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피적 사고>

2015. 11. 7. 16:27삶(각종 수업 자료)/나의 이야기

<히피적 사고>

 

교수님! 무엇을 써오라는지 못 알아듣겠어요. 너무 막연해요.”

당연히 막연한 것이지. 내가 대학생인 여러분들에게 주제를 꼭 찍어, 이것에 대해 써와라 해야겠어. 네가 무엇을 쓸 지 찾아봐.”

 

글쓰기 수업 중 나온 학생의 질문과 선생의 대답이다.

 

매일 밤,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마법의 장미꽃이 피었단다. 하지만 아무도 장미 가까이 갈 수 없었어. 그 장미 가시에는 독이 많았거든. 사람들은 공포와 죽음, 고통만을 말할 뿐 영원한 삶의 약속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 그래서 장미는 누구에게도 영생을 전하지 못하고 시들었고 결국은 산꼭대기에서 모두에게 잊힌 채 사라졌어. 영원히홀로.”

 

<판의 미로>라는 영화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명색이 선생이라 그런지 요즘 학생들을 보면 안타까운 점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책을 읽고 쓰는 태도입니다. 대학생인데도 선생이 정답을 콕 찍어 불러주기를 원하고 책도 외우려만 듭니다. 독서를 통해 성공이나 지식만을 말할 뿐, 생각하며 글을 읽어 비판적 안목을 기르려는 의도는 애초부터 없습니다. 그저 취업과 근사한 문장에 밑줄을 긋고 방점을 찍어댈 뿐입니다. 지식의 정의는 응당 독서와 경험을 통해 얻은 일체의 경험체를 사고라는 체(글쓰기는 여기에 해당될 듯)로 걸러 마음에 앉힌 지식이라야 합니다.

우리 시대가 저들 사고의 태반(胎盤)임을 생각한다면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태반이라 함은 저들의 사고가 우리 시대의 산물이란 뜻입니다. 공부를 저러하게하니 맹렬한 젊음의 정열은 말처럼 내달릴지 몰라도, 자기를 세워주는 주견도 공부한 사람으로서의 소처럼 우직함도 없습니다. 그래 이도저도 아닌, 마치 변비약을 지사제와 함께 복용한 엉거주춤한 꼴입니다.

글머리에 써 놓은 저 마법의 장미꽃을 학문의 목적으로 비정한다면 글을 보고 또 보아야 하고 쓰고 또 써야합니다. 옆 나라 근대문학의 아버지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는 젊은이들에게 글의 행간에서 소처럼 쉬어가며 되새김질하는 공부를 하라고 이렇게 당부하였다지요.

소가 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일세. 우리는 어떡하든 말이 되고 싶어하네만. 소는 웬만해선 될 수 없지

허나 저 이의 말처럼 행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내 모르는 것은 아니기에 그저 내 말은 귀양 간 셈 칩니다.

 

책을 읽다 알았습니다.

토인비가 저 물 건너 미국의 3류 문화를 대표하는 히피를 근대의 푯말인 기술과 과학의 산물로 정의한 것을.

히피라는 말을 찾아봅니다.

 

히피(hippie): 기성의 사회통념·제도·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성 회복, 자연에 귀의를 주장하며 완전한 자유를 추구한 젊은이들. 1960년대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20세기의 대표 청년문화의 하나를 형성했다.

 

작금의 학생들을 보며 문득 저 히피가 생각납니다. 나쓰메 소세키 운운의 저러한 공부가 아닐진대, 차라리 히피적 사고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독서와 글쓰기가 주는 마법의 장미꽃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