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燕巖) 연보(年譜)

2023. 2. 2. 12:46연암 박지원 평전

연암(燕巖) 연보(年譜) (간호윤, 『연암평전』, 소명, 2018, 369~383쪽)

*인용을 할 때는 반드시 전거를 밝혀주세요.

 

『연암 연보』 

 

- 1737년 1세

 

* 반남 박씨로 이름은 지원趾源 혹은 지원祗源. 자는 중미仲美(친지들은 미중美仲으로 부름)와 미재美齋, 호는 연암燕巖을 주로 썼지만 별호로 연상煙湘, 열상외사冽上外史, 공작관孔雀館, 박유관주인薄遊館主人, 무릉선생武陵先生, 소소선생笑笑先生, 골계선생滑稽先生, 성해星海 도 사용했다. 부친 사유師愈(1703~1767)와 모친 함평 이씨咸平李氏(1701~1759)의 2남 2녀 중 막내로 2월 5일(양력, 3월 5일) 축시에 한양 서쪽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풀무골로 지금의 서울시 서대문구 아현동쯤)에서 출생. 조부 필균弼均은 경기도 관찰사, 지돈녕부사를 지냈다. 선조 때의 명신인 박소朴紹 이후 대단한 명문가였다. 

 

- 1739년 3세

 

* 형 희원 장가 듦. 형수는 이씨로 16세에 시집와서 연암을 잘 돌보았다.

* 옛사람의 선침扇枕 온피溫被 같은 것을 흉내냄(선침온피란, ‘베개를 부채질하고 이불을 따뜻하게 한다’는 뜻으로 부모를 효로 섬긴다는 의미). 

 

- 1741년 5세

 

* 이사 갈 집을 보고 와서 대청과 사랑이 어떤 방향인지, 집의 칸수를 정확히 말함.

 

- 1744년 8세

 

* 사도세자(10세), 혜빈 홍씨를 왕세자 빈으로 맞음.

 

* 둘째 누이가 덕수 이씨 현모顯模에게 출가.

 

- 1747년 11세

 

* 얼굴에 온통 쥐젖이 돋침.

 

- 1752년 16세

 

* 이보천의 딸과 혼인. 장인 이보천李輔天에게 《맹자》를 배우고, 처숙 이양천李亮天에게 《사기》의 〈신릉군열전〉을 배웠다. 이 시기에 〈항우본기〉를 모방하여 〈이충무공전〉을 지어 칭찬을 받음.

 

* 10월 이양천이 올린 상소에 노하여 영조가 귀양 보냄. 

 

- 1753년 17세

 

* 우울증으로 시달림.

 

- 1754년 18세

 

* 우울증으로 시달려 음악과 서화, 골동품, 기타 잡물을 취미 삼고 객을 초대하여 해학과 고담을 즐김. 〈광문자전〉을 짓고 〈민옹전〉의 민옹을 이 무렵 만남.

 

- 1755년 19세

 

* 11월 1일 처숙 이양천이 40세로 사망하고 연암의 정신적 방황과 편력이 시작됨.

 

- 1756년 20세

 

* 봉원사에서 독서하면서 윤영을 만나 허생 이야기 들음. 〈허생〉의 모티브가 여기서 이루어짐.

 

* 이 무렵 〈마장전〉과 〈예덕선생전〉을 지음.

 

- 1757년 21세

 

* 가을에 〈민옹전〉을 지음. 이 무렵 불면증과 우울증이 깊어짐.

 

- 1758년 22세

 

* 12월 14일(양력 1759년 1월 12일) 밤에 〈대은암창수시서〉를 지음. 

〈대은암창수시서〉는 서울 북악北岳 동쪽 기슭의 대은암에서 연암이 벗들과 시를 주고 받은 서문이다. 당시 함께한 사람들은 이희천의 당숙부인 이구영李.永(1736~1787), 이희천의 족숙부族叔父인 

이서영李舒永(1736~1800), 연암과 과거 공부를 같이 하던 한문홍韓文洪(1736~1792)이었다(이 사실은 이희천李羲天(1738~1771)의 《석루유고石樓遺稿》 <화백록시서和白麓詩序>에도 기록되어 있다).

