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에게 길을 묻다 - 4강 [안정복 동사강목東史綱目]

2018. 7. 17. 10:55간호윤의 책들/아! 나는 조선인이다(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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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에게 길을 묻다 - 4강 [안정복 동사강목東史綱目]

 




18세기
아! 나는 조선인이다 - 휴헌 간호윤

안정복 동사강목(東史綱目) - 내 나라 역사를 찾아서

동사강목(東史綱目)은 동(東)은 동쪽을 뜻하여 우리나라를 일컬으며 강목(綱目)은 중국 주자의《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이라는 역사서에 차용함으로써, '우리나라 조선의 역사서'임을 나타내고 있다. 

​안정복이 특히 큰 업적을 남긴 분야는 역사학이다.
"평소 자국의 역사가 제대로 서술된 책이 없음을 안타깝다" 여기던 그는 절치부심하여 마흔여덟 살에 이 책을 완성하였고, 이후로도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였다. 그는 이 책을 저술하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에 관계되는 서적은 모조리 조사하여 참고하였다 한다.
이는 한 세대 뒤의 실학자인 유득공에게도 영향을 주게된다. 유득공의 [발해고]는 발해의 역사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기록한 유일한 역사서라는 점에서 대단히 가치가 높다 .

순암 안정복 선생이 저술한 많은 책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동사강목>이 오늘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그것은 <동사강목>이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서이기 때문이다.

[휴헌 선생 강의]
휴헌 선생은 E. H 카(Edward Carr)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 라는 것을 매 강의마다 말한다.
더불어 오늘은 안정복 선생의 동사강목을 소개하면서 다음 두 종류의 책을 소개한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Invisible Gorilla'
아는 만큼만 보인다? 관심 있는 것만 보인다!
나무만 유심히 보다가 숲을 못 보고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다보면 나머지는 잘 못 보고 넘어가기 마련이 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적 집중 때문에 중요한 사실을 놓치는 정도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놀랍다고 한다.
말 그대로 사람은 보고자 한 것만 보고, 듣고자 한 것만 듣는 법이다. 당사자가 아닌 주변 사람은 어떻게 그걸 못 보았을 수 있느냐 못 들을 수 있느냐 반신반의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결론은 변함이 없다. 사람은 주의를 기울인 부분만 보고 들을 수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대니얼 사이먼스(DanielSimons)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ristopher Chabris)는 1999년 그들이 하버드대 심리학과에 근무하는 동안 이러한 현상을 실험적으로 입증했습니다. 그의 실험은 ‘보이지 않는 고릴라’ 혹은 ‘투명 고릴라’ 시험이라고 해서 유명세를 탔다. 최근에 그들 두 사람이 공저한 <보이지 않는 고릴라>가 그 책이다.
그들은 이 실험에서 6명의 학생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에는 검은색 셔츠를 입히고 다른 팀에는 흰색 셔츠를 입힌 후, 두 팀을 섞어놓고 서로 농구공을 패스하게 한다. 그리고 이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그 영상을 피험자들에게 보여준 후 검은색 팀은 무시하고 흰색 팀이 행한 패스의 수만을 세도록 지시 한다. 영상을 다 보여주고 나서 피험자들에게 묻는다.

“혹시 고릴라를 보았나요?”

실험에 참여한 피험자들 중 절반 이상은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런데 사실은 동영상 중간에 고릴라 의상을 입은 학생이 무대 중앙에서 가슴을 두드리며 킹콩 흉내를 내는 장면이 들어 있었다. 이런 힌트를 듣고 난 후 동영상을 다시 본 피험자들은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저걸 못 볼 수 있지?”

