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힐링>

2013. 10. 30. 13:32글쓰기/이 세상은 사각의 정글이 아니다!

 

아래는 <힐링포엠>이라는 계간지 창간에 보낸 원고입니다.

 출판계의 열악한 사정으로 <힐링포엠> 창간이 연기되었다고 합니다.

 

 

<역사 속의 힐링>

고전 속에서 거니는 단상(斷想) , -, , 지둔의 공

1.

이른 6월의 뙤약볕이 내리 쬡니다.

아스팔트의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릅니다. 대한민국 철도의 심장 서울역, 뙤약볕은 공평하게 열사의 사막을 만듭니다. 아스팔트 지열로 아지랑이를 빚는 여기저기에 노숙자들이 보입니다. 괭한 눈으로 허공에 무언가 욕설을 퍼붓던 사람은 급기야 소주병을 아스팔트에 패대기칩니다.

개새끼!”

!”
8옥타브는 됨직한 된소리가 지나간 자리에 거센 파열음이 짓쳐들어옵니다. 순간, 익숙한 소주 향이 내 몸으로 스밉니다. 저 이가 먹는 소주나 내가 먹는 소주나 다를 바 없나봅니다. 몇몇의 노숙인은 그런 사람을 보고 히죽이고 길가는 사람들은 눈길 한 번 곁을 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서부역으로 넘어가는 고가도로, 너 댓 명이 그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도 구부리고 누워 미동도 않습니다. 혹시나 하여 다가가니 몸을 꿈쩍입니다. 익숙한 소주 향이 그에게서도 짙게 풍깁니다. 그의 몸뚱이로 내 몸뚱이로 태양과, 지열과, 아지랑이가 육화됩니다.

 

애고답답 설운지고. 어떤 사람 팔자 좋아 대광보국숭록대부삼태육경(大匡輔國崇祿大夫三台六卿) 되어 나서 고대광실 좋은 집에 부귀공명 누리면서 호의호식 지내는고. 내 팔자무슨 일로 말만한 오막집에 성소광어공정(星疎光於空庭)하니 지붕 아래 별이 뵈고, 청천한운세우시(靑天寒雲細雨時)에 우대랑이 방중이라. 문 밖에 가랑비 오면 방 안에 큰 비 오고 폐석초갈 찬방 안에 헌 자리 벼룩 빈대 등이 피를 빨아먹고, 앞문에는 살만 남고 뒷벽에는 외(외 흙벽을 만들 때 댓가지나 싸리로 얽어 세워 흙을 받는 벽체)만 남아 동지섣달 한풍이 살 쏘듯 들어오고 어린 자식 젖 달라하고 자란 자식 밥 달라니 차마 설워 못살겠네.”

 

<흥부전>(경판 25장본) 구절을 떠 올립니다. 저 시절이라고 이 시절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말만한 오막, 벼룩, 빈대, 어린 자식, 문득 태양 때문에 눈이 부셔서 그 아랍인을 죽였다.”라는 말을 생각해내곤, 온몸을 후드득 떱니다. 해변을 걷다 살인을 한 뫼르소,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에다 그가 살인한 이유를 태양때문이라고 방점을 쿠-욱 찔러 놓았습니다.

서부역 근처의 음식점을 들어섭니다. 식당 정 가운데를 차지한 대한인의 빅브라더 TV는 오늘도 거만하게, 그 지긋지긋한 부조리한 뉴스들을 조자룡 헌 칼 쓰듯 이리저리 내지릅니다. 저승법이 맑다지만 빌려올 수 없고 에덴동산에도 사악한 뱀이 있으니, 시지프스의 신화와 도돌이표가 무한대로 그려진 악장입니다. 어제 그렇듯 오늘도, 내일도 아니 모레도, 그러하고 또 그러할 것입니다.

극한의 사막, 열사의 끝입니다. 대한민국 서울시 중구 동자동 43-205번지, 1900년 영업을 개시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관문으로서 경부선과 경부고속철도, 경의선의 시종착역이며, 수도권 지하철 1호선과 4호선의 환승역에 6월의 태양이 그렇게 내리 쬡니다.

2.