 

- 1759년 23세

 

* 영조, 정순왕후 간택(영조는 66세, 정순왕후는 15세, 사도세자는 25세, 세손(정조)은 8세임)

 

* 모친(59세) 사망. 〈독례통고讀禮通考>(북학파 인사들의 관심을 모은 책)를 초抄함. 장녀(후일 이종목李鍾穆에게 출가) 출생.

 

- 1760년 24세

 

* 조부(76세) 필균 사망. 연암의 곤궁한 생활이 이때부터 더욱 심화됨.

 

- 1761년 25세

 

* 북한산에서 독서. 수염이 은백이 됨. 산사나 강가, 정자를 떠돌며 김이소金履素 등 10여 명과 과거 공부에 힘씀. 단릉 처사 이윤영李胤永에게 《주역》 배움. 이 해에 홍대용洪大容을 만남.

 

* 성균관 시험을 치러 들어가서는 고목이나 노송 등만 그려 놓아 과거에 뜻이 없음을 보임.

 

- 1762년 26세

 

*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음).

 

* 김신선을 찾음(〈김신선전〉에 보임). 

 

- 1764년 28세

 

* 〈초구기〉를 지음. 이 무렵 〈양반전〉과 〈서광문자전후〉를 지음.

 

- 1765년 29세

 

* 벗인 김이중金履中(1736~1793)이 나귀 살 돈 100냥을 보내어 연암에게 금강산 구경을 시켜줌. 유언호, 신광온申光蘊(1735~1785) 등과 금강산을 유람하며 〈총석정관일출〉을 지음. 백화암白華菴에서 잔 적이 있었는데, 이때 준俊이란 중을 만남. 이 무렵 〈김신선전〉도 지음.

 

* 홍대용, 숙부 홍억의 수행원으로 연행. 12월 27일 북경 도착, 다음 해 5월 2일 귀국.

 

* <김신선전>을 지음.

 

- 1766년 30세

 

* 홍대용의 《건정동회우록》에 서문을 씀. 

 

* 장남 종의宗儀 출생.

 

- 1767년 31세

 

* 이 무렵 〈우상전〉, 〈역학대도전〉, 〈봉산학자전〉을 지음.

 

* 3월 2일, 부친이 위독하자 연암이 손가락을 베어 피를 탕약에 떨어뜨려 올림. 이 때문인지 부친이 소생. 

 

* 6월 22일, 부친(65세) 사망.

 

* 삼청동三淸洞,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백련봉 셋집(이장오의 별장)으로 이사. 

 

- 1768년 32세

 

* 백탑白塔,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종로 탑골공원 부근으로 이사.(연암은 이 집을 ‘공작관孔雀館’이라 부르고 자호自號로 삼았다.) 이덕무李德懋, 서상수徐常修, 유득공柳得恭, 유금柳琴(유득공의 숙부) 등과 이웃하여 깊은 교우를 맺으며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가 제자로 입문한다. 이른바 북학파北學派 혹은 백탑파의 형성 시기이며, 연암의 사유가 널리 펼쳐짐.

 

- 1769년 33세

 

* 이서구가 지은 《녹천관집》에 〈녹천관집서〉를 씀.

 

* 유득공, 이덕무와 함께 개경과 서경을 여행.(9월 경쯤일 듯)

 

* 겨울, <공작관집자서>를 씀.

 

- 1770년 34세

 

* 1차 시험인 감시監試 초·종장에 모두 장원. 감시는 ‘소과小科’라고도 불리며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다. 방이 붙던 날 영조임금이 불러들여서는 답안을 읽게 하고는 크게 칭찬하였다. 그러나 연암은 2차 시험인 회시에 응하지만 답안을 내지 않고 나옴.

 

- 1771년 35세

 

* 다시는 과거에 응시치 않았다. 연암이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이 뒤부터였는데 주량이 무척 세었음. 장지 문제 발생하여 이상지李商芝(1729~1799)와 다툼.

 

* 5월, 이덕무, 이서구, 백동수, 오복 등과 북으로는 송도, 평양, 천마산, 묘향산과 남으로는 속리산, 가야산, 화양, 단양 등지를 여행. 이때 연암골을 발견하여 ‘연암燕巖’을 호로 삼음. 

