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눌려 온 자들의 존재증명>

2008. 8. 23. 17:03간호윤의 책들/아름다운 우리 고소설(2010년)

억눌려 온 자들의 존재증명

 

저자, 간호윤 <억눌려 온 자들의 존재증명> , 이회문화사,

 

인문 > 한국문학이론 > 한국문학비평
현대문학이나 서양문학의 전유물이 아닌 우리 나라 고대인들의 소설 비평을 발굴하여 면밀히 해석, 분석하는 이 책에는 우리 소설의 자립을 유도하는 논리적인 규명과 문학과 소설, 시와 소설, 역사와 소설 사이에서 우리 소설의 정체성과 진정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배어 있다. '패설'이니 '잡것'이니 하던 명사가 오롯이 소설을 가리키는 대명사였을만큼 천대받았던 우리 고대 소설을 차분히 해석하고 나름대로의 분석과 비평을 가하며 나아가 소설의 문학사적 의의를 찾으려 했던 조상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들머리에
제 1장 고소설비평이란 무엇인가?
제 2장 한가하고 답답함을 쫓아 없애기 위하여 붓가는 대로 지은 것이라네
제 3장 풍류스런 이야기라
제 4장 세교에 관계되면 괴이쩍어도 무방
제 5장 아름다운 경지가 사탕수수처럼 달콤하네
제 6장 재주를 쓰지 못하여 마음이 간질간질
제 7장 괴탄하고 불경스런 책이옵니다
제 8장 채수의 죄를 교수형으로 단죄하소서
제 9장 깊고 은밀한 약속 귀신만이 알겠지
제 10장 분명히 이것은 내전에서 훔친 것이다
제 11장 진실을 바탕으로 허구를 꾸미고 여러 곡절로 인정물태를 극진하게 만든 것이다
제 12장 어찌 선비 무리에 있는 이단과 다르리
제 13장 천하에는 어질지 못한 사람이 많다
제 14장 너무나 슬퍼 마음 속 깊이 분함을 느꼈다
제 15장 뜻이 커 얽매이기 싫어하는 선비라오
제 16장 소설은 그림과 같다
제 17장 형체와 그림자를 구별해야 한다
제 18장 남녀 간의 애정을 그린 듯
제 19장 인간세상의 온갖 일 모두가 꿈이라오
제 20장 소설은 기를 돕고 운을 돕고 신을 돕고 격을 돕는다
제 21장 모든 사람 분개하여 긴 세월 눈물 뿌리네

 

 


아래는 머리말입니다.

 


배뚜름한 문패를 달아보았다.

‘비평’하면 마치 서양의 것이요, 현대적인 문학 장르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의 문학 속에도 비평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지금처럼 소설비평이 일상의 풍경으로 자리 잡은 것은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므로 도리어 현대 비평이 많은 부분을 그들에게 빚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한문학을 소양으로 한 것들이기에 시와 문에 대한 비평들이 주류를 이룬다 해도 고소설비평이 주눅들 이유는 조금도 없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자료들이 녹록치 않으며, 이 고소설비평은 우리 소설의 자립을 유도하는 논리적인 규명이요, 문학과 소설, 시와 소설, 역사와 소설 사이에서 우리 소설의 정체성正體性․진정성眞正性을 찾으려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소 질감質感이 거칠지라도, 단언컨대 고소설비평은 고전문학비평의 보조물, 고소설 연구의 곁가지가 아니다. 문이재도文以載道라는 표본실標本室의 박제剝製된 지성知性은 더욱 아니었다.

우리의 고소설비평은 실상 ‘억눌려 온 자들이 그려낸 고소설에 대한 존재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고소설사에서 소설가란 늘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피 흘리며 전진해 온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늘 현실에서 소외되었고 별난짓하는 치들로 여겨졌다. 이들에게 소설은 욕망의 소통로였으며 달콤한 과일이었으나 동시에 금단의 열매였다. ‘소설’․‘패설’이니 하는 말 자체가 ‘잡것’임을 환기喚起시키던 때였다.

따라서 소설비평 행위는 자칫 허랑한 소설을 부추기는 선동행위로 비추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소설가는 익명으로 처리된데 반해, 비평가는 그가 누구인지가 정확히 드러난다. 웬만한 마음의 잡도리를 하지 않으면 감행하기 어려운 생일거리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용기있는 자들만이 도전한, 금단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매혹의 질주였다.

고소설비평은 제복制服을 차려입은 문학인 ‘대설大說’에 맞선 ‘소설小說’의 소중한 가치를 온전하게 자리매김한 투쟁의 역사이다. 따라서 고소설비평은 문자 위에서 펼쳐지는 비평어들의 향연보다는 그 안에 내재한 고민을 들어야 한다. 결코 잔챙이들의 글재주 겨룸이 아니기 때문이다.

롤랑바르트의 말처럼 ‘텅빈 기호의 제국’만을 더듬어서는 안 된다. 고소설비평가들, 그들은 눈밝은 기록자들이었다. 글사위 속에는 시대를 고민하는 평객評客들의 고뇌가 있다. 또한 현대의 비평을 읽으면서 느끼는 문자해독의 고민과 아예 우리 사고를 점령해버린 강팔진 수입종 언어들과 눈알을 꼿꼿이 모아 맞설 용어들도 넉넉히 있어 좋다.

더구나 우리의 고소설비평은 어떤 고정적 방법이 아닌 실록實錄, 혹은 작품의 서발序跋 등을 통하여 다양하게 변주變奏되었으니, 그 화음 또한 여간 아니다.

이 책은 이러한 우리 고소설비평을 국문학적 소양이 없는 일반독자들도 보기 쉽도록 엮었다. 나만의 성을 쌓고는 고전을 전리품으로 챙기고 싶지 않다. 어디 고소설이, 고전이, 나만의 것이던가.

고전과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물꼬를 트고자하는 마음으로 고소설비평의 첩첩한 멧갓에서 21장을 솎아내 보았다. 수목秀木 한 그루쯤 보았으면 좋겠다.

끝으로 마무리를 도와 준 유정일 선생님과 김정희 시인, 그리고 이회의 식구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2004년, 꽃샘잎샘 빗줄기가

자목련 후득이던 날

                                 간 호 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