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81. 당신, 연암/간호윤/푸른역사/1쇄 2012.9.29/334면/15,000원

2014. 7. 17. 11:55연암 박지원 평전

 

 

연암, 그는 누구인가? 박지원은 왜 과거를 포기하고 날카로운 글쓰기로 시대를 비판하였는가?

당시 조선의 지배층들은 왜 연암을 두려워하였는가? 글쓰는 작가 따위를 왜 경계하였을까?

국정 책임자인 정조 조차도 연암의 글을 예의주시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연암학'은 '다산학'과 더불어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발전시켜 나간 학문이다. 공통점은 힘 없는 백성들을 위한 학문이었고, 허례허식에 치우쳐 쓰러져 가는 국가를 쇄신하기 위한 학문이었다.

 

연암 본인은 18세기 후반 편안하게 살 각오만 한다면 큰 고생 없이 살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권력을 쥐고 있었던 노론 계열의 양반이었다. 과거 시험만 응시하더라도 출세길은 보장되어 있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선거에 출마만 한다면 당선이 보장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시대를 비판하는 글을 주저없이 써 내려갔다. 결국 제비들이 많이 모여 있는 바위 골짜기로 피신가서 굶주리며 지내야 했다. '연암'이라는 호는 제비 연, 바위 암에서 비롯되었다. 당대의 지식인들이 박지원을 부를 때 연암이라고 불렀기때문이다.

 

'연암학'은 200년이 지난 지금도 빛을 발하고 있다. 썩어진 시대에 편승하여 권력을 거머쥐고 서민들을 착취하는 세력에는 국가의 희망이 없다. 이름없는 서민들을 위해 그들을 대변하는 사람들을 위해 용기를 주고 있는 학문이 '연암학'이다.

 

연암을 쫓아다니며 그의 학문을 배웠던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그가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했는지 알 수 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 옛 말처럼.

연암이 키워 낸 제자들은 당대 서얼이라고 해서 능력이 있지만 서자라는 불합리한 계급 때문에 꽃을 피우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박제가, 이덕무, 김정희 등 실학파들이다.

 

연암은 "자신의 지체와 문벌을 과시하는 것이 일망이요, 조선과 다른 문물이나 풍속을 비웃는 것이 이망이며, 멸망한 명나라에게 굽실거리면서 청에게 거만한 것이 삼망이요, 문자깨나 좀 안다 하여 상대편을 얕보는 것이 사망이고, 중국의 선비들이 청나라를 섬긴다고 탄식하고는 고고한 체하는 것이 오망이다"라고 하였다. (30쪽)

 

인재와 재용과 가난을 해결할 생각을 못 하니 국가의 자기 기만이요, 관리로서 업무는 등한시하며 아랫사람에게 위임하고 제 체면만 챙기니 사대부의 자기 기만이요, 과거 시험에만 골독하니 매달리고 천하에 책을 읽지 않으니 과거 시험의 자기 기만이요,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서얼과 윤리를 파괴하는데도 청나라를 업신여기며 예의의 나라라고 뽐내는 습속의 자기 기만이 사기다. 삼폐는 나라의 법이 사대부에게는 시행되지 않는 것이 하나요, 과거가 인재 등용을 막으니 이폐요, 서원이 군대 회피와 술이나 빚는 곳으로 전락했으니 삼폐라고 한다. (31쪽)

 

정조는 연암을 곁에 두고 싶었다. 정조가 연암을 가까이 두고 싶은 이유를 하나 더 고른다면 연암은 당색이 없으면서도 자기 소신이 뚜렷하며 학문 또한 높았지만 무엇보다도 시시비비를 분명히 하는 성격때문이었다. 정조는 "사람을 볼 때는 선함과 악함을 보아야 한다"라는 분명한 인재관이 있었다. 또 한 가지 더 든다면 연암의 학행일치와 의리다. 정조는 학문의 지행양진을 강조하였다. 앎과 행동을 강조하는 정조로서는 과거를 포기하고 궁핍 속에서도 제 길을 가는 연암의 삶이 지행양진이라고 이해하였다.(55쪽)

 

이덕무는 그이의 제자 중 나이는 가장 많았지만 성격이 여린 샌님으로 책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손방이었다. 오죽하였으면 자신의 호를 간서치(책만 보는 바보)라 하였을까?(158쪽)

 

세칭 북하가라 불리는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서유구 어른이시다. '북학'이라는 말은 <맹자> <등문공 장구상>의 "진랑은 초나라 태생이니, 주공 및 공자의 도를 좋아하여 초나라의 북쪽인 중국에 와서 배움을 구하였는데, 북방 중국의 학자들도 그보다 앞선 자가 없었다"란 대목에서 따온 말이다. (167쪽)

 

이수광은 '백의금난', 즉 흰옷 입는 것을 금지 단속하는 법이 있었고 흰옷을 입는 풍속이 완연하게 된 것은 "가정 을축년(1529)이후 여러 번의 국상을 당하여 계속해서 흰옷을 입는 것이 드디어 풍속을 이루게 되었다"라고 적어 놓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국상으로 인한 잦은 소복이 내쳐 풍습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171쪽)