 

* 5월, 연암의 스승 이윤영李胤永(1714~1759)의 아들이자 벗인 이희천이 《명기집략》 사건으로 교수형을 당함. 연암은 이 일로 충격을 받아 경조사도 끊고 마치 폐인처럼 지냈으니, 이희천이 효수를 당한 지 3년 뒤인 1774년에 쓴 〈이몽직애사李夢直哀辭〉라는 글에 그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음.

 

* 9월1일 큰 누이가 사망하여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을 지음. 

연암은 이 글을 자신의 득의의 작품으로 꼽아 열하를 갈 때 가지고 가 글씨를 받으려 했음.

 

* 10월, 이덕무가 연암의 글 중, <하야연기> 등 10편을 뽑아 평점 

붙인 《종북소선》을 엮음.

 

- 1772년 36세

 

* 여름철에 남의 집을 세내어 전의감동典醫監洞(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으로 이사. 광릉 석마향石馬鄕(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 일대)에 있는 처가로 식구들을 보내고 전의감동에 임시로 거주하는 집을 얽어 놓고 혼자 거처함. 이즈음 연암협에 집을 얽고 홍대용과 자주 만남.

 

* 6월 18일, 유시酉時(하오 6시)쯤에 홍덕보의 집에서 서양금을 향토 곡조에 맞추어 해득하는 것을 들음.

 

* 《영대정잉묵》 엮음.

 

* 박제가의 문집 《초정집》에 〈초정집서〉를 씀.

 

- 1773년 37세

 

* 윤 3월, 이덕무, 유득공과 파주 등을 거처 평양 유람.

 

- 1774년 38세

 

* 〈제이당화題李唐畵〉를 지음. 

 

* 이희경이 연암, 이덕무, 박제가의 시문을 묶어 《백탑청연집》을 펴냈으나 현재 남아 있지 않음.

 

- 1775년 39세

 

* 12월, 정조가 대리청정.

 

- 1776년 40세

 

* 3월 5일, 영조 승하(82세) 3월 10일, 정조正祖 즉위, 홍국영 득세. 6월, 규장각 설치.

 

* 《겸헌만필謙軒漫筆》 건·곤 엮음.

 

* 유득공의 작은아버지 유련柳璉이 《한객건연집》 엮음(중국에서 1777년에 출간). 이 책은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 이덕무,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4명의 시를 모아 엮은 책이다. 중국인 이조원이 ‘사가지시四家之詩’라 하여 ‘사가시집四家詩集’으로 더 유명함.

 

- 1777년 41세

 

* 6월 하순, 장인 이보천(64세) 사망. 〈제외구처사유안재이공문祭外舅處士遺安齋李公文〉을 지어 추도함.

 

- 1778년 42세

 

* 3월17일, 이덕무, 박제가 연행. 박제가 《북학의》를 지음.

 

* 7월 25일 형수 전주 이씨(형 희원의 아내로 연암의 어린 시절을 돌보았으며 가난으로 조울증을 앓았다) 사망. 형수를 위하여 〈백수공인이씨묘지명伯嫂恭人李氏墓誌銘〉을 지었다.

 

* 7월, 홍국영의 화를 피해 황해도 금천 연암협으로 이주. 이유인즉슨 정조의 비인 효의김씨가 생산을 하지 못하자 홍국영이 자신의 누이를 후궁으로 배치해 놓고 원자를 얻은 뒤 득세하려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를 차마 볼 수 없었던 연암이 이에 대한 상소를 올리나 오히려 홍국영의 손에 들어가고, 이 사건으로 홍국영은 연암을 미워하게 되었다.

 

* 개성유수로 부임한 유언호가 생계를 살핌. 일시적으로 개성 금학동 양호맹의 별장으로 이주. 이때 유언호가 빌려준 칙수전 1,000민緡을 양호맹, 최진관이 대신 갚아 주었다.(후일 안의현감으로 가 받은 첫녹봉을 떼어 되갚음)

 

- 1779년 43세

 

*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가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등용됨.

