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소설로 부르는 고려속요-그 몸의 노래여! 1-14장 낭독

2022. 10. 11. 12:06간호윤의 책들/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2016년)

 

이 소설은 우리 노래인 고려속요(민요)를 새롭게 이해하여 일반 대중의 품으로 돌려주기 위해 썼다. 고려속요가 단순한 ‘남녀상열지사’의 음탕한 노래가 아니라, 고려 백정(백성)의 삶을 담은 노래여서이다. 따라서 고려속요(민요)의 어휘를 바탕으로 소설을 창작하였다.

 

'몸의 기록'이란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정어린 삶과 건강한 노동이 보여서다. 이러한 몸의 기록을 잘 보여주는 것이 ‘노래’라는 점에 착안하여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을 집필하였다.

 

이 책은 상상력을 덧댄 소설식 구성인 문학 부분(이야기)과 문헌 기록을 실증적으로 추적한 역사 부분(해설)으로 구성되어, 독자들이 고려속요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은 고전문학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해 낸 소설이다.

* 더 자세한 설명은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 Daum 검색

 

 

이 소설을 정명숙 님이 14회에 걸쳐 낭독하신다. 정명숙 님은 소설을 쓰시는 분이다.

https://youtu.be/ZKHXuxfXWss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저자간호윤출판새문사발매2016.02.04.

아래는 2014년 8월에 쓴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 초고 머리말이다.

 

<들어가며>

그들은, 그들의 일부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고려속요를 만든 그들은 지금 여기에 없습니다. 그들의 일부인 문헌의 기록만 남았을 뿐입니다. 떠났지만 남은 그들의 기록을 보다가 드디어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아예 그 시절로 들어가 그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왜 그러한 노래를 불렀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돌이, 달님이, 꽃님이, 곰이,----를 만났고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허구입니다. 하지만 돌이, 달님이, 꽃님이, 곰이,----는 저 시절이나 이 시절이나 늘 있습니다. 저 시절이나 이 시절이나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고려 백정(백성)들의 삶인 고려속요도 지금 우리 곁에서 울고 웃게 하는 바로 그 노래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특정한 장소와 시간 속의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든 돌아가면 만날 수 있는 우리였습니다. 그래, 이 책 속의 글자 한 자 한 자는 저 고려인들이 털어놓는 우리의 이야기이고 싶습니다.

 

‘죽겠다!’

우리가 살아가며 참 많이도 쓰는 말을 생각해 봅니다. 이 죽겠다는 말은 인간으로 생명을 아예 끊는다는 뜻으로 말하기도 듣기도 영 불편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말 중 가장 많이 쓰는 말이며, 죽겠다. 뻗다. 뒈지다. 곱죽다,… 등 비슷한 말도 여간 많지 않습니다. 몇 예만 들어보더라도 ‘추워죽겠다. 바빠죽겠다. 싫어죽겠다. 배고파죽겠다. 슬퍼죽겠다. …’ 끝없이 이어집니다. 저 말들은 실상 죽을 만큼 힘들다는 뜻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반대 상황에도 ‘죽겠다!’를 씁니다. ‘더워죽겠다. 심심해죽겠다. 좋아죽겠다. 배불러죽겠다. 웃겨죽겠다.…’ 죽겠다의 상황이 분명 바뀌었으니 죽지 말아야 하는데 여전히 죽겠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 정작 죽으라면 싫어한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거미줄에 목을 매어 죽을까부다. 호박잎 고인 물에 빠져나 죽을까부다”라는 민요도 보입니다. 거미줄에 어떻게 목을 매며 호박잎에 고인 물에 어찌 빠져 죽겠는지요. 이 말은 단순한 과장이 아닙니다. 곰곰 되새겨 생각할 필요도 없이 ‘죽겠다!’는 뜻매김은 오히려 죽기 싫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죽겠다!’가 아닌 ‘살겠다’는 의지가 숨어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죽겠다!’는 말을 이렇게 쓰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혹 이 말이 우리 몸에 새겨진 역사가 아닌지를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17세기 국어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태학사, 1995)에서 ‘죽다’를 찾아보니 ‘주거’, ‘주거ᄂᆞᆯ’… 등 140여 용례가 무려 20쪽에 달합니다. 그런데 ‘살다’는 ‘사나’, ‘사노니’ 등은 80여 용례에 5쪽에 불과합니다.

