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휴헌점묘(休休軒點描)

2010. 2. 21. 17:11한문학자료/휴휴헌 사랑(방문객들 글쓰기)

휴휴헌점묘(休休軒點描)

여름이 한창입니다.

아침부터 매미 소리도 제법입니다.

집에서 나와 서재 휴휴헌으로 걸음을 재촉합니다.

열 평 살짝 넘어서는 나만의 공간. 디아뜨갤러리, B동 320호. 문을 열고 들어서면 대 여섯 걸음 저 맞은편 벽면이 모두 창입니다. 공간은 작지만 방은 둘입니다. 우측방부터 들어섭니다. 가로 세로 2m인 정사각형 공간입니다. 내가 주로 앉아있는 곳이지요. 방의 3/2를 차고앉은 녀석은 이 방의 최고참, 책상입니다. 이 녀석과 만난 지는 근 20여년이 다되어 갑니다. 내 삶을 고스란히 보아왔지요. 논문도, 그렇다고 잡문도 아닌, 열대여섯 권의 내 얼치기 책들도 모두 녀석의 위에서 나왔으니, 나에겐 보물인 셈입니다. 녀석과 함께 온 의자는 몇 번이고 손을 봤습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소리를 내지만 아직은 잘 버팁니다.

책상 위에는 독서대, 스탠드, 컴퓨터와 조부가 쓰던 개다리소반이 있습니다. 개다리소반 위엔 시계, 연필꽂이, 포스트잇, 아이스크림 대로 만든 첨서(簽書), 잉크통, 그리고 노안을 책임지는 각각 다른 용도의 안경 세 개가 가지런히 놓였습니다. 개다리소반은 조부의 약주상이었지요. 조부의 약주상이 내 책상에서 저렇게 쓰일 줄은 생전에 당신도 나도 몰랐습니다. 개다리소반 아래에는 글항아리가 놓여있고, 그 옆엔 디스켓 몇 장이 있습니다. 장사익 선생의 ‘사람이 그리워서’와 제자 아이가 사 준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 연주집’이라는 디스켓이 보입니다. 글항아리라 부르는 메모함은 대학교 은사이신 고 김기현 교수님께서 쓰시던 것입니다. 글이 나아가지 않을 때, 이 글항아리는 늘 나에게 도움을 줍니다.

책상은 창가로 나있습니다. 창가라야 앉아 창 밖 하늘을 보면 꼭 손수건 반 장 접어놓은 크기입니다만. 창 아래에는 이 동(棟) 유일의 조금 넓은 빈터입니다. 그래도 저 하늘을 보려고 책상을 굳이 이 좁은 방으로 끌고 들어 온 것입니다. 책상 좌측으로는 내 키에서 열 뼘쯤 높이 되는 책장이 있습니다. 책장이라지만 모교에 출강할 때, 한두 개씩 사 모은 책꽃이를 쌓아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주로 수업교재와 저서에 관계되는 자료가 꽂혀 있습니다. 책상 뒤엔 버린 식탁을 갖다 놓았습니다. 식탁의 용도는 수시로 본 책을 잠시 놓아두는 두는데 쓰입니다. 지금은 이 책을 만드는 관계 서적이 쌓여 있습니다.

작은 방을 나와 우측으로 두 발짝 반만 떼놓으면 좀 넓은 공간입니다. 6명이 앉을 수 있는 기름한 식탁을 갖다 놓았습니다. 휴휴헌을 방문한 분들은 모두 이곳에 앉아 차 한 잔을 합니다. 오른 쪽엔 짧고 조금은 긴 두 개의 벽면이 보입니다. 작은 벽면은 한 걸음쯤 됩니다. 할머니께서 당시에 쌀 열가마인가를 내 놓고 들여 놓았다가 집안에 사단이 났던 다이얼 재봉틀 다리가 보입니다. 할머니는 나의 첫여인이었습니다. 가여운 그녀의 삶은 온통 이 손자를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내가 굳이 재봉틀 다리를 서재에 갖다 놓은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이 재봉틀 다리 위엔 조그마한 TV를 소품으로 놓았고, 그 위에 벗 청하 선생이 개인전에 전시하였던 ‘신독(愼獨)’이라 쓴 1m쯤 되는 액자가 가로 걸려있습니다. 청하 선생의 글은 순박함 속에 뚱한 힘이 들어앉았습니다. 나는 이런 순박한 글이 좋습니다. 넉넉할 때, 글 값을 지불한다고 염치없이 갖다 놓았는데-, 그때가 올지 모르겠기에, 글씨에 대고 예의를 표합니다. ‘신독’은 내 삶의 표지입니다.