 

- 1780년 44세

 

* 2월, 홍국영 실각 후 4월에 사약을 받아 죽자 서울로 돌아와 평계平溪에 있는 처남집에서 기거.

 

* 5월 25일, 삼종형 박명원과 청 고종 70수연壽宴에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동행. 

 

* 10월 27일 한양에 도착. 연암은 《열하일기》 〈산장잡기〉 ‘후지後識’에서 “평생토록 괴이함을 봄에 열하에 있을 때를 능가한 적이 없었다”라고 그 놀라움을 적었다. 

 

* 귀국 즉시 박명원의 소유인 삼포三浦(마포)에 있는 세심정洗心亭에 거처를 잡고 처남 이재성의 집과 연암 골짜기를 왕래하며 2,000여 리 장정의 여행기인 《열하일기》 저술 시작. 이 무렵 〈허생〉, 〈호질〉을 지음.

 

* 차남 종채宗采(宗侃이라고도 함) 출생.

 

- 1781년 45세

 

* 당시 영천 군수로 있던 홍대용은 얼룩소 2마리, 공책 20권, 돈 200민緡 등을 보내면서 연암의 저술을 격려.

 

* 9월, 박제가의 《북학의》에 〈북학의서〉를 씀.

 

* 벗 정철조 사망하자 그를 위해 〈제정석치문祭鄭石癡文〉을 지음.

 

- 1783년 47세

 

* 10월 22일, 담헌湛軒(즐거운 집) 홍대용이 노모를 핑계로 낙향하였다가 사망하니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을 지음. 홍대용의 염을 하며 반함飯含을 못하게 함. 홍대용 사망의 충격으로 이후 연암은 음악을 끊음. 

 

* 《열하일기》 26편을 완성함.

 

- 1784년 48세

 

* 유득공이 《발해고渤海考》를 탈고함.

 

- 1785년 49세

 

* 박남수가 《열하일기》를 불태우려 함.

 

* 유한준, 유만주 부자가 《방경각외전》을 읽고 극찬. 

 

- 1786년 50세

 

* 7월, 친구인 이조판서 유언호의 천거로 종 9품 벼슬인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건축물의 신축과 보수업무를 맡은 감독으로 오늘날의 공사감독관 격임)에 임명됨. 연암이 음보蔭補로 처음 출사하자 노론 벽파의 실력자 심환지沈煥之, 정일환鄭日煥 등이 찾아와 자파로 끌어 들이려 했으나 연암은 그때마다 해학적인 말로 쫓아낸다. 연암은 노론 벽파계열이면서도 저들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음.

 

- 1787년 51세

 

* 1월 5일, 동갑내기 부인인 전주이씨全州李氏(1737~1787)가 51세로 사망. 한 번은 연암이 옷을 해 입으라고 돈을 주니 형님 댁은 끼니를 거른다며 집에 돈을 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연암은 평소 이러한 부인 이씨의 부덕을 존경했으며 부인 별세 이후 종신토록 독신으로 지내었다. 부인의 상을 당하여 이를 애도한 절구 20수를 지었다 하나 전하지 않음. 

 

* 7월, 형 희원이 향년 66세로 사망하자 〈연암억선형燕巖憶先兄〉을 지음. 형수를 모신 연암협에 형을 안장함.

 

* 〈송자대전〉 편수에 참여하다. 연암은 우암의 편지 중 윤휴의 일을 논한 대목에 전아典雅하지 못한 칭위稱謂가 있어 한두 자를 삭제할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개탄함. 

 

- 1788년 52세

 

* 3월, 일가족이 모두 전염병에 걸려 큰며느리가 죽고 장남 종의도 위독한 끝에 간신히 회생. 큰며느리가 죽자 주위에서는 살림할 사람이 없다고 연암에게 재혼을 권했으나 거절함.

 

* 종제 박수원朴綬源이 선산부사로 나아가 집이 비게 되었으므로 연암은 계산동桂山洞(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에 있던 그의 집에서 잠시 머무름. 

 

* 12월, 선공감 감역 임기 만료됨. 