 

아버지께서는(연암) 후일 지방 수령으로 계실 때도 시중드는 기생들조차 가까이 않으셨다. 기생들과 허여하며 집안 식구와 진배없이 지내셨지만 그 어떤 여인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 (176쪽)

 

30년 벼슬살이에 밭과 재산은 물론 백금의 재산도 없었다. 성 아래의 낡은 집은 값이 궤미에 꿴 돈 30전에 지나지 않았으나 돌아가시도록 거처를 바꾸지 않았으며 한 명뿐인 늙은 사내종에게 변변치 못한 밥조차 배불리 먹이지 못했다.(183쪽)

 

아버지께서 연세 쉰에 벼슬에 나가신 것은 유언호 어른의 천거에 의해서였다. 그 첫벼슬은 선공감 감역이란 말단벼슬이었지만, 이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 집안은 세 깨 밥을 챙겨 먹을 수 있었다.(184쪽)

 

굳이 따지면 아버지의 직업은 독서인이었으니 이만하면 부업치고는 괜챦은 삶인 듯도 싶다.(189쪽)

 

아버지께서는 벼슬길에 나간 것을 몹시 안타깝게 여기셨다. 아마도 '차라리 책이나 지었으면 한 권은 족히 될 터인데....ㅣ'하는 생각이시리라. 그렇다면 아버지께서는 어떠한 책을 지으셨을까?(191쪽)

 

바특한 증거에서 지나지 않지만 매형(연암)께서는 책을 매우 더디게 보셨다. 내가 서너 장을 읽을 때엔 겨우 한 장을 읽을 뿐이고, 또 기억하여 외우는 재주도 나보다 좀 떨어지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매형의 글 앞에 조선의 내로라하는 문장가들도 기를 못 편다. '기억력이 나쁘고 책 읽는 속도가 더딘' 매형이 글쓰기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204쪽)

 

인정물태란 일상을 떠난 삶이 없듯, 삶을 떠난 글도 존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글쓰기는 천상에서 겨자씨를 뿌려 지상의 바늘 끝에 꽂는 비기가 아니다. 매형은 글쓰기는 인정물태, 글은 곧 그 사람이니, 빗방울처럼 많은 그 사람 사는 세상을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숨을 쉬고 밥을 먹어야 하듯 글은 사람들의 삶에 일용이 되고 세상을 바로잡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매형의 글에서 낮은 백성들을 자주 접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208쪽)

 

서얼을 쓰지 못한다는 서얼금고법은 그 연원도 오래되어 태종 15년에 서선의 주장에서 비롯되었다. 시작은 미천한 서얼 출신인 정도전 때문이었지만 이것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며 우리네 서얼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배경이 어둠뿐이었다.(223쪽)

 

조선의 양심, 감히 나는 연암을 조선의 양심이라 부른다. 연암의 짧지만 짧지 않은 벼슬살이는 조선의 양심을 보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 벼슬살이에서 연암은 또 하나의 호를 만들었다. '껄껄선생'이다.(242쪽)

 

군현의 수령의 해야 할 일곱 가지 일, 수령칠사가 있다. 수령에 임명되면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올릴 때 이 수령칠사를 외우니, '농상이 성하다', '호구가 늘다', '학교가 흥하다', 군정이 닦이다', '부역이 고르다', '소송이 드물어지다', '간할이 사라지다' 등 일곱이다. (250쪽)

 

봉황성이 바로 평양인 셈이니 지금의 이 요동 땅이 바로 우리 선조들의 옛 터전임에 두말할 나위 없다. 우리의 옛 영토가 이러하거늘 지금 우리 조선의 사대부들은 한낱 평안도의 평양만이 평양인 줄 안다. 기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 하면 이를 꼭 믿으면서도 '중국의 요동에 있는 봉황성이 곧 평양이다'라고 하면 크게 놀라 손사래를 쳐대며 해괴한 말이라며 나무란다. 잘못이다. 요동은 본시 우리 조선의 땅이었다. 숙신, 예, 맥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의 조선에 예속되었고, 또 오라, 영고탑, 후춘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이다. 역사의 사실이 이토록 엄연한데도 사대사상에 얽매인 조선의 선비들은 이러한 내력을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사군을 죄다 압록강 안쪽에 몰아넣고는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 구구히 펼쳐 놓으며 다시 패수를 그 속에서 찾는다. (258쪽)

 

선비의 독서하는 목적은 강학이나 하고 도를 논하는 데 있지 않다. 부모에 대한 도리와 형제에 대한 우애, 충신은 학문을 닦고 연구한 열매이고 예절, 음악, 형벌, 정치는 학문을 닦고 연구한 쓰임이어야 한다. 독서를 하나 실용을 알지 못한다면 학문이 아니고, 실용을 모르는 독서는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강학이 아니다. 선비의 독서와 글쓰기가 개인의 입신양명이나 수신만으로 그쳐서는 독서도 글쓰기도 아니다.(269쪽)

 

출처 : 창수네 아이들
글쓴이 : 창수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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