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1. 13:25ㆍ글쓰기와 글 읽기/글쓰기
<시마를 찾아 떠나는 글 여행>
<시마를 찾아 떠나는 글 여행>
아침마다 책상에 앉으면 책 한 권을 찾아든다. ‘시마(詩魔,시 짓게 하는 마귀)’를 혹 만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시, 거문고, 술을 아주 좋아하여 삼혹호(三酷好)라 자호한 이규보(李奎報,1168~1241) 선생의 <시 귀신을 몰아내는 글, 한퇴지의 송궁문을 본받아서(驅詩魔文效退之送窮文)>를 다시 읽는다.
선생은 처음엔 질박하고 문채가 없으며 순수하고 정직하던 사람인데 시의 요사함에 빠지면 말이 괴상하고 글이 춤추며 만물이 현혹되고 사람이 놀라게 된다. 이것은 다른 게 아니라 ‘마귀가 들어서’라며 다섯 가지 이유로 쫓아내려 한다. 그 다섯 가지는 이렇다.
첫째, ‘세상과 사람을 현혹시켜 아름다움을 꾸미게 하며, 요술을 피우고 괴이한 짓을 하여 비틀거리며 열렸다 합했다 하며, 혹은 우렛소리가 나고 뼈마디를 녹게 하고, 혹은 바람이 맞부딪치고 풍랑에 휩싸이게 한다’하였다. 글 쓰는 이들이 문장의 화려함에 매달림을 지적하는 말이다.
둘째, ‘조화를 부리고 신명처럼 밝으며, 혼돈의 상태에서 오묘한 신비를 마치 자물쇠로 잠근 듯이 굳게 간직하고 있는데, 너는 이를 생각하지 않고 신비를 염탐하여 천기를 누설시키는 데에 당돌하기 그지없으며, 달[月]이 무색할 정도로 달의 이치를 밝혀내고, 하늘이 놀랄 정도로 하늘의 마음을 꿰뚫으므로 신명은 못마땅하게 여기고 하늘은 불평하게 여긴다. 너 때문에 사람의 생활은 각박하게 되었다’한다. 글 쓰는 이들이 사물의 이치를 따지고 든다는 말이다.
셋째, ‘구름과 노을의 영채로움, 달과 이슬의 순수함, 벌레와 물고기의 기이함, 새와 짐승의 이상함, 그리고 새싹과 꽃받침, 초목과 화훼 등은 천태만상으로 천지에 변화하고 있는 것을 너는 부끄러움 없이 열 개 중에 하나도 버리지 않고 하나를 보면 하나를 읊는다. 그 잡다한 것들을 한량없이 취하므로 너의 검소하지 못함을 하늘과 땅이 꺼린다’ 한다. 글 쓰는 이들이 소재를 끝없이 취함을 말한다.
넷째, 적을 만나면 즉시 공격할 것이지, 어찌 무기를 준비하고 어찌 보루(堡壘)를 설치하느냐? 어떤 사람을 기쁘게 할 경우에는 곤룡포가 아닌데도 훌륭하게 꾸며 주고, 어떤 사람을 성나게 할 경우에는 칼이 아닌데도 찔러 죽인다. 네가 어떤 도끼를 가졌기에 오직 싸움을 함부로 하고 네가 어떤 권세를 잡았기에 상벌을 멋대로 내리는가? 너는 육식자(肉食者, 벼슬아치)도 아니면서 나랏일에 관여하고 너는 주유(侏儒, 광대)도 아니면서 모든 것을 조롱하는가? 시시덕거리며 허풍치고 유달리 잘난 척 뻐기니, 누가 너를 시기하지 않고 누가 너를 미워하지 않겠는가? 글 쓰는 이들이 주제를 무한히 선택함을 말한다.
마지막 다섯째다. 선생은 글 쓰려는 이, 고심참담한 작가의 세계를 써 놓았다.
汝著於人(여저어인) : 네가 사람에게 붙으면
如病如疫(여병여역) : 마치 염병에 걸린 듯
體垢頭蓬(체구두봉) : 몸은 때끼고 머리는 헝클어지며
鬚童形腊(수동형석) : 수염은 빠지고 몸은 파리해지며
苦人之聲(고인지성) : 사람 소리를 괴롭게 하고
矉人之額(빈인지액) : 사람 이마를 찌푸리게 하고
耗人之精神(모인지정신) : 사람 정신을 소모시키고
剝人之胸膈(박인지흉격) : 사람 가슴을 여위게 하니
惟患之媒(유환지매) : 오직 온갖 근심의 중매쟁이요
惟和之賊(유화지적) : 오직 평화를 뺏는 도적이구나.
是汝之罪五也(시여지죄오야) : 이것이 네 다섯째 죄이다.
선생은 이 다섯 가지 죄를 진 시마가 자신에게 씌었다며 그 증상을 이렇게 적는다. 무려 18개나 되는 글쓰기 증상들이 개떼처럼 짖어댄다.
네가 온 뒤로는 ①모든 일이 기구하고 ②흐릿하니 잊어버리고 ③멍청하니 바보가 되며 ④벙어리가 된 듯 귀머거리가 된 듯하며 ⑤몸은 뜨겁고 발자취는 주저하며 ⑥굶주림과 갈증이 몸에 닥치는 줄도 모르고 ⑦추위와 더위가 살갗을 파고드는 줄도 모르며 ⑧계집종이 게을러도 꾸중하지 않고 ⑨사내종이 미련해도 다스리지 않으며 ⑩동산의 초목이 말라도 깎는 것을 모르고 ⑪집이 쓰러져가도 지탱할 줄 모르고 ⑫가난 귀신이 온 것도 또 네가 부른 게 아닌가.
그리고 ⑬귀인에게 오만하고 부자를 능멸하며 ⑭방종하고 거만하며 ⑮말소리는 높아 불손하고 얼굴은 뻣뻣하여 아첨할 줄 모르며 색(色)을 보면 쉽사리 혹하고 술을 당해서는 더욱 거칠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네가 시켰지 어찌 내 마음이 그러겠느냐. 으르렁으르렁 괴이한 개 짖는 소리 참으로 무리도 많다.
선생은 너[시마] 때문에 괴로우니 네가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너를 찾아 베어버리겠다”고 저주하며 쫓아버리겠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런데 더듬더듬 톱아 읽어보면 시마를 그리 내칠 일도 아니다. ①~⑫까지는 좀 부정적이지만 ⑬~은 자긍(自矜)이라고도 보이기 때문이다. 이유야 여하튼 결국 선생은 시마를 스승으로 삼는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은 뒤 가끔 읽는 글이다. 이규보 선생의 글을 읽을 때마다 놀랍다. 선생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시마를 본 듯하다. 내 휴휴헌에 시마가 찾아온 적 없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저 시마가 찾아와 겪는 18개나 되는 글쓰기 증상 중, 몇 개는 만난 듯해서다.
2025년 올 한 해, 혹 어디서 개떼를 만날까하여 첫날부터 글 여행 채비를 서두르는 이유다.
2025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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