 

- 1789년 53세

 

* 6월, 종 6품의 평시서 주부平市署主簿(시장 상점의 두량 검사와 물가등락을 관할하던 관청의 관리)로 승진, 가을에 공무의 여가를 얻어 다시 연암 골짜기로 들어감.

 

- 1790년 54세

 

* 삼종형 박명원이 사망하자 〈삼종형금성위증시충희공묘지명三從兄錦城尉贈諡忠僖公墓誌銘〉을 지음. 《과정록》에 이 묘지명은 정조의 하교로 지었다고 한다. 박명원은 연암의 재주를 아끼고 인정하였음.

 

* 사헌부 감찰로 옮겼으나 ‘사헌부司憲府’라는 이름이 중부仲父(중부의 이름은 ‘사헌師憲’)와 같다하여 사양. 제릉 영齊陵令(태조太祖비妃였던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으로 경기도 개풍군에 있다)으로 옮김.

 

- 1791년 55세

 

* 종5품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으로 전보되다. 당시 흉년이 들어 곡상들이 쌀을 비싸게 팔거나 매점매석을 하여 곡가가 폭등했다. 이때 곡가를 억제하고 매점을 금지하려는 의견들이 지배적이었으나, 연암은 그러한 정책을 쓰면 상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쌀을 팔러 가버릴 것이므로 도리어 쌀 품귀현상이 심해질 것이며 또한 서울에 이미 집적되어 있는 쌀의 방출을 막으면 다른 지역의 백성들이 굶주리게 된다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와 같이 곡가의 귀천과 곡물의 집산을 인위적으로 통제해서는 안 된다는 연암의 견해가 채택됨으로써 그 후년의 기근에도 피해가 없었음.

 

* 7월, 규장각의 교서관校書館에서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가 왕명으로 교서관에서 병지兵志를 편찬할 때 성대중이 마침 숙직이었다. 연암은 홍원섭洪元燮, 옥류玉流 등과 함께 규장각을 찾아 시를 지으며 노닐다 〈송석도〉를 그려 좌중을 놀라게 함. 박제가는 〈신해칠월 동청장랭암봉명찬집국조병사 개국어비성 이청성적취직태호 연암옥류제공우집〉이라는 시에서 “팔뚝 아래 문득 솔과 바위 그려지니, 《열하일기》 문장만이 아니라 그림도 놀라워라(腕底忽添松石賞 驚人不獨熱河文)”라고 하였다.

 

* 9월, 정조가 명청 패관소설 수입금지령을 내림.

 

* 12월, 유한준이 연암의 품계가 원칙 없이 올라간다고 소를 올려, 종6품으로 강등되어 안의현감(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일대)으로 제수(천거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임명하는 것).

 

- 1792년 56세

 

* 1월, 임지 안의에 도착. 안의는 거창현과 함양군을 이웃에 두고 있었으며 당시 인구는 5천여 호였다. 연암은 부임 즉시 송사를 엄격히 처리하여 고을 백성들 간에 분쟁을 일삼던 풍조를 바로잡고 아전들의 상습적인 관곡 횡령을 근절했으며 관아에까지 출몰하던 도적들을 퇴치했다. 또한 연암은 함양군의 제방 보수공사에 고을 백성들이 동원되자, 행군 대형을 짜서 일사불란하게 지휘하여 공사를 완벽하게 해 냄으로써 매년 동원하는 폐단을 막음. 

 

* 벗 김이소金履素가 우의정에 임명되자 〈하김우상이소서賀金右相履素書〉를 보냄. 이 편지에서 화폐 유통을 바로잡고 은의 국외 유출을 막는 방안에 대한 의견 피력.

 

* 문체반정의 바람이 서서히 일기 시작. 이동직李東稷이 부교리副郊理로서 《열하일기》의 문체가 저속하다고 논박하는 상소를 올림.

 

- 1793년 57세

 

* 문체반정의 주동자로 지목하는 정조의 말을 담은 글을 남공철이 보내오자 자송문 대신 남공철에게 편지를 씀.

 

* 1월 25일, 역시 문체반정으로 지목당한 형암 이덕무(53세)가 병중에 자송문을 바치고는 다음날 사망. 이덕무의 자는 무관懋官이며, 형암炯庵·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 등의 호를 사용했다. 훗날 연암은 

정조의 어명에 따라 〈형암행장炯菴行狀〉을 지음. 

