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5) 소설로 부르는 고려 속요-

2022. 7. 16. 10:35간호윤의 책들/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2016년)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5)

소설로 부르는 고려 속요-

p 06. 2021

“돌아! 돌아!…저, 저기…저 살강에 있는 깨소금 항아리…비녀….”

피투성이가 되어 업혀 들어 온 돌이 엄니가 남긴 말은 이것뿐이었다. 돌이가 제 엄니를 안았을 때는 이미 얼굴이 하얗게 되었고 솔잎 같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돌이 엄니의 왼쪽 목 위와 오른쪽 가슴팍을 타고 흐른 검붉은 피는 벌써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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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님이와 돌이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돌이 엄니는 무엇인가 작심한 듯 광으로 들어가 낫을 들고 나왔다. 떡전거리의 밤은 낮의 수다스러움을 벗으려는 듯 인기척 하나 없이 괴괴하였다. 검은빛 너머도 검은 가을 밤, 반 토막 난 달빛만이 떡전거리를 지나는 돌이 엄니의 손에 들린 낫에서 창백한 파란 빛을 보았다.

회회아비 집에 들어서는 돌이 엄니의 발걸음은 익숙하였다. 벌써 여섯 해 전, 이 집은 돌이 엄니에게 생명과도 같았다. 돌이 아버지를 만나 첫 살림을 난 것도 꽃님이와 돌이를 낳은 것도 이 집이었다. 그런 이 집을 회회아비에게 빼앗긴 것은 몽고군이 다섯 번째 쳐들어왔을 때 피난을 갖다 온 뒤였다.

몽고군은 이때 경기, 충청, 전라 지역을 휩쓸었다. 몽고군은 성을 함락시키면 열 살 이상 된 사내들이란 사내는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전부 군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전리품으로는 귀를 잘랐다. 남경(현재의 서울)을 함락시킨 후에는 여인의 젖가슴까지 잘라 삶아 먹었고 길에는 떼송장이 즐비하였다.

꽃님이와 돌이를 들춰 업고 떡전거리로 돌아 왔을 때는 이미 회회아비가 이 집을 제 집으로 삼고 있었다. 회회아비는 무력도 무력이지만 몽고군과 함께 들어왔기에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말 한마디 못 하고 허무하게 회회아비에게 집을 빼앗겼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기에 떡전거리 한 귀퉁이에 다시 얼기설기 집을 얽어 지금껏 살아온 것이었다.

돌이 엄니는 낫을 고쳐 쥐었다. 낫을 든 손은 작은 떨림조차 없었다. 돌이 엄니의 얼굴은 창백한 초승달 빛보다도 더 찼다. 바깥채 상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돌이 엄니는 안마당을 지나 성큼 마루로 올라서 왈칵 방문을 열고는 들어섰다. 칠흑 같은 방 안에서 방문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서는 검은 물체의 두 눈에 “이 죽일 놈!”하며 낫을 꽂았다. 돌이 엄니는 다시 한번 “이놈! 죽어라!”하며 꽂은 낫을 뽑으려 하였지만 낫을 쥔 손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돌이 엄니의 팔목이 이미 회회아비의 손에 잡혀서였다.

회회아비는 잠결이지만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을 때 한 물체가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엉겁결에 손을 뻗은 것이 돌이 엄니의 팔목이었다. 웬만한 남정네들도 당해내지 못하는 회회아비의 완력을 돌이 엄니가 이겨낼 수는 없었다.

낫을 빼앗긴 돌이 엄니 가슴팍에 아니, 몸 이곳저곳에 낫은 깊숙이 여러 번 박히는 것을 문틈으로 희미하게 들어 온 가을밤 초승달만이 당산나무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돌이 엄니는 그렇게 꽃님이 언니와 돌이 곁을 떠나갔다.

