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2. 16. 13:34ㆍ삶(각종 수업 자료)/나의 이야기
간 선생 외출기(2)
“어! 선생님 그 차림으로 학회에 가셨어요.”
문하생 중 가장 인간다운 맹 군의 말이 반갑게 나를 맞는다. 그러고 보니 요즈음 내가 제일 잘 입는 청바지 차림이다. 학회와 청바지 차림보다는 학회와 양복이 더 어울려서인가보다. 1997년쯤이던가. 여하튼 그때 처음 발표하러 모 학회를 갔을 때 나는 양복에 넥타이까지 잘 댕겨 맸다. 학회가 끝나고 술이 두어 순배 돌고,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간 선생님 논문은 국어국문학회에 0.01%도 도움을 안 주는 논문입니다.” 아무튼 그런 뉘앙스였다.
술집이면 어떠랴. 제자의 절을 선생님이 깍듯이 맞는다. 문하생들과도 인사를 나눈다. 처음 보는 얼굴이 많고, 앳된 얼굴들이 한 잔 술로 꽤 불그레하다. 요즈음 한학을 한다는 것도 기특하고, 가만 보니 상긋 웃는 얼굴이 참 잘들 생겼다. 나도 한자 책 옆에 끼고 저런 시절이 있었을 텐데…선생님은 늦게 자리에 참석한 50이 넘는 제자의 칭찬에 바쁘시다. “이 사람은 휴헌이라고 책을 여러 권 냈지. …”
그래, 선생님을 만나면 언제나 공부 맛이 난다. 중산 선생님은 우리나라 한학계에서 내로라하는 분이다. 언제나 책을 내면 선생님께 올리지만 묵묵하니 보시고는 “수고했네.”하신다. 내가 책을 열두어 권쯤 냈을 때, 비로소 “응 좋아 졌네.”하셨다. “수고했네.”에도 “응 좋아 졌네.”에도 진정성은 똑같다. 선생님께 모르는 것을 물으면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은 “몰라.” 두 글자다. 물론 다음날 반드시 전화가 온다. “응, 휴헌! 어제 그것은 이렇게 해석을 하는 걸세.” 그런 분이다. 참 마음이 정갈하신 분이시다. 스승은 모름지기 선생님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리를 파하고 사람 좋은 문하생과 종로로 자리를 옮겼다. 이야기 끝에 한 대학, 한 과에 부부교수가 있다는 말을 했다. 나와도 인연의 끈을 잠시 맺은 분들이다. 하마터면 “허어, 그런 일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번엔 잘 참았다.
시나브로 시간은 잘도 간다. 어제 나와 오늘이 되었다. 새벽 두어 시쯤, 택시는 성수대교를 넘는다. 문득 연암 박지원 선생의 호가 떠오른다. 그래, 웃을 소 두 개 ‘껄껄(笑笑) 선생’이시지. “껄껄!” 그래, 그 분은 조선후기를 그렇게, “껄껄”로 살아내셨지. 가로등도 따라 껄껄 웃고, 한강물에 떨어지는 달빛도 껄껄 웃는다.
애가 둘인가 셋인가한다는 내 또래 늙수그레한 택시기사의 말소리가 가스통 바슐라르의 몽상과 겹치고 내 얼굴과 겹치고, …. 나는, 내 서재, 휴휴헌으로 간다.
2013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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