 

* 이덕무가 죽자 그의 유고집 출간.

 

* 유한준이 연암을 ‘호복임민胡服臨民(오랑캐 복장을 하고서 백성을 다스림)’, ‘노호지고虜號之藁(오랑캐의 연호를 쓴 원고)’라는 말로 모함.

 

* 봄에 도내에 흉년이 든 가운데 안의 고을이 가장 심하여 응당 공진公賑을 설치해야 했으나, 연암은 녹미祿米를 떼어 사진私賑을 설치했으며 조정에서 내린 초피貂皮 등속도 받지 않고 공명첩도 돌려보냄.

 

* 관아의 낡은 층고層庫를 헐어버리고 남과 북에 못을 파고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 공작관孔雀館,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 연상각烟湘閣 등의 정자와 누각을 지음. 담을 쌓을 때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벽돌을 구워 썼다. 이에 대해서 유한준이 비방함.

 

* 〈열녀함양박씨전 병서〉를 지음.

 

* 《영대정집》 엮음.

 

- 1794년 58세

 

* 차원差員으로 상경. 특명으로 입시하여 안의현의 농작 상황과 도내 민정들을 사실대로 보고함. 

 

* 장남 종의가 성균시成均試에 응시하려 하자, 제자 이서구가 성균관장으로 있다고 편지를 보내 응시하지 못하게 함.

 

* 〈함양군 학사루기〉를 지음. 원문엔 “지금 임금 19년 갑인년(1794)”이라 하였다. 정조 19년은 을묘년(1795)이고 갑인년은 정조 18년이므로 오류임.

 

- 1795년 59세

 

* 7월, 정조가 이가환을 특별히 충주 목사로 보내 천주교를 금하게 하자 연암은 이러한 조치가 지나치게 관대할 뿐 아니라, 천주교의 소굴에 천주교를 비호하는 수령을 임명함으로써 더욱 이를 조장할 것이라고 비판함.

 

* 9월 20일, 해인사를 구경하고 〈해인사〉라는 장편시와 〈해인사창수시서〉를 지음.

 

* 가을에 차남 종채 혼인.

 

- 1796년 60세

 

* 3월, 임기가 만료되어 귀경. 서울에 돌아온 연암은 장차 저술 활동에 전념할 생각으로 계산동桂山洞(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계동)의 과원 하나를 사들여 중국의 건축제도를 모방한 다락 얹은 집을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지었다. 집의 이름은 총계서숙叢桂書塾으로 사람들은 이 집을 당댁唐宅으로 불렀는데, 곧 계산초당桂山草堂이다. 

처남 이재성이 이사 와 살았고 그가 이사 간 뒤로는 아들 종채가 물려받아 평생을 보냈다. 겨울에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에 임명. 얼마 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의릉 영懿陵令(경종景宗과 선의왕후宣懿王后의 능으로 경기도 양주에 있다)으로 옮김. 수 년 동안 당뇨와 풍담風痰(풍증을 일으키는 담), 정충증怔忡症(가슴이 벌떡이는 증세)을 앓음.

 

- 1797년 61세

 

* 제주 사람 이방익李邦翼이 표류하다가 중국에 닿아 여러 곳을 둘러보고 귀국하였는데, 그는 글을 몰랐다. 정조는 연암에게 그의 견문 내용을 글로써 바치라고 하였다. 이 글이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임.

 

* 7월, 정조가 의도적으로 면천沔川(지금의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 군수에 임명. 당시 면천에는 천주교도들이 많았다. 연암은 이들을 회유시켜 개종케 하여 신유사옥 때 면천군은 무사함. 

 

- 1798년 62세

 

* 면천군 범천면泛川面(지금의 당진군 우강면)에 사는 천주교도 김필군金必軍을 선처한 일로 병영兵營과 마찰을 빚자, 당시 충청감사 이태영李泰永에게 병영의 처사를 항의하며 사의를 표명한 편지를 보냄.

