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버리고 밝음에 투항한 장부의 뜻, 문무를 겸비한 영웅의 재주(하)

2008. 7. 27. 18:49포스트 저서/독도를 생각하며

 

13, 어둠을 버리고 밝음에 투항한 장부의 뜻, 문무를 겸비한 영웅의 재주(하)

 十三, 棄暗投明丈夫志, 能文兼武英雄才(下)

 其 期日에 至하야 忠善이 自己의 領率한 바 千軍을 帶 하고 應瑞의 軍門에 至하니 此時 應瑞는 十里 郊外에 出하야 忠善을 迎接하얏더라 忠善이 應瑞에게 鞠躬致禮하며 曰 小將이 비록 才가 菲하고 術이 疎하나 貴國에 歸化할 心은 一朝一夕에셔 起한 것이 아니라 此가 徃日부터 宿志하며 熟計이라 今에 暗을 棄하고 明에 投코져 하오니 幸히 遐棄치 말고 我로써 軍伍에 編하면 願컨대 犬馬의 勞를 郊하겟노라 應瑞가 大喜하여 手를 執하고 歸하야 上座에 置하고 優禮로써 待한 後에 더부러 籌策을 劃할  其 一謀一算이 無非敵을 殲滅할 秘計이러라 忠善이 本來 砲鳥銃의 制에 熟達하얏는대 是에 至하야 多數히 製造하고 又 摩下의 善鑄하는 者를 各 陣에 遣하야 其 法을 敎習하니 我國에 비로소 鑄銃搗藥의 術이 盛行하얏더라 上이 此를 聞하시고 忠善을 命召하야 禁庭에 至하야 武藝를 試하시고 大히 稱賞하 曰 古의 良將의 風이 有하도다 하시고 直히 嘉善大父를 超拜하엿더라 時에 淸正이 東萊와 機張을 陷하고 直히 山으로 走하고 甑城에 屯하거늘 忠善이 應瑞로 더부러 兵을 進하야 包圍하 忠善의 部下 慓卒이 모다 炮劒奇材라 向하는 바에 披靡치 안는 者이 無함으로 遂히 敵軍을 大破하얏더니 居無何에 敵이 又 大至하야 甑城에 據하고 耀武奮滅하야 我軍을 恐嚇하거늘 忠善이 奮勇先登하야 膞戰 大破하니 敵이 드대여 甲을 棄하고 兵을 曳하야 走하는 지라 忠善이 逐北하야 敵軍을 大殺함 積屍는 如山하고 血流는 渠를 成하얏더라 㨗報가 馳至함 上이 大喜하사 其 名을 賜하야 褒하시고 又 厚賞으로 其 功을 揚하시니 忠善이 疏를 上하야 恩을 謝하고 軍務에 服한지라 七年 間에 戰하면 문득 奇功이 有하야 一次도 敗績한 事가 無하얏스나 일즉이 其 功을 伐하며 其 能을 誇치 아니 하얏더라