세상이 이런 이유를 <숙영낭자전>에서 진실을 말해 준 파랑새를 불러다 묻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흉악한 세 날불한당 때문이라고 답할 확률이 거의입니다. 이름 하여 명예’, ‘권력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호시탐탐 천하통일의 대업을 꿈꾸던 님이 삼두체제를 과감히 접수하고 황제로 등극하더니 내친김에 신격화까지 넘봅니다. 물론 전 세계인들은 내남없이 뜻을 모아 일체향전간!(一切向錢看), 모두 돈만 보세!”하고 자발적 복종의 맹서를 하거나 경제라는 필살기로 저 이를 모실 방법들 단련에 날이 가고 달이 가는지 모릅니다.

루시앵 골드만 식으로 말하면 상동성(相同性, Homology)입니다. 작품의 발생이 사회의 집단의식이나 개인의식, 사회경제적 관계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뜻인 이 상동성은 바로 에 대한 쏠림현상 때문입니다. 이 비열한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온, 김치녀된장녀’, ‘보슬아치라는 요괴 같은 말들이 젊은이들의 순수한 정신조차 갉아먹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어 자락을 접고 본다 쳐도, 이 물신숭배(fetishism)를 정녕코 우리가 갈 길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않을 것이니, 저 바다 건너 프로이트(Sigmund Freud)라는 철학자는 물질을 배설물이라고까지 극단적으로 폄하하였습니다. 그래, 그는 부자는 정서발달 부진과 배변 훈련 부족에 기인하여 현금과 재화의 축적에만 몰두하는 항문(肛門)유형의 인간들이라고 서슴지 않고 독설을 퍼부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저 이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외려 오이 붇듯 달 붇듯, 학문의 전당이어야 할 대학에도 사이비 교수들이 넘쳐나고 종교마저도 이판중과 사판중이 물질이란 상투를 잡고 싸우고 목사들조차 세습을 하는 이해 못할 세상입니다.

이해 못할 일은 나에게도 벌어집니다. ‘이해 못할 일이란 자기 합리화적 용어이니, 제대로 말하자면 잘못입니다. 적잖은 나이에 볼썽사나운 주먹다툼을 했습니다. 그래도 책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선생일진대 말입니다. 명예’, ‘권력과 전연 상관없이 남 눈비음에 여념이 없는 책상물림이건만 한 잔 술에 그만 알량한 속내를 드러냈나 봅니다. 그 후유증이 얼마나 긴지 여인네들 훗배앓이도 아니련만 끙끙 마음을 싸매고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하여, 장자(莊子)달생편(達生篇)’에 나오는 이야기 한 자락 꺼내봅니다.

()나라의 선왕(宣王)이란 이는 닭싸움을 좋아하였습니다.

 

기성자(紀誠子)가 선왕(宣王)을 위하여 싸움닭을 키웠습니다.

열흘이 지나서 왕은 기성자에게 물었습니다.

닭싸움을 시킬만한가?”

안됩니다. 아직 쓸데없이 거만하여 기운만 믿고 있습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자 물으니 대답하였습니다.

 “안됩니다. 아직도 상대방의 태도에 응하고 영향을 받습니다.”

 열흘을 더 지나 다시 물었습니다.

안됩니다. 아직도 상대방을 노려보며 기운이 성합니다.”

열흘이 더 지나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거의 다되었습니다. 비록 상대방 닭이 운다 해도 이미 아무런 태도의 변화가 없게 되었습니다. 마치 목계(木鷄:나무로 깎아놓은 닭)와 같아 덕이 완전해졌습니다. 다른 닭들은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보기만 해도 되돌아 달아날 것입니다.”

 

나무로 만든 닭, ‘목계(木鷄)’이기에 평상심을 유지합니다. 목계이기에 호()불호(不好), ()() 등 외부에 영향을 받지 않는 항상심(恒常心)이 있습니다. 깨달음의 세계를 얻어 싸움을 하지 않고도 다른 닭에게 두려움을 갖게 만듭니다. 이것이 싸움닭의 경지라고 기성자는 말합니다. 세상과 담담히 맞설 줄 아는 목계(木鷄)입니다.

허나, 세상과 마주선 나는 닭이 아닌 사람일 뿐입니다. 그것도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그대로를 맨살에 드러내고 사는, 싸움닭이 아닌 보통 사람일 뿐입니다.

3.