 

- 1799년 63세

 

* 3월 25일, 정조의 어명에 따라 《과농소초課農小抄》와 부록 격인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지어 바침. 이 저작으로 정조와 여러 신하들에게 칭송을 받음.

 

* 봄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연암은 안의현에서 시행했던 예에 따라 사진을 설치하여 기민을 구제함.

 

* 성 밖의 민전을 사서 가난한 백성의 입장을 허용.

 

- 1800년 64세

 

* 6월 28일, 정조 승하. 연암이 몹시 호곡號哭함.

 

* 8월, 양양襄陽부사로 승진. 양양은 본래 문신을 임명하는 고을로 음관蔭官이 이에 임명되기는 연암이 처음임.

 

* 10월 15일, 양양부사 부임.

 

- 1801년 65세

 

* 봄에 신흥사神興寺의 승려 창오昌悟(창오暢悟의 오기인 듯하다. 창오는 1797년(정조 21) 거관과 함께 신흥사의 명부전을 중수했다)와 거관巨寬이란 중이 궁속宮屬(각 궁에 속한 원역員役 이하의 종)과 결탁하여 내수사內需司(왕실 재정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 궁중에서 쓰는 쌀, 베, 잡물雜物, 노비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의 공문公文이나 궁가宮家(왕실의 일부인 궁실宮室과 왕실에서 분가하여 독립한 대원군·왕자군·공주·옹주가 살던 집을 통틀어 이르던 말)의 명함을 얻어내어 사람들을 현혹하고 심지어 관속을 구타하여 죽인 일이 발생했다. 연암이 이를 감사監司(관찰사)에게 알렸으나 감사는 꺼리는 바가 있었던지 흐지부지 하자, “관장으로서 궁속과 중의 무리에게 제어 

당하며 백성을 어찌 다스리겠느냐”라며 병을 빙자하여 사직하였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관직 생활이 되었음.

 

- 1802년 66세

 

* 봄에 이광현李光顯(이광현은 처음에 연암을 비방하였으나 인품에 감화를 받아 연암을 지극히 존경한 이로 청안淸安현감을 지낼 때 깨끗한 관직생활을 했다)과 연암 골짜기로 들어가 계곡에 정자를 짓고 수개월을 머물다 돌아오다. 연암 골짜기로 향하던 날은 마침 차남 종채가 정시廷試를 보는 날이었음에도 연암은 개의치 않고 길을 떠났음.

 

* 겨울에 조부 장간공과 부친의 묘를 포천으로 옮기려다 유한준의 방해로 좌절되는 변을 당하다. 이 사건 이후 연암은 울화병이 생겨 회복하지 못함.

 

- 1804년 68세

 

* 여름 이후 병세가 더욱 심해지자 약 복용을 금하고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라 하고 홍대용처럼 반함하지 말 것을 당부. 병중에도 처남 이재성과 이희경을 자주 불러 술상을 차려 놓고 담소함. 

 

- 1805년 69세

 

* 4월 25일, 박제가朴齊家 사망. 박제가의 초명은 제운齊雲, 자는 차수次修이며, 정유貞.·초정楚亭등의 호를 썼다. 연암은 박제가에게 굶주림을 하소연하며 돈을 꿔 달라고 요청한 편지가 있을 정도로 흉허물 없는 사제관계였다(연암의 사망 소식을 듣고 상심하여 곧 죽었다는 기록과, 1815년 사망 기록은 모두 잘못이다). 

 

* 10월 20일(양력, 12월 10일) 아침 8시경에 가회방 재동齋洞(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재동)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라는 유명만을 남긴 채 서거하다. 연암이 세상에 머무른 지 예순 아홉 해째였다. 염습할 때 몹시 몸이 희었으며 평생에 가장 싫어한 말은 ‘구차苟且’였다. ‘구차’란 흉 없는 삶을 살겠다는 표지였다. 경기도 장단長湍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 남향받이에 자리한 그의 아내 묘에 합장되었다. 그날 분백粉白의 눈꽃이 훨훨 날렸을 지도 모른다.

 

 

 

<연암 사망 후 관계 중요 기록>

 

1822년 봄 박종채, ≪과정록≫ 자료수집(1813년 봄이란 본도 있음).