 

“리러루 러리러루 런러리루, 러루 러리러루, 리러루리 러리로, 로리 로라리, 러리러 리러루 런러리루, 러루 러리러루, 리러루리 러리로”<군마대왕>

날콩을 씹듯 비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모가비 죽이 아저씨의 입을 타고 흐르는 평조가락이 빗줄기를 탄다. 죽이 아저씨의 목청은 맑고 깨끗하며 경쾌하고 분명한 음빛깔이었지만 노랫소리는 봄날 벚꽃 떨어지듯 하였다. 한 맺힘을 푸는 태평소 소리도 가을 빗줄기 가락을 따라 울었다. 꽃샘잎샘바람인양, 가을 빗줄기인양, 차갑고 쓸쓸한 설움의 덩이들이었다. 죽이 아저씨의 입을 타고 부드럽게 흐르던 가락이 꺾이는 시김새 소리는 더욱 사람의 마음을 서글프게 했다.

죽이 아저씨의 노랫가락에 자신을 올려놓고 있던 돌이는 속으로 말했다.

‘엄니 부디 안녕히 가시우. 아무런 고통 없는 곳으로. 엄니!’

죽이 아저씨의 목울대를 적신 시나위 가락이 느릿느릿 끊어질 듯 이어질 듯, 한을 품고 <구천>으로 넘어 갔다.

“징징징-징징징…”

무당의 징소리는 한층 더 크게 울려 울타리 밖으로 울렁울렁 빗줄기를 타고 나가 하늘로 퍼져 올랐다. 울타리에는 돌이 엄니가 심어놓은 수세미가 오롱조롱 매달려있고 그 위로 먹구름만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죽이 아저씨의 소리가락이 어찌나 슬픈지 아줌니들은 연신 치마폭을 눈으로 가져갔다. 남정네들은 먼 하늘만 바라보며 눈을 꿈쩍였다. 돌이는 가슴 속이 뭉클한 것이 울컥 무엇이 올라오는 듯하였다. 노래라는 것이 이토록 사람 마음을 울리는 지를 처음 알았다.

“리로 리런나 로리라 리로런나 로라리 리로리런나 오리런나 나리런나 로런나 로라리로 리런나”<구천>

죽이 아저씨는 신명이 지피는 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죽이 아저씨가 마당으로 내려섰다. 돌이도 따라 마당으로 내려섰다. 창백한 죽이 아저씨와 돌이의 얼굴에 가을 빗줄기는 어룽어룽 흘렀다.

꽃님이는 정녕 실성한 사람마냥 동이의 없는 꼬리를 만지며 깔깔깔 웃어댄다. 꽃님이의 웃는 소리에 사람들은 몸에 오싹하니 소름이 끼쳤다.

곰이가 저만치서 눈물을 찍어내고 달님이도 연신 치마폭을 눈으로 곱게 가져갔다. 좁은 마당에 들어 선 동네사람 중, 바른 말 잘하는 수새 아버지가 한마디하였다.

“빌어먹을 시상. 회회아비놈은 천벌을 받을 것이여. 암, 이제 관가에서 끌어갔으니 주리를 틀 것이여.”

사람들은 묵묵하였다. 되도 않는 소리라는 것을 수새 아버지도 잘 알고 있었다. 수새 아버지는 멋쩍어 다시 한번

“암 ! 그렇고말고, 암! 그래야지!”

라고 하며 빗속으로 사립문을 밀쳤다.

죽이 아저씨의 노랫소리가 높아질수록 가을비는 이제는 아예 달구비로 변하여 점점 세차게 퍼부어댔다.

하관할 때 꽃님이가 잠시 정신이 들어

“엄니! 엄니! 나랑 같이 가! 나랑 같이 가!”

하며 무덤구덩이로 뛰어들었다.

가을 빗줄기는 꽃님이 등판에 넉살좋게 퍼부었다.

그렇게 돌이 엄니는 이제 두견이 울던 집 울대, 봄이면 화전 부쳐 먹던 진달래 곱게 핀 붉은 산 빛이 농울 졌던 그 자리에 묻혔다.

그날 밤, 안 가려는 달님이를 엄마가 걱정한다면서 곰이가 데리고 나간지도 한 참이 지났다. 곰이와 달님이가 제 집으로 가기도 전에 꽃님이는 아랫목에서 곤하게 잠들었다. 돌이는 벽에 깊숙이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이제 의지가지없는 세상이었다. 돌이는 저 꽃님이 언니를 어떻게 챙겨야하는지 앞으로 가도 넘어지고, 뒤로 가도 자빠지는 서툰 삶이기에 참 막막하다.

