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학에게 길을 묻다 - 3강 [이충환 택리지] 10시간 전 18세기! 아! 나는 조선인이다 - 휴헌 간호윤
오늘이 세 번째 강의이다. 강의를 하시는 휴헌 교수님은 지난주 두 번째 강의에서 취석실 우하영 선생을 통해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것을 알려주려 했으나 나는 그 의미를 제대로 찾았는지 잘 모르겠다. 오늘 세 번째 강의에서는 청담 이중환 선생 의 '택리지'를 통해 '역사란 무엇인가? ' 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어하신다. 휴헌 선생님의 강의는 진정성과 열의가 사막 아래 뜨거운 태양의 열기처럼 이글거리는 듯하다. 이런 강의를 하시는 휴헌 선생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런 강의를 놓치지 많고 듣고 있는 나는 지금 매우 행복하고 행운의 시긴을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이 과거의 역사가 되고 과거의 역사는 다시 오늘이 되어 우리가 지금 돌아보고 있다. 나의 오늘이 나의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시간이 아니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오늘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갖는다.
[휴헌 간호윤] 강의실이 도서관 지하에 위치해 있는데 입구에 책을 많이 읽자라는 뜻의 문구가 적힌 '닥치고 많이 읽기'라는 전단이 강의실로 향하는 길가 어딘가에 있었는가 보다. 연암 박지원 선생은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하는 마음으로' , 김택영 선생은 '천 근 쇠뇌를 쏘는 마음으로', 김지하 선생은 "차가운 감옥에서 수많은 날을 지새며' 쓰여진 책들인데, '어떻게 그것을 닥치고 읽기나 하란 말인가~!' 하며 많이 마음을 언짢아 하신다. 내가 무심코 읽어내려간 책들에는 이렇듯 글쓴이들의 처절한 고통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라는 뜻.
이중환[李重煥] 당쟁의 시련을 [택리지擇里志]의 저술로 승화시키다
“무릇 살 터를 잡는 데는 첫째 지리(地理)가 좋아야 하고, 다음 생리(生利: 그 땅에서 생산되는 이익)가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는 인심(人心)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은 아름다운 산수(山水)가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에서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그의 저술 [택리지(擇里志)]의 <복거총론(卜居總論)>에서 복거(卜居)의 조건으로 삼은 지리, 생리, 산수, 인심 네 가지를 지목한 것이다. 우리 국토를 두루 답사하면서 팔도의 자연과 환경, 인물을 세밀하게 정리하여 250여년 전 조선의 산천을 생생히 복원할 수 있게 한 학자 이중환.
이중환은 국토와 문화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우리 산천과 그곳을 살아갔던 인물들의 역사 및 당대 사람들의 정서까지 담아내고자 노력하였다.
[정치적으로 실세(失勢)한 남인(南人)의 삶] 조선 후기의 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의 본관은 경기도 여주(驪州)로, 호는 청담(淸潭), 청화산인(靑華山人) 또는 청화자(靑華子)이다. 이중환의 집안은 대대로 관직생활을 한 명문가로, 당색은 북인에서 전향한 남인에 속한다.
실학자로 명망이 높은 이익(李瀷, 1681~1763)은 이중환에게 재종조부(再從祖父)가 되지만 나이는 아홉 살 위였다. 선생은 일찍부터 이익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이익 또한 이중환의 시문(詩文)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익이 [택리지]의 서문과 발문(跋文), 그리고 이중환의 묘갈명까지 써 준 것에서 보듯 두 사람의 관계는 각별했다.
이익 또한 같은 남인인 목천건(睦天健, ?~?)의 딸을 후처로 맞아 사천 목씨 집안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사천 목씨와 혼맥을 형성한 것은 이중환이 당쟁에 깊이 연루되는 단서가 되게 된다.
1727년(영조3)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면서 이중환은 유배에서 풀려나지만 바로 그해에 사헌부의 논계(論啓)로 다시 절도(絶島)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영조의 즉위라는 정국의 전환기에 이중환은 당쟁의 후폭풍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던 것이다. 유배 후에도 이중환은 정치 참여를 포기할 만큼 당쟁의 상처는 컸다.