'독수리와 소녀' 사진의 진실은?
사진작가 케빈 카터는 뛰어난 섬세함과 맑고 투명한 감성으로 유명한 사진 예술가였다.
케빈 카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Bang-Bang 사진가 클럽의 멤버로 1993년 수단으로 건너간다. 당시 수단은 10년이상의 가뭄으로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고 내전까지 발생했다.
케빈 카터는 내전의 실상과 기아의 심각성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수단은 작은 나라여서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루종일 촬영하느라 기진맥진한 상태로 덤불을 향해 가던 카터는

'제대로 먹지 못하여 쇠약해진 한 어린 소녀가 힘겹게 구호 센터를 향해 기어가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 뒤에는 독수리 한 마리가 아이의 죽음을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카터는 질병때문에 희생자를 만지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카터는 독수리가 포기하고 달아나기를 바라며 20분간 상황을 지켜보았고 결국 독수리를 쫓아내고 아이가 안전하게 센터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 이야기하며 흐느꼈다.
이때 찍은 사진은 뉴욕타임즈에 실렸고 국제사회의 관심이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로 돌리는데 기여한다. 다음해인 1994년 카터는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바로 1994년 퓰리처상을 수상받은  '독수리와 소녀(The Vulture and  The Little Girl)' 라는 사진이다.

카터는 사진이 공개된 후 아이를 먼저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비판은 날이 갈수록 거세어지고 극심한 심적 고통을 견디지 못한 카터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순암 안정복]
순암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숙종 말기에 태어나서 정조 말기에 세상을 떠난 실학자이다.
고려조에 태조를 도와 가문을 연 선조인 안방걸(安邦傑)로부터 대대로 중앙의 고급관료를 지냈으나, 안정복의 가까운 선조에 이르러 영락하여 조부대에 이르면 남인의 정치적인 입지에 따라 더욱 영락한 환경으로 전락하였다.

무주에서의 은거 생활
조부 안서우는 영조 즉위와 함께 노론의 세상이 되자 당류의 배척을 받아 탐관오리죄로 울산부사에서 파직되는 비운을 만났다. 안서우는 파직 후 서울을 떠나 전라도 무주에 내려가 은거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때 그의 아들 안극(安極)과 손자 안정복 등 온 가족이 함께 무주로 이사하게 되었다.

조부 안서우의 몰락은 안정복과 그의 부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안정복의 부친인 안극은 일평생 관직 생활을 하지 않았으며, 안정복도 15세의 어린 나이로 할아버지의 비운을 목도한 후 38세 이르기까지 과거 시험은 물론이고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길은 일체 포기하였다. 조부의 파직이 가져다 준 충격이 심했다고 볼 수 있다.
안정복은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았다. 10세가 되어서야 겨우 『소학』에 입문할 수 있었다.
무주에서의 은거 생활은 안정복의 학문 활동에도 영향을 주어, 출세와는 거리가 먼 학문을 좋아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기본적인 유학 경전도 공부했지만, 그는 음양ㆍ성력(星曆)ㆍ의약ㆍ점복, 손자병법, 불교ㆍ노자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15~16세에는 이미 통달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한다. 세간에 ‘방술가(方術家)’로 알려지자 스승 이익(李瀷)으로부터 이름을 바꾸라는 충고를 듣기도 하였다.

관직 생활과 저술 활동에 몰두하다
1726년(영조 2)부터 무주에서 은거하던 안극과 안정복은 10년 뒤인 1735년(영조 11)에 안서우가 사망하자 무주를 떠나 고향인 광주 경안면 덕곡리로 돌아왔다. 이때가 1736년, 안정복의 나이 25세였다.

광주 덕곡리에 돌아온 안정복은 ‘순암’이라는 이름의 거처를 만들고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또 그는 조상 선영이 있는 덕곡리 영장산 아래에 ‘이택재(麗澤齋)’라 불리는 청사를 지어 학문 생활과 함께 제자들을 공부시키는 강학의 장소로 이용하였다.

안정복이 주로 살았던 경기도 광주는 지금의 행정구역과 달리 서울 강남, 강동, 하남시, 남양주시 등에 걸친 넓은 지역이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 광주부는 실학의 종장(宗匠)인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영향을 받은 순암 안정복과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 재야 남인 계열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근기실학이 형성된 지역이기도 했다.

안정복은 고향으로 돌아온 때부터 방술학보다는 성리학에 눈을 뜨게 되어 [성리대전]과 [심경]을 읽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학문적 관심을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인간의 윤리 도덕과 사회참여 문제로 확장시켜나갔다.

광주 환향 후, 안정복은 학문과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1736년 광주로 온지 1년 후인 1737년 26세에 <치통ㆍ도통이도(治統ㆍ道統二圖)>를 시작으로 중국의 삼대문화의 정통설을 기본으로 한 『치통도(治統圖)』와 육경(六經)의 학문을 진리로 하는 『도통도(道統圖)』를 지었다.

