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독서증후군

2011. 4. 2. 09:56글쓰기/글쓰기는 연애이다

오늘 신문(한국일보 2011년 4월 2일 자)을 보니 우리나라 유아기의 과잉독서 폐단에 대한 특집 기사가 실렸다. 유아기에는 책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문자만 암기한다는데 유의해야한다. 이를 하이퍼렉시아(hyperlexia:초독서증)라 하는데, 끝내는 유사자폐로 이어진다는 것이 기사의 대체이다.

언젠가 써 둔 글이 있어 새삼 들여다보았다.

 

독서는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떠넘기는 행위이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타인이 밟았던 생각의 과정을 더듬는데 지나지 않는다. 글씨 쓰기 연습을 하는 학생이, 선생이 연필로 그려준 선을 붓으로 따라가는 것과 비슷하다. …독서의 첫 번째 특징은 모래에 남겨진 발자국과 같다는 점이다. 즉, 발자국은 보이지만, 그 발자국의 주인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무엇이 보이는가를 확인하는 길이다.

 

쇼팬하우어의 <문장론>이란 글에서 찾아낸 구절입니다.

어제 모처럼 찾은 관내 도서관도 예외는 아닙니다. 여기저기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물론 그 대부분은 어린 아이들과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온 어머니들입니다. 우리나라 초등학생의 독서율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으뜸이라는 말이 정녕 거짓은 아닌 듯합니다. 어른은, 아니 중고등학생만 되어도 그 반대편에 서겠지만 대견한 일입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보입니다.

 

“그는 지나치게 책 읽는 일에만 빠져들어 무수한 밤을 책을 읽느라 지새웠고,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책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잠자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책을 읽는 시간은 많아져서 머릿속은 텅 비고 마침내 이성을 읽어버리게 되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책이 챙겨주는 정답을 외우는  돈키호테식 독서행위가 그려져 있습니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에게 읽히는 경우는 저 돈키호테뿐만이 아닙니다.(이 소설 속의 돈키호테를 나는 좋아합니다. 여기서는 다만 위의 문장만을 빌려 온 것이니 오해마시기 바랍니다.) 맹자도 “옛글을 모두 믿는다면 글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盡信書則 不如無書).”라고 하며 글 속에 빠진 독서를 경계하였고, ‘<논어>를 읽되 <논어>를 모른다’는 말도 이러한 경계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맹목적인 독서에 대한 경계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 맹자의 저 말은 조선 경종임금 시절 과거시험 논(論)의 시제로 출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 독서와 계약을 맺어야합니다. 어디까지나 주인은 나요, 책은 종입니다. 책에게 지배당하는 순간 책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의외로 내가 자리 한 폭 깔고 앉은 대학가에는 공부 노예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가슴 서늘한 저러한 독서를 ‘독서증후군’ 쯤이라 하겠습니다. 증상은 아주 다양합니다. 거들먹거리고, 대학 가르고, 제자 무시하고, 제 논문이 최고라 하고…등 그 병세는 꽤 넓고도 광폭하여 걸렸다하면 치명적입니다.

좁은 생각으로 미루어 보면, 독서 후의 저러한 증세는 대개 이기려는 독서를 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 몸을 위해서가 아닌, ‘남을 이기려는 독서’, ‘내 것만 챙기려는 독서’를 하니 병이 될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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