 其 後 國難을 靖한 後에 退하야 大邱 三聖山下 友鹿村에 卜居하고 婦를 娶하야 子를 生함 名利의 慾이 無하야 오즉 山水를 娛하고 遊獵을 喜하야 此로써 身을 終할 計를 作하얏더니 其 後에 北虜가 屢次 侵軼하야 邊疆의 患이 日急함을 聞하고 이에 慨然히 蹶起하야 䟽를 上하야 스사로 大將이 되야 患을 掃除하기를 自願함 朝廷에셔 此를 許하니 忠善이 更히 弓戈의 勞를 執한지 十年에 邊患이 稍熄한 後에 始還하니라 朝廷에셔 其 功을 賞하야 正憲大夫의 秩로 昇進하얏더라 其 後 李适이 反逆을 謀하다가 誅에 伐1)함 副將 徐牙之는 元 日本人이라 适의 將이 되야 饒勇이 無雙하야 馳驅跳踉함 人이 敢이 其 前에 逼치 못하얏는대 忠善이 釖을 提하고 踴躍一出하야 立斬하고 首를 獻하니 朝廷에셔 牙之의 臧獲及田宅으로써 忠善에게 賜하야 其 功을 酬하얏더라 其 後 仁祖 丙子에 淸兵이 大至함 朝野가 震動하니 此時에 忠善이 비록 年老하얏스나 忠勇은 前日보다 衰치 아니한지라 晝夜兼程하야 京城에 上하니 車駕는 旣히 南漢山城으로 播遷한지라 直히 雙嶺에 抵하야 淸兵을 迎擊함 勇力이 倍加하니 敵軍이 大亂하야 各自 逃散하는지라 進擊大破하야 數千餘級을 斬하고 戰帒를 用하야 賊의 鼻數千箇를 割하야 此에 盛하고 將次 行在에 獻할셰 南漢에 至하야 和議가 已成함을 聞하고 忠善이 이에 鼻帒를 地에 擲하고 憤恚 大哭하야 曰 堂堂히 禮義의 邦으로써 彼와 如한 醜虜에게 屈하려 하니 春秋尊攘의 義가 何에 在하고 我의 一釖이 足히 百萬의 師를 當할 것인대 今에 至하야 將次 安用하리오 하고 곳 釖을 投하야 慷慨不已2)하다가 麗里村으로 歸하야 慕華紀를 著하야 其 志를 述하고 又 家訓과 鄕約 等 書를 述하얏더라 一時 忠義名士의 李德馨, 李廷馣, 金命元, 李時發, 金誠一, 郭在佑3), 李舜臣, 金德齡, 鄭徹4) 等 諸人이 모다 敬重致禮를 爲하고 國人이 모다 其 風儀를 想慕치 안은 者가 無하니라



<번역문>

그 약속한 날이 되자 충선이 자기가 거느리고 온 삼 천 명의 군사를 대동하고 응서의 군영에 이르렀다. 이때 응서는 십 리 교외에 나가 충선을 영접하였다. 충선이 응서에게 존경의 뜻으로 몸을 굽히고 예를 다하여 행하며 말하였다.

“소장이 비록 재주가 보잘 것 없고 지략이 서투르나 귀국에 귀화할 마음은 일조일석에 일어난 것이 아니오이다. 이것은 저 지난날부터 일찍이 품은 뜻이며 오래 묵힌 계획이었습니다. 이제 어리석음을 버리고 밝음에 투항하고자 하오니 다행히 내치지 말고 우리들을 군대의 편제에 넣어두면 원컨대 보잘것없는 힘이나마 충성을 끝까지 다하겠소이다.”

응서가 크게 기뻐하고 손을 잡고 돌아와 상좌에 앉히고 특별히 예로써 대한 후에 함께 이리저리 계산한 끝에 생각한 꾀를 나눌 때 그 한 가지를 꾀하고 계산하여 적을 섬멸할 비밀한 계획이 아닌 것이 없었다.

충선이 본래 대포와 조총을 만드는 방법에 숙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아주 많이 제조하였다. 또 휘하의 쇠를 잘 다루는 자를 각 진영에 보내어 그 방법을 가르쳐서 익히게 하니 우리나라에 비로소 쇠로 만든 총과 탄약을 만드는 기술이 성행하게 되었다.

임금이 이를 들으시고 충선을 명을 내려 부르셨다. 궁중에 도착하니 무예를 시험하고는 크게 칭찬하시며 상을 내리며 말했다.

“옛 훌륭한 장수의 기풍이 있도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곧장 가선대부(嘉善大父)4)를 내리니, 정한 등급을 뛰어서 벼슬을 내린 것이었다.

이때에 청정이 동래(東萊)4)와 기장(機張)4)을 함락시키고 곧바로 산으로 달아나 증성(甑城)4)에 주둔하였다. 충선이 응서와 더불어 군사를 데리고 나아가 성을 포위하였다.