1826년 가을 박종채, ≪과정록≫ 탈고(1816년 초가을이란 본도 있음).

1829년 가을 효명세자(순조의 아들로 4년 간 부왕을 대신해 선정을 함. 후일 익종으로 추존)가 ≪연암집≫을 출간할 생각으로 연암의 모든 원고를 갔으나 다음해 죽음으로 무위로 돌아 감. 후일 원고를 돌려받음.(박종채의 ≪과정록≫에는 1828년 봄으로 되어있다.)

1831년 박종채, <추기>

1835년 아들 박종채 별세.

1863년 동지의금부사가 된 박규수의 3대 조상을 추증하라는 전지로, 박사유(朴師愈)에게 사복시 정을, 박지원(朴趾源)에게 이조 참의를, 박종채(朴宗采)에게 이조 참판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 

1865년 판윤이 된 박규수의 3조상을 추증하라는 전지로, 박사유에게 이조 참의를, 박지원(朴趾源)에게 이조 참판과 그에 따른 예겸을, 박종채에게 이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

1866년 송백옥(宋伯玉)이 편찬한 ≪동문집성(東文集成)≫에 연암의 글을 처음으로 선집.

1873년 우의정이 된 박규수의 3대 조상을 추증하라는 전지로, 박사유에게 이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을, 박지원에게 좌찬성과 그에 따른 예겸을, 박종채에게 영의정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

1876년 손자 박규수 별세.

1900년 김만식(金晩植)외 23인에 의하여 서울에서 처음 공간된 것은 책을 초록한 형태였다.

1900년 ≪연암집≫두 책을 김택영이 간행.

1901년 ≪연암속집≫ 한 책을 김택영이 간행.(1900년에 누락된 작품)

1905년 김택영이 편찬한 ≪여한구가문초(麗韓九家文鈔)≫에 연암의 글을 선집.

1910년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고 문도文度라는 시호를 내림.

1911년 ≪연암외집 열하일기 전≫, 조선광문회에서 간행. 

1917(6)년 ≪중편박연암선생문집≫을 상해에서 김택영이 3분 책으로 간행.

1922년 ≪연암집≫ 필사본을 김승열(金承烈)이 다시 교정(현재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25-110) 소장본)

1932(1)년 ≪연암집≫, 대동인쇄소, 박영철이 돈을 대어 6분 책으로 간행. 

김성칠이 연암집의 일부를 엮음. 

1954년 ≪박지원작품선집≫, 조선작가동맹출판사에서 간행.

1955년 ≪열하일기≫상, 북한의 국립출판사. 중은 1956년, 하는 1957년 간행.

1959년 ≪열하일기≫상, 북한의 국립문학예술서적출판사. 하는 1960년 간행.

1960년 ≪박지원작품선집1≫, 홍기문 옮김, 북한의 국립문학예술서적출판사, 조선고전문학선집25(2004년 ≪나는 껄껄선생이라오≫로 남한의 보리출판사에서 다시 펴냄).

1967년 ≪국역열하일기≫, 이가원 옮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 1987년 중판.

1982년 ≪연암집≫, 경인문화사(영인).

1983년 ≪열하일기≫, 윤재영 옮김, 박영사 간행.

1986년 ≪연암집≫, 계명문화사(영인).

1991년 ≪박지원작품집1≫, 이상호 옮김, 북한의 국립문학예술서적출판사, 조선고전문학선집66(2004년 ≪열하일기≫상․중․하로 남한의 보리출판사에서 다시 펴냄).

1991년 ≪박지원작품집2≫, 이상호 옮김, 북한의 국립문학예술서적출판사, 조선고전문학선집67(2004년 ≪열하일기≫상․중․하로 남한의 보리출판사에서 다시 펴냄).

1997년 ≪열하일기≫, 주단서 교점, 상해서적출판사.

2004년 신호열․김명호 옮김, ≪국역연암집≫ 2, 민족문화추진회.

2012년 간호윤 저, ≪당신연암≫, 푸른역사.

2016년 간호윤 옮김, ≪연암 박지원 소설집≫, 새물결플러스.

2019년 간호윤 저, ≪연암 평전≫, 소명출판.(개정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