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글을 쓰는 마법의 키

2008. 9. 3. 17:11인하대/글쓰기와 토론

2강 글을 쓰는 마법의 키


 

글을 쓰는 마법의 키는 이미 여러분의 가슴에 있습니다. 한땀한땀으로 이루어진 피그말리온의 석상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부닥뜨리면서 우리의 작문 수업을 다듬어갔으면 합니다. 


창백한 종이조각에 따뜻한 피가 돌게 하는 것은 글을 쓰는 이의 뜨거운 마음일 겁니다.




1) 생각해 봅시다.





아무려면 발이 탁만큼 정확하겠습니까?

차치리(且置履)라는 사람이 어느 날 장에 신발을 사러 가기 위하여 발의 크기를 본으로 떴습니다.

이를테면 종이 위에 발 을 올려놓고 발의 윤곽을 그렸습니다. 한자(漢字)로 그것을 탁 (度)이라 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가 장에 갈 때는 깜빡 잊고 탁 을 집에 두고 갔습니다. 신발 가게 앞에 와서야 탁을 집에다 두고 온 것을 깨닫고는 탁을 가지러 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제법 먼 길을 되돌아가서 탁을 가지고 다시 장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장이 파하고 난 뒤였습니다. 그 사연을 듣고는 사람 들이 말했습니다. "탁을 가지러 집에까지 갈 필요가 어디 있소. 당신의 발로 신어보면 될 일이 아니오." 차치리가 대답했습니다.

 "아무려면 발이 탁만큼 정확하겠습니까?"

 

『한비자』에서-





 2) 집을 그려 봅시다.









3) 다음을 읽고 생각해 봅시다.


< 수제품 글쓰기 > 


글쓰기는 마땅히 수제품이어야 합니다.


수제품 구두는 단 한 켤레도 똑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 글은 사물의 모사(模寫)나 재현(再現)이 아닌 번역(飜譯)에 해당됩니다. 번역은 테크닉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내 글을 수제품으로 만들까요?

그것은 사물에 대한 관찰로부터 시작합니다. 관찰이란 보고 듣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감을 동원하여 사물을 관찰해야합니다. 오감을 동원한 사물 관찰이란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껴야 새로운 사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물의 내밀한 진실은  눈에 보이거나 듣는 것으로부터 멀어진 그 은밀한 곳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책 읽기 또한 사물관찰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감을 동원하여 사물을 관찰하듯 책을 읽어야합니다. 책읽기가 없으면 쓰기도 없습니다. 책읽기는 글 쓰는 이의 협소한 경험적 공간을 무한 공간으로 안내합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비평가 이지(李贄, 1527-1602)의 동심설(童心說)은 우리의 사물관찰이나 책읽기에 많은 도움을 주는 글입니다. ‘동심설(童心說)’이란 ‘동심’ 즉 어린 아이의 마음이란 뜻입니다. 아이들의 사물에 대한 감각표현은 성인들보다 확장된 세계를 갖고 있습니다. 각종 문화와 제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백색의 마음바탕을 그대로 갖고 있어서입니다.  

아래는 <동심설>이란 글의 일부입니다.


 童心說


용동산농龍洞山農이 《서상西廂》을 쓰며 끝에다 말하기를, "아는 이가 내가 여태도 동심童心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대저 동심이라는 것은 진심眞心이다. 만약 동심을 안 된다고 한다면 이는 진심을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대저 동심이라는 것은 거짓을 끊고 순수하게 참된 최초에 지녔던 한 생각의 본마음이다. 만약 동심을 잃게 된다면 진심을 잃는 것이고, 진심을 잃는다면 참된 사람을 잃는 것이다. 사람이 참되지 않으면 온전히 처음 상태를 회복하지 못한다.



동자童子라는 것은 사람의 처음이요, 동심童心이라는 것은 마음의 시작이니, 대저 마음의 처음을 어찌 잃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어찌하여 동심을 갑작스레 잃게 되는 것일까? 대개 그 처음에는 듣고 보는 것이 귀와 눈을 통해 들어와 그 마음에 주인이 됨으로써 동심을 잃고 만다. 자라서는 도리道理가 듣고 보는 것을 좇아 들어와 그 마음에 주인이 됨으로써 동심을 잃게 된다. 나중에 도리와 듣고 보는 것이 날마다 더욱 많아지게 되면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이 날마다 더 폭넓어져서, 이에 아름다운 이름이 좋아할만한 것임을 알게 되어 힘써 이름을 드날리고자하여 동심을 잃게 되고, 아름답지 않은 이름이 추함을 알아 힘써 이를 덮어 가리려 하는데서 동심을 잃게 된다.


대저 도리道理와 문견聞見이란 모두 독서를 많이 하여 의리義理를 아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옛날의 성인이 어찌 일찍이 독서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설령 독서하지 않았더라도 동심은 진실로 절로 남아 있었을 것이요, 독서를 많이 했다손 치더라도 또한 이 동심을 지켜 잃지 않도록 했을 따름이니, 배우는 자가 도리어 독서를 많이 하고 의리를 아는 것이 동심에 장애가 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저 배우는 자가 독서를 많이 하여 의리를 알게 되면 동심에는 걸림돌이 되나니, 성인이 또 어찌 저서著書와 입언立言을 많이 하여 배우는 사람에게 장애가 됨을 하겠는가? 동심이 막히고 보면 이에 있어 펼쳐 말을 해도, 언어가 마음 속으로부터 말미암지 않게 되고, 드러나 정사政事가 되더라도 근저가 없게 되며, 저술하여 문사文辭가 되어도 능히 통달하지 못하게 된다. 안으로 머금어 아름다움이 드러나지도 아니하고, 도탑고도 알차 광휘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한 구절의 유덕有德한 말을 구하려 해도 마침내 얻을 수가 없다. 왜 그럴까? 동심이 막히고 보면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문견聞見과 도리道理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으로 삼게 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이지, 동심설

조앤 에릭슨, 감각의 매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