좀 긴 벽면 전체엔 책꽃이를 쌓아 천정까지 올렸습니다. 연암선생 책과 전공서적들이 보입니다. 연암 선생은 참 좋은 분이라 생각합니다. 평생의 화두로 삼고 싶습니다. 책꽃이가 끝나면 벽 한 면 전체가 창입니다. 문 열면 바로 보인 곳입니다.

창 좌측 벽면 책꽃이에는 전공 이외 책들이 보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요즈음은 이쪽 책들을 많이 봅니다. 솔직히 전공책보다 도움을 더 얻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커피도 마시고, 글도 쓰고, 책도 읽으며, 수업준비도 하고, 때로는 뒹굴며 하루를 보냅니다. 그래 내 스승이신 중산 선생님께 ‘휴휴헌(休休軒)’이란 당호도 지어 받았습니다.

가끔씩 내 서재를 찾는 이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아, 생각 밖으로 조용하네요.”

이곳이 위성도시기는 하지마는 번잡한 도심에 있는 오피스텔이라 하는 말일 겝니다. 빌딩의 바로 앞으로는 대로가 지나고, 뒤로는 커다란 백화점이 위세 좋게 서있지마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외진 절간 같습니다.

이유인 즉은, 내 방은 건물의 끝에 위치하고 옆 건물을 사이에 두고 빈터가 있어서입니다. 공지를 보려고 내 책상을 굳이 작은 방으로 한 것입니다. 그리 넓지는 않으나 넉넉하니 자동차 30여 대는 주차시킬 수 있는 빈터입니다. 비록 땅은 자동차가 차지하고 있지마는, 빈터의 하늘은 늘 내 공간이었습니다. 내 책상에 앉아 보이는 손수건 반 장이기도 하지만, 눈이 오거나 비라도 올라치면 커피 한 잔 들고 빈터를 바라보는 맛이 제법입니다. 여름철엔 문만 열어 놓으면 빈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선풍기 없이도 견딜만하고, 겨울철엔 눈 내리는 풍경 또한 보통은 넘습니다.   

그런데 두어 달 전부터 이 빈터에 둘레 막이 쳐지고,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오가더니만, 드디어 엊그제부터 터파기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연일 트럭이 오가고, 집채만한 크레인에, 착암기 소리와 인부들의 고함소리까지 들려옵니다.

요절한 천재 이상李箱의 <조춘점묘(早春點描)>라는 수필이 있습니다. 조춘점묘란, ‘이른 봄에 도회의 풍경을 보며 생각한 것을 그린 것’ 쯤으로 해석됩니다. ‘조춘’은 ‘이른 봄’이고 ‘점묘’는 ‘사물 전체를 그리지 않고 어느 부분만을 따로 떼어서 그림’이란 뜻입니다. 내용은 팍팍한 도회에서 빈터를 발견하고 기뻐하였으나, 알고 보니 이윤을 기다리고 있는 보험회사의 용지라는 것. 그래 결국 빈터는 가난한 자기 방에 놓은 화분 속의 공간밖에 없다는 내용입니다. 

이제 창문을 닫아걸어야겠습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서너 해씩이나 제멋대로 썼으니 고까울 것이 없지마는 왠지 마음이 허허하니 여간 섭섭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이상의 화분보다야 휴휴헌이 훨씬 넓으니, <조춘점묘>나 읽으며 빈터를 잃은 마음을 서둘러 달래 봅니다.

 

휴휴헌에서 간호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