정치적으로 실세(失勢)한 남인(南人)의 삶, 이중환은 당쟁으로 인한 정치적 좌절 속에서 전국을 방랑했다. 30대 후반에 유배된 후부터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여 년 동안 전국을 방랑하는 불우한 신세였지만, 우리 산천의 모습을 정리하고 시대를 살아간 인물과 대화를 하며 아픔을 달랬다. 그리고 불후의 저술 [택리지]를 세상에 내놓았다.
[휴헌 간호윤: 사림(士林) - 남인(南人)에 대해서] 사림(士林)은 조선 중기에 성리학을 바탕으로 정치를 주도한 양반 지배층을 뜻한다. 조선 초기에 권력을 잡았던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했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사림파의 여러 세력들이 갈라져 붕당을 이루었다.
훈구파[勳舊派]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적극 참여해 공신의 칭호를 받은 사람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조선의 제7대 임금인 세조가 정변을 일으켜 임금이 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워 권세를 이어갔다. 반면 사림파는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켜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지방으로 내려간 사람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세조가 자신의 조카이자 제6대 임금인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이 된 것에도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림은 성리학을 사상의 기반으로 삼고 유교 경전을 중시했으며, 의리와 명분, 절개를 강조했다. 이들은 지방에 머물면서 소유한 토지를 경제적 기반으로 했고, 유향소라는 자치 기구를 통해 수령과 향리(지방의 하급 관리)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사림이 중앙의 정치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제9대 임금인 성종 때였다. 성종은 세조 때부터 중요 관직을 독차지하고 있던 훈구파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3사의 관리로 등용했다. 당시 사림파의 중심 인물은 김종직이었는데, 그는 고려에 절개를 지켜 경상도에 낙향했던 길재의 학풍을 이은 인물이었다.
이후 사림파와 훈구파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사림파는 훈구파의 공격으로 여러 차례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이를 사림이 당한 재앙(화)이라는 뜻에서 사화라고 한다.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중종 때의 기묘사화, 명종 때의 을사사화 등 대규모 사화만 4차례나 있었다. 그러나 사림은 제14대 임금인 선조 때 결국 권력을 잡고 성리학에 바탕을 둔 정치를 펼쳐 나갔다.
훈구파와의 경쟁에서 여러 차례 큰 피해를 당했는데도 결국 사림이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역적인 기반 덕분이었다. 사림은 지방에서 서원이나 향약을 중심으로 힘을 키웠으며, 훈구파를 견제하려는 임금의 뜻도 사림이 중앙 권력을 다시 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
사림은 자신이 공부한 학문의 계통에 따라 학맥을 형성했으며, 성리학의 해석과 이를 현실 사회에 적용하는 방안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그래서 권력을 차지한 이후 학맥이나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동인과 서인, 다시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등 여러 붕당으로 갈라졌다.
휴헌 교수님은 조선시대의 사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며 시야비야[是耶非耶]라는 말씀을 하신다.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는 천도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화를 받는 것을 天道(천도)라고 하는데, “역사상의 인물의 생애를 보건대 반드시 천도에 부합된 것은 아니다.”라고 그 모순을 한탄한 司馬遷(사마천)은 ≪史記(사기)≫에서 하늘을 원망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어진 이로 이름난 伯夷(백이) 叔齊(숙제)는 굶어 죽었고, 공자의 제자 중 으뜸인 顔回(안회)는 극빈 속에서 젊은 나이에 영양실조로 죽었다. 그러나 대악당 盜跖(도척)은 매일 죄 없는 백성을 죽여 그 살로 膾(회)를 치고 脯(포)를 세상에는 선을 행하여 화를 얻고 악을 행하여 복을 얻는 일이 있는데 그래도 ‘天道無親(천도무친)’, ‘天道不謟(천도부도)’라는 말을 믿어야 하는가?”