“뚝. 뚝. 뚝.…”

한낮에 그토록 퍼붓던 빗줄기도 꽤 힘이 들었나보나. 그 제서야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낙숫물소리가 돌이의 귀에 들렸다.

돌이는 엄니의 주검을 안았을 때도, 하관할 때도, 한 방울 나오지 않던 눈물이 비로소 흘렀다.

“엄니!”

돌이는 조용히 엄니가 부르던 <사모곡> 가락을 불렀다.

호미도 날이지마는

낫같이 잘 들 리도 없습니다.

아버님도 어버이시지마는

위 덩더둥셩

어머님같이 아껴 주실 리 없어라. <사모곡>

 

돌이가 태어나 옹알이를 하고 부라부라를 하면서부터 들은 노랫소리다. “호미도 날이지마는 낫같이 잘 들리도…”

돌이는 제가 부르면서도 엄니가 부르는가? 아니면 꽃님이 언니가 부르는가? 아니면 할머니가 부르는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 …엄니!, 엄니!”

꽃님이가 잠꼬대를 해댔다.

돌이는 꽃님이 언니가 차 놓은 이불을 다시 올려 주며 중얼댔다.

“엄니! 아부지 만나셨시유. 엄니! 부디 저승에서나마 잘 기시우. 엄니가 그렇게 미워하던 외할머니와 잘 사시우. 아부지하구두…”

“뚝. 뚝. 뚝.…”

언젠가 엄니가 불러주던 노래가 낙숫물 소리를 따라 돌이의 귀를 타고 가슴으로 온몸으로 들어왔다.

나무 끝에 작고 예쁜 닭을 조각하여

젓가락으로 집어다가 벽 위에 놓았네

이 새가 꼬끼오 울어서 때를 알리거든

엄니 얼굴 비로소 지는 해처럼 늙으리 <오관산곡>

돌이는 가만히 <오관산곡>을 불렀다. 이 노래는 저 서울 송도에 있는 오관산(五冠山) 밑에 살았다는 문충(文忠)이란 이가 불렀다는 노래이다. 문충은 벼슬살이하는 곳에서 제 어머니가 계시는 곳까지 삼십 리를 매일 왕복했다. 그러고 어머니가 날로 늙는 것을 보다 못해 슬퍼하여 지었다는 것이 이 노래이다.

문충은 나무로 만든 닭이 ‘꼬끼오!’ 울어야만 엄니보고 늙으라고 한다. 어찌 그럴 까닭이 있겠는가마는, 불가능한 상황을 바탕에 깔아 결코 헤어질 수 없음을 간곡히 기리는 마음으로 만든 노래임에 틀림없었다. 돌이는 ‘통솥안에 삶은 닭이 알낳거덩’이나 ‘삼년묵은 쇠뼉다구 살붙거든’, ‘붓두막에 쌀문콩이 싹나거든’ 같은 경우가 그렇다고 생각했다.

돌이는 돌덩이에 짓눌린 듯 가슴이 맥맥하였다. 이제 엄니가 없어 다시는 부르지 못할 노래라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리었다.

귀에 이젠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돌이의 생각은 오히려 더 소란하다. 돌이는 언젠가 엄니가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문득 떠온다.

“돌이야! 내가 왜 노래를 자주 부르는 줄 아나. 노래에는 이 숭악한 세상을 살아내는 힘이 들었다카대. 내 어매의 어매로부터, 또 그 어매로부터 지어졌고 불려졌다 안카나. 그러니 여러 사람들의 맴이 담겼다 이 말 아이가.”

돌이는 그런데 그 노래의 힘도 그악스러운 저 회회아비에게는 대거리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나저나 그 회회아비 놈이 관가에 붙잡혀 갔다지만 곧 나올 것은 하늘이 파랗고 땅이 누른 거와 같이 빤하다. 돌이는 어릴 때부터 그런 일이야 이골이 나도록 보았다. 저놈들에게 바른 말이니 옳은 말은 파리나 각다귀와 같이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가끔씩 떡전거리에 싸움이 날 때면 관가 놈들은 나타나 부자 놈이나 이렇게 저렇게 권력자에게 청탁을 댄 놈 편만 들어줬다.

