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2)
-
‘강감찬’이지 ‘강한찬’이 아니다.
‘강감찬’이지 ‘강한찬’이 아니다. 을 번역하며 많은 부분에서 멈칫 거린다. 인터넷을 보니 ‘강감찬(姜邯贊)’을 ‘강한찬’으로 독음을 달아야 한다는 글들을 보았다.(‘강감찬’을 ‘강한찬’으로 알린 것은 아마도 재야 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최초의 민족 통일국가 고려』(한길사, 2007)부터가 아닌가 한다.) 뜬금없이 '일제 치하와 연결하여 우리 정기를 말살하려하였다'는 것이 그 한 이유다. 또 한 이유는 ‘邯’의 음이 고을 이름 ‘감’ 고을 이름 ‘한’ 따위로 나오는 데 대부분 ‘한’을 쓴다며 ‘강한찬’으로 읽어야 한다는 참신한(?) 주장이다. 결론부터 말한다. 두 이유 모두 근거 없다. ‘강감찬’이 맞다. ‘姜邯贊’을 한글로 독음을 단 최초는 1446년 한글 반포 이후이다. 이후, 어느 문헌에도 일관되게..
2023.01.18 -
<소손녕과 소배압의 사이>
가끔씩 내가 알고 있던 사실(事實)이 진실(眞實)이 아닐 때가 있다. 『기인기사』상, 마지막 을 번역하며 사실과 진실 구별이 참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책에서는 강감찬과 싸운 장수가 ‘소손녕(蕭遜寧?~997)’으로 되어 있다. 분명 『고려사절요』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절요』제3권 ‘현종 9년(1018), 송 천희 2년ㆍ거란 개태 7년 12월 무술일’ 항목 기록은 이렇다. “거란의 부마 소손녕(蕭遜寧)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략하면서 군사 10만 명이라고 소리쳤다. 왕은 평장사 강감찬(姜邯贊, 948~1031)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 평남 안주)에 주둔하게 하였다. 흥화진에 이르러 기병 1만 2천 명을 뽑아 산..
2023.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