좋은 책을 읽어야 삶이 변한다는 의미로 발분저서[發憤著書]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발분저서[發憤著書]는 '억울한 일을 당해 마음이 자극되어 명작을 남긴다'는 이야기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사마천은 그가 흉노(匈奴)와의 전투에서 투항했던 어느 장수를 변호하다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는 사형 대신 거세형을 택했는데, 이는 유교 사회에서의 실질적인 목숨을 포기한 것이나 같다. 이 같은 절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기』를 완성했다. 사마천은 서문에서 서백(西伯)이 『주역(周易)』을, 공자가 『춘추(春秋)』를, 굴원은 「이소(離騷)」를, 그리고 좌구명(左丘明)이 『국어(國語)』를 지은 것 들은 모두 곤경을 딛고 일어선 결과라고 하여,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 공자는 발분망식[發憤忘食] 이라 하였다. 무엇을 할 때 끼니마저 잊고 힘쓴다는 뜻으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이다. 어느 날 초(楚)나라 섭현(葉縣)의 장관 심제량(沈諸梁)이 공자(孔子)의 제자 자로(子路:BC 543~BC 480)에게 “너의 스승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라고 물었다. 자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언뜻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결국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뒤 공자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자로에게 이르기를 “왜 학문에 발분하면 끼니도 잊고 도를 즐기며, 근심과 걱정을 잊으며, 늙음이 닥쳐오는 데에도 그런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라고 대답하지 않았느냐.”라고 하였다.
이는 문제를 발견하면 그것을 해결하는 데 열중하는 것을 말한다. 발분망식은 끼니를 잊을 정도로 학문에 몰두하는 것을 뜻하는데, 한 가지 일에 온 정신이 쏠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택리지擇里志]
[택리지擇里志]의 정확한 저술 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저자 자신이 쓴 발문에서 ‘내가 황산강(黃山江)가에 있으면서 여름날에 아무 할 일이 없어 팔괘정(八卦亭)에 올라 더위를 식히면서 우연히 논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말미에 신미년(1751년)이라고 기록하여 저자가 61세 되던 무렵에 정리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중환이 『택리지』를 저술한 것은 관직에서 물러난 사대부들이 살아갈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보자는데 목적이 있었다. 후일 정약용이 택리지의 발문에서 “국내 사대부들의 별장이나 농장에 대한 좋고 나쁜 점을 논한 것이다”라고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이중환은 이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곳은 인심과 산천이 좋고 경제적 교류도 좋은 곳이어야 하였다.
[택리지]는 크게 사민총론(四民總論), 팔도총론(八道總論), 복거총론(卜居總論), 총론(總論)의 네 분야로 나누어져 있다.
<사민총론> 이중환은 본 저술의 주요 목적이 실세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면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아보는 것>에 있다 하였다. 선생은 애초에 사대부는 업소 모두 백성이었다고 한다. 또한 순 임금이 임금이 되기 전에 농공상이었다며 백성의 표준이라고까지 한다. 결국 선생이 생각하는 사농공상이란 위가 생각하는 계급이 아닌 직업일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선생은 "농공상이 천한 신분이 된 것은 사대부란는 명호가 생기면서부터"라 한다. 하지만 선생은 사대부란 명호는 없어지지 않는다며 농공상 모두 사대부 행실을 닦자고 한다. 그러려면 예의가 필요한데 넉넉함(富)이 전제조건이라고 말한다. 인간으로서 생존할 수 있는 부가 있어야 예의가 있고 나아가 선비로서 행실을 닦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가정, 직업, 예의, 문호를 유지하기 위해 계책을 세우고 살 만한 곳을 찾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택리지]는 조선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사대부와 동일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는 의미라는 것이다.>
<팔도총론>에서는 우리 국토의 역사와 지리를 개관한 다음, 당시의 행정구역인 팔도의 산맥과 물의 흐름을 말하고, 관계있는 인물과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팔도의 서술 순서는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였다. 선생은 우리 국토의 시발을 중국 곤륜산으로부터 차ㅈ았다. 곤륜산 한 가닥이 남쪽으로 뻗어 만주에 있는 의무려산(醫無閭山)이 되었고 요동벌을 지나 다시 솟은 게 백두산이라 한다. 이 백두산 뒤쪽으로 달려 조선산맥(朝鮮山脈, 태백산맥)이라 한다.
<복거총론>에서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의 조건을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의 네 가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지리(地理): 교통이 발달한 곳과 같은 현대적 의미의 지리가 아니라 풍수학적인 지리를 의미한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서민과 사대부의 인심이나 풍속이 다른 점을 강조하고, 당쟁의 원인과 경과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는 한편 인심이 정상이 아님을 통탄하였다. 생리(生利): 즉 먹고사는 문제이니 경제지리학이다. 선생의 실학사상이 이곳에서도 엿보인다. 선생이 사대부일지라도 먹거사는 생업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다.
