증거가 없으므로 믿지 않고 믿지 않기에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제아무리 좋은 게 있다 하여도 증명할 길이 없으면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무징불신이 바로 선생이 쓴 『해동역사』(海東繹史)를 꿰는 저술 방식이었다. (「6장 옥유당 한치윤『해동역사』」중에서)


  “탕평의 화가 붕당보다 무섭다”는 선생의 말을 귀담아들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도 우리는 붕당과 탕평을 악과 선, 그름과 옳음이라 교육하고 배운다. 붕당의 폐해로 국론이 분열되었고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민사관도 배웠다. 지금도 우리는 한마음 한뜻 및 질서정연만이 옳고, 분열과 다툼은 그르다고 여긴다. 선생의 말을 통해 역사와 우리의 삶을 되짚었으면 한다. 정당들 사이에 다툼이 분분하고 사회에서 여러 가지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현상은 오히려 장려할 만한 일이다. (「7장 담헌 홍대용『의산문답』」중에서)


  어떤 문장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 또는 그런 글 마디를 읽음으로써 맛보는 재미를 ‘글맛’이라고 한다면「민옹전」은 꽤나 매운 소설이다. “종로를 메운 게 모조리 황충”이라는 말은 양반들에 대한 야유였다.「민옹전」은 조선의 상층 계급, 즉 양반 지식인밖에 읽을 수 없는 글이다. 연암은「민옹전」을 읽는 양반들이 황충이 되지 않겠다고 각성하도록 계산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황충 같은 삶을 살지 않아야 하기에 선생은 늘 ‘나는 향원이 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였다. (「8장 연암 박지원『연암집』」중에서)


 『이십일도회고시』는 선생의 참신한 역사의식이 강렬한 시의식으로 변용되면서 형상화한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식만으로도, 시의식만으로도 안 된다. 역사와 문학을 아우르는 지식과 열정이 필요하다. 역사의 도읍지를 발품을 들여 찾고 이것을 시편으로 엮었다는 것은 내 것과 나를 찾으려고 하는 주체적 의식이다. 선생이 조선인으로서 지어낸『발해고』는 이러한 면에서『이십일도회고시』의 수편(首篇)인 셈이다.『이십일도회고시』에는 역사적인 실재뿐만 아니라 설화가 사금파리처럼 빛난다. 옛 도읍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그 왕조와 관련된 여러 사실과 설화를 융합, 수용함으로써 역사를 문예화한 ‘민족서사시’로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11장 영재 유득공『이십일도회고시』」중에서)


  선생이 살던 시대는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배격하는 숭명배청 시대였다. 연암을 위시한 일군의 학자들이 제아무리 뜻을 같이했다 하여도 힘없는 학자들 모임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 양반들은 조선 후기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도 숭명(崇明)을 당위적 명분론으로 내걸었고, 글쓰기도 임금에 대한 충성이나 자연 예찬, 혹은 이기니 심성만을 소재로 삼았다. 더욱이 선생은 일개 서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은 서얼로서 사대부 양반들이 그렇게 혐오하는 청나라로부터 배우자는 논리를 당당히 폈다. 책 이름까지『북학의』라고 지을 정도였다. (「12장 초정 박제가『북학의』」중에서)


  시인들은 늘 기이한 말, 참신한 시어, 참된 경지를 찾는다. 하지만 기이하고 참신함은 특별한 곳에 있는 게 아니다. 기이한 말, 참신한 시어, 참된 경지를 담고 있는 글감은 도처에 널려 있다. 보려는 마음이 없으니 못 보는 것뿐이다. 선생은 그러한 글감을 양반들이 쳐다보지 않는 촌구석에서 찾았다. 응당 호서 지방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이덕무의 시는 호서 지방 풍토기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13장 척재 이서구『척재집』」중에서)






출처 : 이승하 : 화가 뭉크와 함께 이후
글쓴이 : 이승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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