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로 그리는 인천萬畵

2016. 10. 6. 11:27삶(각종 수업 자료)/나의 이야기

                                                            

2016.10.06.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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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랑 선생님이 과하게 써 주신 글이다. 유사랑 선생님은 나와 가까운 분으로 I-View '커피로 그리는 인천만화'란에 인천의 인물들을 연재한다. 끝까지 사양했어야했다. 그렇지 못하여 참 쓴 이나 읽는 이에게 면구스러울 뿐이다. 

커피로 그리는 인천萬畵
'연암교 교주'라 불리는 고전독(讀)작가 간호윤 박사  



‘연암교 교주’, 주위 지인들이 그를 부르는 별칭이다. 연암에 관한 저서가 무려 30권이 넘을 만큼, 그는 앞뒤 재지 않고 오로지 ‘연암’을 먹고(공부) ‘연암’을 향유하며(강의) ‘연암’을 배설(글쓰기)하는 삶을 살아온, 시쳇말로 골수 ‘연암빠’다. 18세기 대학자이자 천재문필가였던 연암 박지원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고전을 읽고 쓰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고전독작가’라는 전대미문의 직업군을 스스로 만들어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이고는, 대학과 여러 강단에서 고전강의와 글쓰기를 병행하며 ‘전통의 맛과 멋’을 상실해 가는 세상에 일갈(一喝)하기를 마다않는 천생 딸깍발이다.

“고전은 민족의식을 한 줄로 꿰어주는 정신줄”
“분초를 다투며 무섭게 진화하는 이 눈부신 IT세상에서 고리타분한 고전학문이 무슨 밥벌이가 되고 돈벌이가 되겠느냐며 백안시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고전과 전통을 망각한 민족에게는 미래 또한 없는 것이 세상이치입니다. 히브리인들을 보세요. 나라와 땅조차 잃어버리고 전 세계를 흩어져 떠돌면서도 자신들의 전통과 고전을 목숨처럼 지켜낸 탓에 지금 세계를 움직이는 강력한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겁니다. 한때 번성했으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문화와 민족이 얼마나 많습니까? 고전은 민족의 의식을 한 줄로 꿰어주는 정신줄 같은 거예요. 자신들의 고전을 모르는 민족의 미래는 필경 뿌리가 뭉텅 뽑힌 허구렁일 수밖에 없어요.”

▲ 인천 서구도서관 강의모습

현재 인천 서구도서관에서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수요일 저녁마다 우리고전특강을 진행하고 있는 고전인문학자 휴헌(休軒) 간호윤 박사(55세)를 만났다. ‘기인기사’, ‘아름다운 우리 고소설’, ‘당신 연암’, ‘다산처럼 읽고 연암처럼 써라’ 같은 그의 저서들이 우수학술, 교양도서로 선정되고,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서 강사로 초청해대는 통에 덩달아 글 쓸 시간도 없을 만큼 바빠졌단다. 그 와중에도 얼마 전 펴냈다며 자신의 수필집에 사인을 해 건네준다. 책 제목이 ‘사이비(似而非)’다.
“연암선생은 결코 사이비 향원(鄕愿)이 되지 말 것을 당부하셨어요. 문(文)이란 원래 ‘나뭇잎의 무늬’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인문학은 그래서 ‘사람의 무늬’를 만들어가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죠. 고전인문학이란 우리 자신 속에 ‘민족적 감성과 뿌리’를 내리는 공부예요. 인문학이 죽고 고전문학이 찬밥신세가 될수록 세상은 점점 사이비로 변할 수밖에 없어요.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고 돈이 사람보다 우선되는 사이비 세상에 무슨 희망인들 있을까요?”

▲ 간호윤 박사의 저서들

대학 3학년 때 평생의 스승 연암과 조우
고향 화성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오게 되었단다. 장남이었던 데다, 어려서부터 한학자인 백조부로부터 한문을 익혀 온 탓에 천자문과 명심보감 등을 줄줄 외고, 학교에서는 반장노릇을 도맡으며 전교회장을 똘똘하게 해내는 그를, 대처로 보내 집안을 일으킬 대들보로 키워보겠다는 아버지의 부푼 기대 덕분이었다. 하지만 서울은 화성과 모든 것이 달랐다.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던 그의 성적은 꼴찌를 맴돌았고, 감수성 예민한 소년은 드넓은 서울의 크기만큼 한없이 위축되고 주눅들어갔다. 그렇게 중학교를 가고 고등학교에 올라갔지만, 반전의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대학은 가야겠기에 면피용으로 순천향대학 국문과에 진학했다. 공부는 거반 포기하다시피 했다지만, 어릴 때의 리더십은 그래도 남아있었던지 문과대 학생회장으로 뽑혔다.

▲ 간호윤박사의 소장 고서들

“대학이라고 뭐 달랐겠어요? 공부는 뒷전이고 아버님이 소 팔아 보내주신 피 같은 향토장학금으로 술이나 마시며 학생회장이랍시고 폼이나 잡고 다녔죠. 그러다 대학 3학년 때 ‘한국고전소설론’이라는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는데 충격을 받았어요. 김기현교수님 강의였죠. 매 시간 한편의 만담을 듣는 것 같았어요. 그 해박함과 풍성한 이야기, 막힘없는 지식에 매료되어 처음으로 나도 공부란 걸 해봐야겠다는 열망에 오장육부가 뜨거워졌어요. 그때 18세기의 거인, 연암이라는 평생의 스승과 조우했죠.”
무섭게 공부에 매달렸다. 어린 시절 익혀둔 한문실력이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공부에 어섯눈을 뜨면서 대학을 졸업했다. 순천향대학 국문과 1호였다. 곧 바로 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으로 진학했다. 학사장교시험에 합격했지만, 어머니가 이북출신 실향민이라는 이유로 신원조회에서 탈락했다. 대학원을 휴학하고 25살 늦깎이로 입대해 3사단 백골부대 포반장으로 복무했다. 그의 군 생활은 이빨 부러지고 손톱이 통째로 빠지는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단다.