「다산시문집 권7」, 시 「귀전시초」에 보이는 시구는 이렇다.
그대는 택리지를 보았던가 君看擇里志 사는 도리를 가장 아름답게 말했지 生理最稱佳
인심(人心): 선생은 조선 팔도를 돌아다녔다. 이른바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는 지리인성학이다. 여기서 선생이 강조하는 것은 서민과 사대부의 인심이나 풍속이 다른 점과 당쟁의 원인 및 경과였다. 사대부와 당파성으로 이님이 정상이 아님을 통탄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생이 말하는 인심이 좋은 곳은 어디일까? 결국, 선생이 말하는 인심이 좋고 좋지 못함은 사대부가 없는 땅이면 따질 게 없다는 말이요, 인심 또한 농공상이 되어 즐거움이 있으면 논할 게 못 된다는 의미이다. 산수(山水): 선생은 전라도와 평안도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백두산부터 시작하여 태백산맥 과 소백산맥, 수계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선생이 말하는 살만한 곳으로는 '근처에 아름다운 산수가 없으면 호연지기를 기르고 마음을 너그럽게 펼 곳이 없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시냇가 근처다.
[택리지]에 반영된 이중환의 사상
[택리지] 이전의 지리책은 각 군현별로 연혁, 성씨, 풍속, 형승, 산천, 토산, 역원, 능묘 등으로 나누어 백과사전식으로 서술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택리지]는 전국을 실지로 답사하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지리적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자신의 관찰을 토대로 한 설명과 서술에 힘을 기울였다. 또 단순히 지역이나 산물에 대한 서술에 그치지 않고 사대부가 살 만한 이상향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선생은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과 이용에 대하여 자세한 관찰을 하고 있다. 또한 실생활에 이용될 수 있는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한 면에서 종전의 지리지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선생은 풍속이 아름답고 인정이 넘치는 곳을 강조하면서도 당쟁의 폐해에 따른 인심의 타락상을 경고하였다. 흔히 영조시대는 탕평책의 시행으로 당쟁이 어느 정도 종식된 것으로 이해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특히 선생은 전형적인 남인 학자로 영조대 노론 중심의 정치운영에서는 철저히 소외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고, [택리지]에서는 당쟁에 대해 부정적인 그의 시국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택리지]가 완성되자 여러 학자들이 서문과 발문을 썼으며, 많은 사람들이 베껴서 읽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책의 제목이 [팔역지(八域志)], [팔역가거지(八域可居志)], [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 [진유승람(震維勝覽)], [동국총화록(東國總貨錄)], [형가요람(形家要覽)] 등 10여 종이나 있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택리지]를 필사하면서 제목을 자신의 취향대로 붙인 것이다.
[택리지]가 저술된 18세기 조선사회는 사회경제적 성장과 함께 국학 연구 분야에도 큰 발전이 있었던 시기였다. 사대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금강산 등 우리나라 산천을 여행하는 붐이 일고, 각종 기행문이 기록되었다.
[휴헌 간호윤] 이중환 선생의 가문은 사대부였기에 파당으로 몰렸고 그렇기에 삶을 불운하게 마쳤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산 선생에게는 행복이야말로 일생의 가장 큰 소망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상실된 일상의 쉼표들을 조국 땅에서 찾았다. [택리지]의 총론에서 다시금 사대부란 사실을 서글피 적바림한다. 이것이 선생이 [택리지]라는 책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만첩 푸른 산과 천첩 푸른 물"이 있는 곳을 찾아 가고 싶지만 갈 수 없어 이 책을 썼다고 보아야 한다. 당동벌이(黨同伐異, 일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고 뜻이 같은 무리끼리는 서로 돕고 그렇지 않은 무리는 배척한다는 말)만으로 정치를 하는 이 시대 정치인들이 새겨 일어야 할 책이라 하겠다.
교수님은 매 번 강의 끝 무렵에 읽어보아야 할 책을 추천하거나 모두가 생각해보아야 할 질문을 던진다. <정의란 무엇인가> - 마이클 샌델 교수 <인문지리환경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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