그래, 글을 읽어 봅니다. 독서(讀書)와 벽() 두 단어가 보입니다. 정조 임금은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이렇게 세상을 살아내는 우리들에게 충고합니다.

 

옛사람은 일을 만나서 사리를 파악할 때에 반드시 두 겹, 세 겹 빈틈없이 꿰뚫어 보았다. 그런데 지금 사람은 반 겹도 꿰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이 눈앞에 닥치면 망연자실하여 어떻게 조처해야 할지 모른다. 이것은 바로 글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古人遇事見理, 必透得二三重. 今人不惟不透得半重, 事到眉頭, 茫不知如何措置. 此政坐不讀書耳.”

 

정조 임금은 내 책읽기의 잘못을 들어 꾸짖습니다. 책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거늘, 책을 잘못 읽었다는 꾸중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비록 과부하가 걸려 밉살맞은 일류병에, 물질은 주절주절 굿판을 벌리고, 도덕과 정의는 인간성 방어기제로서의 역할을 강탈당한 초라한 몰골이요, 진작에 박제된 유물일지라도 책을 제대로 못 읽어서라 합니다.

일껏 책을 읽은들 책 속의 글들은 이 세상과 겉도는 소리일 뿐인데도, 아니 오히려 책대로 하다가는 손가락질 받기가 일쑤인데도 말입니다. 내 책을 읽는 것이 눈은 있으나 망울이 없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 이런 세상 살아내자면 벽()이 있어야 하나봅니다. 조선의 서얼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선생은 백화보서(百花譜序)에서 벽을 이렇게 적바림합니다.

 

사람이 벽()이 없다면, 버림받은 자일뿐이다. 무릇 벽이란 글자는 질병이 따르고 치우침이 따르니 병이 편벽된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홀로 나아가는 정신세계를 갖추고 전문적 기예를 익히는 자는 왕왕 오직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人無癖焉, 棄人也已. 夫癖之爲字, 從疾從癖, 病之偏也. 雖然, 具獨往之神, 習專門之藝者, 往往惟癖者能之).”

 

박제가 선생은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고집이 있어야한다고 말합니다. 저 시절, 조선의 서얼로 살아가는 이의 마음을 어림잡아 봅니다. 고집으로 세상을 버텨내는 저 이이기에 마음이 아픕니다. 이것은 세상과 단호히 맞서는 마음의 결기요, 단연코 제 삶을 얼레빗질 않겠다는 불끈 쥔 두 손등으로 솟는 새파란 힘줄입니다. 그래야 저 잘난 양반들 한구석에서나마 이 세상을 살아내지 않았겠습니까.

4.

다시, 연암 박지원의 낭환집서(蜋丸集序)라는 글도 봅니다. 지둔의 공이 보입니다.

 

쇠똥구리는 스스로 쇠똥을 사랑하여 여룡(驪龍,몸빛이 검은 용)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룡 역시 그 구슬을 가지고 저 쇠똥구리의 쇠똥을 비웃지 않는다(蜣蜋自愛滾丸 不羡驪龍之珠 驪龍亦不以其珠 笑彼蜋丸).”

 

낭환이란 쇠똥구리입니다. 쇠똥구리가 여룡의 구슬을 얻은들 어디에 쓰며 여룡 역시 쇠똥을 나무라서 얻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재주 없음을 탓할 것도 없지마는, 저 이의 재주를 부러워하지도 말아야 하고 재주가 있다고 재주 없음을 비웃지도 말아야 한다는 연암 선생의 말입니다.

() 똑똑이들이 많은 세상이지만, 지둔(遲鈍)의 공()을 추켜세우는 말씀입니다, 즉 둔하지만 끈기 있고 느리지만 성실히 노력한 자라면, 비록 쇠똥구리일지라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가끔씩 세상에 이름 석 자를 우뚝 남긴 분들 중에도 저런 이들이 꽤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런 이들이 우리에게 뚱겨주는 인생 훈수는 둔재라고 여기는 이들도 공(노력)을 쌓으면 된다.’입니다.

저 중국의 내로라하는 문장가 유협의 문심조룡』 「지음편에 보이는 무릇 천 곡의 악보를 연주해 본 뒤라야 소리를 깨달을 수 있고 천 개의 검을 본 뒤라야 보검을 알 수 있다.”라는 말도 저 지둔의 공에 잇댑니다. 하여, 나는 내 수첩에 소중히 넣어가지고 다니는 글귀가 있습니다.