작년에 수지 아버지도 회회아비 놈과 시비가 붙어 두들겨 맞았지만, 관가에 끌려가 혼찌검을 당한 것은 오히려 이쪽이었다. 돌이는 왜 우리는 늘 이렇게 살아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잘못은 가진 놈, 권력 있는 놈들이 저질러 놓고 밭 설거지를 하듯 저희들 죄는 돌이 아부지처럼 농사나 짓고 행상이나 하는 백정들이 뒤집어썼다.

왕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저희들은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백성들은 나 몰라라 손사래 치는 왕이 무슨 이 나라의 왕이냔 말이다.

돌이는 늘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빌어먹을 시상! 이 땅에 태어 나,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왜 이리 힘드냐. 엠병할! 보리밭에 더부살이하는 냉이도 아니구!”

하시던 말이 떠오른다.

돌이는 생각이 점점 복잡하게 얽혔다. 걱정인 것은 꽃님이 언니라고 생각하다가는 우선, 회회아비 놈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뒤엎었다. 돌이는 ‘손 한번 옴짝 못해보고 당할 순 없어!’라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언젠가 모가비 죽이 아저씨가 하던 말도 생각난다.

“돌아! 영웅과 겁쟁이 차이를 아니? 그것은 잘못을 알았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면 안다.”

그러고 보니 모가비 죽이 아저씨에게 ‘고맙시우’라는 말 한마디도 못했다. 죽이 아저씨는 엄니가 별로 다정히 대하지도 않았는데 무당에게 양해를 구하여 굿거리까지 대신 불러주었다.

달님이 엄니가 웬일인지 옴니암니 드는 비용을 마다않고 후한 인심을 베풀어 무당을 불러 왔지만 실상 굿은 모가비 죽이 아저씨가 이끈 거나 마찬 가지다.… 여러 생각이 옹송망송하더니 기어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오한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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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이 영창문으로 들어와 눈이 부시다. 돌이는 벽에 기대고 앉아 그대로 잠이 들었다. 돌이가 눈을 떴을 때 꽃님이는 아직도 긴 잠에 취해 있었다.

돌이가 아침을 차려 꽃님이를 막 먹이려는데 달님이가 바가지에 보리밥과 아욱국, 미나리 김치, 어디서 뜯어왔는지 상추쌈까지 가져 와서는 근심스레 쳐다본다.

“돌이! 알아. 오다가 봤는데 그 회회아비놈이 풀려나서는 가게 문을 열던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동이야! 너도 이리 와. 배고프지?”

달님이가 동이 먹이까지 챙기는 것을 보며 돌이가,

“그래, 내 그럴 줄 알았지. 이미 생각한 것이 있으니 달님이는 집에 가서 곰이 헝 좀 보자고 해줄래.”

라며 일어섰다.

“응. 알았어. 그런데 곰이 언니는…아니여. 지금 아침 먹고 있으니 가서 말할게. 꽃님이 언니! 돌이하고도 같이 먹어야지. 돌아! 어서 한 숟가락 떠.”

언제나 한결같지만 돌이는 오늘따라 달님이가 참 고맙다. 늘 꽃님이 언니를 친언니처럼 돌봐주고 또 돌이에게도 곰이 헝 만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돌이는 저도 모르게

“달님아! 고마워.…”

라며 말끝을 흐리고는 멋쩍게 고개를 숙였다.

“무신 소리여. 그런 말 들으러 온 것 아니잖어. 어서 돌이는 밥이나 먹어. 내가 가서 곰이 언니에게 보자고 한다고 전할게.”

달님이가 돌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채 사립짝도 못 나섰는데 곰이가 성큼 들어왔다.

곰이는 돌이의 기운이라도 차리게 하려는지 수선을 떨었다.

“어, 돌이야! 이제 아침 먹는구나. 꽃님이도 잘 잤고. 달님아! 너는 엄니가 찾으니 가보렴. 나 여기 있단 말은 말고.”