 

17세기를 일반화할 수는 없으나 언어는 긴 시간을 거치면서 만들어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해답을 외침 당한 숫자에서 귀띔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숫자는 자그마치 1000여 회입니다. 우리나라 2000년 역사에 기록된 1000여 회라면 2년에 한번 꼴 전쟁입니다. 여기다 나라 안에서 죽고 죽이는 권력 다툼까지 합친다면 이리저리 치이는 백정들로서는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만하지 않겠는지요.

 

특히 13세기 경, 고려는 우리 역사에서 더욱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고려는 왕건이 29명의 호족 딸과 정략적으로 혼인을 하여 건국한 나라였습니다. 호족들의 권한이 그만큼 막강했다는 의미입니다. 호족들의 다툼은 가혹한 정치로 이어지고 백정들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그러니 도처에서 민란이 일어났지요. 여기에 혹독한 무신정권 100년과 삼별초의 항쟁까지 겹칩니다. 밖으로는 거란, 여진, 몽고, 왜구의 침입도 이어졌습니다. 13세기 경, 고려는 200여 살로 건강성을 그렇게 잃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몽고의 7번이나 되는 침입을 받고 몽고 부마국으로 전락하기에 이릅니다. 세상은 고려 백정들에게 가혹했습니다. 보지 않고서도 저 시절의 고려 백정들은 ‘죽겠다!’는 말을 옆에 달고 살았을 겁니다. ‘죽겠다!’와 같은 단 석 자도 이렇게 살펴본다면 그 속에 역사적 사실과 연결되는 색다른 결과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역사를 잘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두 개의 축으로 되어있습니다. 하나는 문자의 기록이고 하나는 몸의 기록입니다. 문자의 기록이 승자와 지배층의 역사라면, 몸의 기록은 패자와 피지배층의 역사입니다. 문자의 기록에는 영웅과 투쟁의 핏줄기가 흐르지만 몸의 기록에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정어린 삶과 건강한 노동이 보입니다. 이 몸의 기록이 바로 노래입니다

 

고려속요는 고려 백정들 몸의 기록입니다. 1200℃의 가마니 불꽃을 견뎌낸 고려청자처럼 고려속요 또한 당대 절망적인 삶을 견뎌낸 하층민들의 기록으로 당당한 고려의 역사입니다. 더욱이 고려속요는 백정들에게서 태어나 불리다가 왕궁의 음악이 되고, 나라가 조선으로 바뀐 뒤 지배층의 문헌에 실려 지금까지 내려오는 노래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리저리 치이는 사이에 하층민의 ‘몸의 노래’인 고려속요가 ‘남녀상열지사’라는 음탕한 노래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돌이라는 한 고려 아이를 발맘발맘 따라가며 고려속요에 담긴 이러저러한 ‘몸의 노래’를 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소설과 해설 두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이야기 문학인 소설을 통하여 고려속요를 담아내려 한 이유는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머물다간 흔적은 바로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크든 작든 이야기를 남기고, 남겨진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며 잊힐만한 것은 잊히고 남을 만한 것은 남습니다. 고려속요에는 이 남을만한 것이 남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8세기가량 우리나라가 더 젊었던 저 시절, 고려속요를 불렀던 그때의 이야기를 돌이를 통하여 보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돌이의 이야기와 함께한 그 시절 고려속요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해설 부분은 문헌 기록으로 남은 고려속요 속에 내재한 과거의 역사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소설에서 못다 한 역사 관련 문헌을 살펴보는 이유는, 오늘의 나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읽기 위해서입니다. 고려속요를 부르며 세상을 살아냈을 고려 백정들, 특히 여인들의 노래에서 우리 현재를 읽고 미래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남녀상열지사’에 갊아 든 조선의 정치적 역학관계도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 힘겨운 삶을 노래에 실어 살아냈던 돌이와 고려 백정들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2014.8. 간호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