교사생활 과감히 접고 젊은시절 꿈 찾아 도전
“제대하고 대학원에 복학해 ‘연암소설에 나타난 참여의식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서울동신실업고등학교 교사로 임용되었어요. 88년 3월이었죠. 한 2년 국어선생으로 잘 근무했는데 아이들 등록금문제로 교장선생과 다투다 쫓겨났어요. 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을 상습연체한 반 아이들에게 도저히 납부를 독촉할 수가 없었거든요. 저희 반이 항상 납부실적 꼴찌라 조회 때마다 교장선생님과 실랑이가 잦았어요.”   
학교를 그만두고는 웅진아이큐 외판원으로 책을 팔기도 하고, 입시학원 강사노릇도 하다가 1991년 3월에 인천 세일고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거기서는 별 탈 없이 학생들과도 잘 어울려 교사생활에 제법 이력도 붙고 재미도 쏠쏠했다. 결혼도 하고 생활도 안정되었다. 인천국어한문교과연구회 부회장이라는 감투도 쓰고, 인천 수능모의시험문제 출제위원도 맡으면서 잘 나갔단다.


▲ 간호윤 박사의 서재 휴휴헌( 休休軒)

“하지만 마음 한구석 늘 허기가 졌어요. 가끔씩 대학시절 뜨겁던 김기현 교수님의 고전소설론 강의가 목마르게 그리워지기도 했죠. 몇 날을 고민하다 인하대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했어요. 다시 오장육부가 뜨거움으로 펄떡였죠.”
굳이 인하대대학원을 택한 것도 그곳이 대학시절 은사 김기현 교수의 모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사공부는 녹록치 않았다. 겨울날 난로도 없는 학교도서관에 남아 공부에 몰입하다 폐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결국 2000년 초, 16년간의 교사생활을 과감히 접고 공부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4년만 버티면 자격이 되었던 교원연금혜택도 미련 없이 포기했다.
“2001년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모교 순천향대를 필두로 인하대, 루터신학대, 한성대, 중앙대, 방송대, 서울교대 등에서 강의를 시작했죠. 소위 보따리장수가 된 거죠. 하지만 그땐 미처 몰랐어요, 학문의 세계에도 뿌리 깊은 연좌제가 작동하고 있을 줄은. 석사나 박사를 어디서 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학부를 어느 대학에서 했는지, 그리고 그 출신대학만으로 현재 그 사람의 학문적 진보와는 전혀 무관하게 학자적 자질과 학문의 질이 재단되고 결정돼버리는 곳이 대학 강단이고 교수세계였어요.”
3류대 출신이라는 딱지를 극복하기 위해 그가 평생 읽어 제친 엄청난 양의 독서와 미치도록 매달렸던 글쓰기 노력도 철옹성 같은 학문연좌제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펴낸 30권이 넘는 저서도, 자그마치 300여 차례나 끈질기게 도전한 교수임용지원서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단다.

지혜를 얻고 마라톤 하며 삶의 희열느껴
“후회가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주저 없이 49%의 미련보다 52%의 꿈을 선택할 겁니다. 때때로 마음이 끓어오르면 ‘길걷기’와 ‘마라톤’으로 달래곤 해요. 해가 뉘엿뉘엿 지도록 들판을 걷다가 풀꽃들로부터 세상사는 지혜를 눈동냥하기도 하고, 심장이 터지도록 마라톤 코스를 달리다보면 아직 살아있다는 벅찬 희열에 전율이 느껴지기도 해요.”
그는 조선, 동아, 서울스포츠, 그린마라톤 등의 대회에서 10여 차례의 풀코스 완주와 20여 차례 하프코스를 경험한 베테랑 마라토너다. 여름이면 학생들 틈에 섞여, 학생들과 똑 같이  발바닥 물집을 송곳으로 터뜨려가며 절뚝걸음으로 국토종주여행도 마다 않았단다. 인터뷰 말미 그가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더니 조그만 쪽지 한 장을 보여준다.
‘염구왈(冉求曰), 비불열자지도(非不說子之道) 역부족야(力不足也). 자왈(子曰), 역부족자(力不足者) 중도이폐(中道而廢) 금녀획(今女畫)’이란 문장이 또박또박 적혀있다.




“논어의 옹야편에 나오는 글귀인데 제가 부적처럼 가슴 속에 품고 다니는 구절이에요. 공자의 제자 염구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가 좋습니다만, 제가 힘이 부족합니다’ 이에 공자는 ‘힘이 부족하다 하였느냐? 네가 중도에 그만 두려 하는구나? 지금 네가 네 자신을 그어버리는구나’라며 스스로의 한계를 규정한 염구를 꾸짖는 대목이죠. 힘에 부쳐 역부족상황이라 느껴지는 순간이면 이 글귀를 꺼내 주문처럼 되풀이해 읽곤 해요. 무딘 재주로 세상을 견디는 제 나름의 방편인 거죠.”

글. 커피그림 : 유사랑 I-View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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