 

힘이 부족하다는 것은 가던 길을 그만 두겠다는 게 아니냐. 이놈! 지금 네가 그러하구나(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畫).”

 

바로 논어 옹야편에 보이는 공자와 제자 염구의 대화입니다. 염구가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부족합니다.”라고 하자, 공자는 위의 저 말로 호되게 야단을 쳤습니다. 안타깝게도 염구는 후일 권력과 출세에 눈이 멀어 가르침을 저버렸기에 공자의 문하에서 파문을 당하였지만 저 말이야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재주 없는 내가 고전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혹 난장이 교자꾼 참여하 듯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나, 또 종종 재주 있는 이들이 내 책과 논문을 콩팔칠팔 허투로 내두른 소리라는 의심어린 눈초리를 보낼 때면 저 글을 꺼내봅니다. 물론 공자의 말씀이 나에게 한 말은 아니지만, 학문에 비등점이 없음은 명백한 이치요, 재주 있는 이들만이 공부해야한다는 진리 또한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저 말과 연암 선생의 글을 손 가까이 두고 공부를 하다 절벽 같은 심정일 때면 떠들추곤 합니다. 그럴 때면 야박한 공부머리로 학문 언저리나마 맴도는 나지만 적이 위안을 받음은 물론입니다. 또 운명이란 노력하는 사람에게 우연이란 다리를 놓아준다하였으니 지긋이 의자에 엉덩이를 오래도록 붙이렵니다. 그래 오늘도 고전을 포착하는 내 눈이 성글기 짝이 없지만, 몽당붓솔 하나들고 내 책상에 붓질하는 이유를 저 지둔의 공에서 찾습니다.

5.

이제 글을 마쳐야겠습니다.

오늘도 내 몸에서는 익숙한 소주향이 납니다만, 정녕, “이 문에 들러서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단테의 신곡』「지옥편서두에 보이는 말로 체념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태어나는 순간부터 희망이란 두 글자를 인생사전에서 비우고 시작하는 사람들일지라도, 모든 것을 잃은 이라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정녕 단테의 저 지옥도 아니고 뫼르소의 저 독백도 통하는 곳도 아니어야합니다.

그래, 여기는 사람 사는 세상이니,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적배지(赤牌旨:저승으로 가야 할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다는 붉은 천)를 들고 저승문을 들어설 때까진 이 세상에서 살아내야겠기에, 전공이 고전인 저는 고전하는 인생인 제 삶을 선인들께 물어보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 , 지둔의 공아니냐!”

그러고 보니 어제 한 말과 행동이 참 부끄럽습니다. 참 줏대도 없고 싱겁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산 것 또한 저이기에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 오늘만이라도 붕어눈을 부릅뜨고 배에 힘을 떡하니 실어서는 책을 읽고, 벽이 있고 지둔의 공을 믿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러자니 한 마디 더 얹어야겠습니다.

 

말은 행동과 다르지 말고, 행동은 말과 다르지 말라(, 勿異於行, , 勿異於言).”

 

지봉집에 보이는 말로 나에게 다짐장을 놓습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당나라의 선승이신 임제선사의 말씀을 덧놓습니다.

 

불수위위지(不隨萎萎地)!”

시들시들하니 질질 끌려 다니지 마라!

수처작주(隨處作主)!’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산송장처럼 시들시들하니 남에게 질질 끌려 다니지 말라는 뜻입니다. 제 깜냥이 크든 적든 간에 어느 곳이든 그곳에서 주인이 되어 당당히 살라는 말씀입니다. 중무장을 해야겠습니다. 옷차림을 매만집니다. ‘책을 읽고, 벽이 있고, 지둔의 공을 믿자고 마음에 새기고는 다시 두 어 말씀을 더 욉니다. 성총(性聰) 스님의 말씀입니다. 모쪼록 우꾼우꾼 힘이 솟는 하루였으면 합니다.

 

심불참(心不懺) 면불괴(面不愧) 요불굴(腰不屈)!”

마음은 뉘우치지 말고, 얼굴은 부끄럼 없고, 허리는 굽히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