달님이가 가고 대충 상을 물린 뒤 곰이와 돌이는 돌이 엄니 무덤가에 가 앉았다.

“곰이 헝! 아무래도 내가 회회아비 저 눔을 죽여야겠어. 그러고 일이 잘 끝나면 나는 서경으루 갈거여. 미안하지만 헝하구 달님이가 우리 아부지 올 때까지만 꽃님이 언니를 좀 봐줘. 응.”

“뭐, 돌이야! 느린 소도 성낼 적이 있다더니 꼭 니짝이네. 니가 무신 심으루 회회아비 눔을 죽여. 덮어놓고 대들 눔이 아니여. 이번엔 오히려 니가 죽을지도 몰라. 그 눔이 어디 사람 눔이냐. 너하고 나하고 심을 합쳐도 안 되는 눔인걸.”

“헝, 내가 다 생각한 것이 있어. 소심도 심이요, 새심도 심이라고 했잖어. 내일이 9월 9일 중양절이잖어. 그눔이 술을 좋아하니 틀림없이 국화주를 많이 먹을 거란 말야. 평소에도 장사 끝나면 늘 몽고눔들과 어울려 술을 먹잖어. 술 취하면 시상 모르게 잠들고. 그때 해치우면 돼. 살다 보면 ‘싸울 때가 있고 참을 때가 있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어. 오죽 못났으면 사내가 이런 꼴을 당해. 엄니한테도, 꽃님이 언니한테도… 내 죽는 한이 있어두….”

곰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결심이나 한 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돌이야! 너하고 나하고는 부모는 달라도 참 헝제처럼 지금까지 지내왔지. 그렇지 않니 잉. 더구나 꽃님이가 그렇게 된 것도 내가 읍성에 들어가 동무들과 어울리는 바람에…에이! 그 얘긴 그만하고. 어찌됐건 돌아! 나하구 함께하자. 따지고 보면 우리 아부지가 그때 돌아가신 것도 그 회회아비 놈의 죄가 읍다고는 할 수 읍서.”

“헝! 말은 고맙지만, 이것은 고향을 떠나야만 한다는 뜻이야. 또 만약 그 회회아비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을 수두 있구. 헝 마저 그러면 내가 꽃님이 언니를 두고 어떻게 떠나. 너무 미안하잖어. 그러니 헝은 모르는 척 해줘.”

“돌이야! 내가 중뿔나게 나서는 것이 아니여. 딱히 그 일 때문만도 아니구, 잉. 세 해 전에 우리 아부지가 돌아가신 것 너도 알잖여. 그때 우리 아버지가 술에 취해 저 둑에서 돌아가신 것 말이어. 저 회회아비와 몽고 놈들에게 니네는 집을 빼앗겼다만 우리 아버지는 그만큼 빚 독촉에 시달렸잖어. 아, 그 눔이 고리대를 놓아, 두꺼비 파리 채듯 늘름늘름 모조리 먹어치웠잖어. 너도 알다시피 그때 좀 우리 집을 괴롭혔냐. 하기야 나라 놈들부터 토지를 겸병하여 토지 한 곳에 대해 여러 놈들이 이 세금, 저 세금으로 모조리 쓸어가 주둥아리며 창자며 밑구멍까지 두루두루 호사하지만서두. 여하튼 집에 와 행패도 부리고. 결국 우리가 부쳐 먹던 논 닷 마지기는 그때 저 눔들 손에 넘어간 거란 말이여. 그래, 우리 아부지가 그 추운 겨울날 홧김에 술을 자시고는 그만 그렇게 되신 것 아니냐. 그러니 나를 말릴 생각일랑 말어. 나도 한다면 하는 눔이어.”

해가 중천이 되도록 돌이와 곰이는 회회아비를 응징할 방법을 짬짜미했다. 만약 일이 새알꼽재기만큼이라도 틀어지는 날에는-, 어림셈 쳐도 돌이와 곰이 두 목숨은 물론 그 동티가 꽃님이와 달님이까지 엮인다. 돌이는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도 소마소마하고 뒤숭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