1738년 27세에는 뒷날 [임관정요(臨官政要)]의 모체가 되는『치현보(治縣譜)』를 저술했으며, 이어 동약(洞約)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향사법(鄕社法)』을 짓는 등 쉴 틈 없이 저술에 전념했다.

1740년 29세에는 안정복의 초기 학문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하학지남(下學持南)』상·하권을 저술하였고 1784년(정조 8년) 안정복이 73세에 완성되었다. 이 책은 안정복의 경학(經學)에 대한 실천윤리적 지침서로서 온 정렬을 기울였던 저술이다.

1744년, 33세에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증손으로부터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입수해서 읽었는데 안정복의 학문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64세 때 <반계연보>를 짓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현실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그해에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해설한 『정전설(井田說)』을 내 놓았다.

30세인 1741년에는 주자의 사상을 모방한 『내범(內範)』을 짓기도 하였다.

이처럼 환향 후 몇 년간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던 안정복은 30대가 되자 광주 지역 근처에 사는 실학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시작했다.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다
​안정복은 35세 1746년 자신의 학문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줄 선생을 만나게 된다. 안산 첨성촌에 살고 있는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다.
이익의 문인이 된 뒤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에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역시 성리학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역사학에 대한 시각, 그리고 서구사상의 접촉이라 할 수 있다.

스승 이익과의 학문 교류는 이익이 타계할 때까지 20년 가까이 지속되었는데, 특히 안정복의 대표 저술인 [동사강목(東史綱目)]은 6년간 스승인 성호와의 편지 문답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익과 그의 문인들과의 교류는 안정복의 학문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35세라는 장년기를 가학(家學)으로 보낸 탓에, 여기에서 형성된 자기 나름의 학문체계(學問體系)와 사유구조(思惟構造)는 성호를 비롯한 문인들과의 교류에서도 쉽게 변화되지 않았다. 안정복이 다른 실학자들 보다 개혁적인 면에서 참신성이 덜 하고,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선 것도 이러한 가학의 분위기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관직 생활과 저술 활동에 몰두하다
38세 되던 1749년(영조 25) 안정복은 문음(門蔭: 특별한 연줄로 벼슬에 임명되는 일)으로 첫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말단 관직인 만령전참봉(萬寧殿參奉, 종9품)을 시작으로 의영고참사(義盈庫奉事, 종8품), 정릉직장(靖陵直長),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 종6품)를 거쳐 43세에 이르러 사헌부감찰까지 올랐다.
그러나 부친의 죽음과 본인의 건강 악화로 5년 만에 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고향 광주에 내려갔다.

이후 61세까지 18년간 관직과는 거리를 두고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는데, [임관정요](1757. 46세)를 완성하고, [동사강목](1759, 48세), [열조통기](1767, 56세) 등 그의 대표 저술은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임관정요』는 1738년 27세 되던 해에 뒷날 [임관정요(臨官政要)]의 모체가 되는『치현보(治縣譜)』를 저술하고, 1757년 46세)에 이를 완성하였다. 대체로 수령을 대상으로 하여 이른바 칠사(七事)라고 하는 농상성(農桑盛)·호구증(戶口增)·학교흥(學校興)·군정수(軍政修)·부역균(賦役均)·사송간(詞訟簡)·간활식(奸猾息)을 보다 중점적으로 설명했다.
또한 당시 민폐의 원인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그에 대한 시정책을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서문에서는 천덕(天德)과 왕도(王道),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일체로 보고, 일찍이 배우지 않고도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었다고 전제했다.
후대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저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은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서로서 1759년에 일단 완성하였다.
계속해서 1767년에는 중국의 당 왕조의 역사인 『열조통기(列朝通紀)』를 저술하는 한편, 1753년에는 스승 이익의 저술인 『도동록(道東錄)』을 『이자수어(李子粹語)』로 개칭해 편집하였다.

『하학지남』은 1740년 29세에 저술을 시작하여 안정복의 초기 학문의 완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1784년(정조 8년) 73세에 완성하였다. 일상적인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작고 하찮은 일 속에서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실천하는 것(下學)을 통하여 인륜의 극치로서의 성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이다.

