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계(木鷄)’

2008. 9. 21. 18:20글쓰기/글쓰기는 연애이다

‘목계(木鷄)’

가끔씩은 나도 이해 못할 일이 벌어집니다.

 ‘이해 못할 일’이란 자기 합리화적 명칭이니, 제대로 말하자면 모두들 ‘잘못’이라 부릅니다.

배우 안소니퀸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적었답니다.

 “삶에는 두 가지 비극적 요소가 있을 뿐이다. 인간은 잘못을 저지르는 법이라는 것, 그리고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는 것이다.”

저 안소니퀸의 말로 위안 삼자니 낯이 간지럽습니다.

그래 ‘목계(木鷄)’를 생각해 봅니다.


『장자(莊子)』의 ‘달생편(達生篇)’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이란 이는 닭싸움을 좋아하였습니다.


기성자(紀誠子)가 선왕(宣王)을 위하여 싸움닭을 키웠습니다.

열흘이 지나서 왕은 기성자에게 물었습니다.

“닭싸움을 시킬만한가?”

“안됩니다. 아직 쓸데없이 거만하여 기운만 믿고 있습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자 물으니 대답하였습니다.

 “안됩니다. 아직도 상대방의 태도에 응하고 영향을 받습니다.”

 열흘을 더 지나 다시 물었습니다.

“안됩니다. 아직도 상대방을 노려보며 기운이 성합니다.”

열흘이 더 지나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거의 다되었습니다. 비록 상대방 닭이 운다 해도 이미 아무런 태도의 변화가 없게 되었습니다. 마치 목계(木鷄:나무로 깎아놓은 닭)와 같아 덕이 완전해졌습니다. 다른 닭들은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보기만 해도 되돌아 달아날 것입니다.”


‘목계(木鷄)’이기에 변화가 없는 평상심을 유지합니다. 목계이기에 외부에 영향을 받지 않는 굳건한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하여 깨달음의 세계를 얻어 싸움을 하지 않고도 다른 닭에게 두려움을 갖게 만듭니다. 이것이 싸움닭의 경지입니다.


우리네 인간사도 마찬가지일겁니다.  

나는 언제쯤 세상과 담담히 맞설 줄 아는 목계(木鷄)가 될까요?

2008.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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