스스로 학문 연마과정에서 이룩한 『임관정요』와 『하학지남』은 안정복의 초기 사상을 대변해주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전자는 뒷날 유형원의 『반계수록』의 영향과 이익의 견해로 보완되었지만, 중심 사상은 청년기의 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천주교를 반대한 보수적인 실학자
안정복은 18세기의 대내외적인 변화기에 살면서 전통적인 주자학의 실천적인 측면의 고양과 서구문물 가운데, 특히 천주교 배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73세에 벼슬길에서 물러난 후 안정복은 학자 본연의 생활로 돌아가 저술과 후진 양성에 전념했는데, 이 시기에 천주교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안정복은 일찍이 40대 중반에 스승 이익을 비롯하여 이익의 제자이자 천주교 신자인 권철신(權哲身, 1736~1801)에게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인 자신의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20여 년이 흐른 후 그의 나이 70대가 되었을 무렵, 천주교의 교세가 날로 확장되자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생은 현실 문제를 직시하는 성리학자로서 내세를 인정하는 천주교에 긍정적일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성리학적 명분론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성호 이익의 제자들, 즉 성호학파 문인들은 천주교의 수용 문제를 두고 두 노선으로 나뉘었는데, 천주교에 비판적이던 안정복 계열과 수용적 입장을 취한 권철신 계열이 바로 그것이다. 흔히 전자를 성호우파, 후자를 성호좌파라 한다.
안정복은 죽기 직전인 79세에 가선대부(종2품)에 가자(加資: 관원의 품계가 올라감)되고, 동지중추부사로서 광성군(廣成君)에 피봉되었으며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안정복의 역사상의 위치는 성리학의 전통이 내재적으로 발전되는 과정과 대외적인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세계관의 확대에 따른 근대 사상의 전개가 요구되는 과도기에 해당된다.


동사강목 [東史綱目]
​안정복이 1756년(영조 32)~1758년 사이에 초고를 완성하였고, 22년이 지난 1778년(정조 2) 67세에 비로소 완성한 고조선에서 고려 공양왕까지의 통사(通史)이다.

유형원의 『동사강목범례(東史綱目凡例)』를 효시로 하여, 이익의 조언으로 편찬된 역사서인 『동사강목』은 유형원→이익→안정복으로의 계보를 잇는 것이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안정복이 『반계수록』을 통해 이익을 찾았고, 이익을 통해 유형원을 더욱 자세하게 배운 결과이다. 따라서 이익을 통해 학문과 사상의 깊이와 폭을 더했고, 이에 자신의 학문은 더욱 견고해져 나름의 경험적인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동사강목』은 안정복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 책은 전 20권으로 엮고, 각 권을 상, 하로 분류해 기술하였다. 서술체제는 편년체이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체제에 따라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어, 강에서는 기본이 되는 사실을, 목에서는 그 기본 사실의 내용을 《수서(隋書)》, 《당서(唐書)》및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에서 모아 서술하였고, 그 아래에는 편자(編者)의 의견을 쓴 <안(按)>을 작은 글자로 기입하였다. 매 강에는 춘추(春秋)의 서술방식대로 년, 월을 앞에 표시하였으며 상단에는 중국의 연호(年號)와 년을 기재하였다. 또 목에는 지명, 인명 등을 고증한 작은 글씨의 주(注)를 기입하였다. 목은 강보다 한 자 낮추었고 <안>은 작은 글자로 구별하였다.
이 책은 《삼국사기》, 《고려사》, 《해동제국기》등 43종과 《사기》, 《한서》를 비롯한 중국서적 17종 등 광범위한 자료들을 참고, 비교, 검토하는 고증학적 연구방법을 사용하였고, 기왕에 연구된 한국사론을 모두 수렴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대표적인 역사서로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다.

[강의 후]
휴헌 선생은 18세기 조선의 안정복 선생이 왜 동사강목을 써야만 했으며 우리는 왜 이것을 읽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역사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신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을 통해서 과거의 역사서가 어떠한 것인가를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다.
또한 안정복 선생의 방대한 독서와 저술 활동에 놀람의 끝이 없다.

[출처] 실학에게 길을 묻다 - 4강 [안정복 동사강목東史綱目]|작성자 해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