충선의 부하는 날랜 군사들로 모두 화포와 검술에는 기이한 재주를 지닌 자들이었으니, 가는 곳마다 나무나 풀이 바람에 쓰러지듯 굴복치 않는 자가 없었다. 마침내 적군을 대파하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이 또 크게 이르러 증성에 거하고 빛나는 무예로 떨쳐 없애려고 우리 군대를 위협하였다.

충선이 용감히 떨쳐 일어나 맨 먼저 적의 성으로 지쳐 들어가 좌충우돌 싸워 대파하니, 적이 드디어 갑옷을 버리고 병장기를 끌고선 달아났다. 충선이 쫓겨 달아나는 적군을 크게 무찌르니 쌓인 시체가 산과 같고 흐르는 피가 도랑을 이루었다. 이러한 첩보가 달려 서울에 이르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그 이름을 하사하여 포상하시고, 또 후히 상을 내려 그 공로를 드날리시었다. 충선은 소를 올려 은혜에 감사하고 군대의 업무에 복귀하였다.

칠년 사이에 전쟁터에 나가면 문득 기이한 공이 있어 한 번도 싸움에 진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일찍이 그 공을 뽐내고 자기의 능력을 뻐기지 않았다.

 그 뒤에 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한 후에 물러나 대구 삼성산(三聖山)4) 아래 우록(友鹿) 마을에 살 곳을 정하였다. 그리고 아내를 얻어 자식을 낳고 명리(名利)에 욕심이 없어 오직 산수를 즐기고 사냥을 즐기면서 이로써 생을 마칠 계획을 꾀하였다.

그 후에 북쪽 오랑캐가 여러 차례 침범하여 들어와 변경의 근심이 날로 급함을 듣고 이에 개연히 굳게 마음을 다져먹고 떨쳐 일어나 소를 올려 스스로 대장이 되어 근심덩이를 쓸어 없애기를 자원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니 충선이 다시 활과 칼을 힘써 잡은 지 십 년이 지나 변방의 근심이 점점 잦아진 뒤에야 비로소 돌아왔다.

조정에서 그 공을 칭찬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4)의 벼슬로 승진하였다.

그 후 이괄(李适,1587~1624)4)이 반역을 꾀하다가 죄인으로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의 부장 서아지(徐牙之)는 원래 일본인이라 이괄의 장수가 되어 용맹이 무쌍하여 말을 타고 달려 뛰면 사람이 감히 그 앞에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충선이 창을 꼬나 잡고 뛰어올라 한 번 출병하여 서서 베고 머리를 바치니 조정에서 아지의 노비와 논밭과 집을 충선에게 하사하여 그 공을 갚으려하였다.

그 후 인조 병자(丙子,1636년)에 청나라 군일이 크게 닥침에 조정과 민간이 몹시 흔들렸다. 이때에 충선이 비록 연로하였으나 충성스럽고 용맹함은 전일보다 쇠하지 않은지라. 밤낮으로 길을 더하여 서울에 올라가니 임금의 수레는 이미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도성(都城)을 떠나 피란하였다. 곧장 쌍령(雙嶺)4)에 이르러 청병을 맞아 싸움에 용력이 갑절은 더하니 적군이 크게 어지러워 각자 도망하여 흩어지니, 진격하여 대파하여 수천여 명의 머리를 베고 싸움용 자루를 이용하여 적의 코 수천 개를 베어 꽉 채웠다. 장차 임시로 임금이 거처하는 곳에 바치려 하였다.

남한산성에 이르러 청나라와 화해하는 의론이 이미 이루어 진 것을 듣고 충선이 이에 코를 담은 자루를 땅에 던지고 분하고 성나서 크게 곡을 하여 말하였다.

“당당한 예의의 나라로서 저와 같은 추한 오랑캐에게 굴복하려 하니 춘추존양(春秋尊攘)의 의리4)가 어디에 있는가. 나의 한 창이 족히 백만의 군사를 할 것인데 지금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디에 사용하리오.”

그리고 곧 창을 던지고 의기가 복받치어 원통하고 슬퍼함을 이기지 못하다가 마을로 돌아와 『모화기(慕華紀)』를 저술하여 그 뜻을 기술하고 또 가훈과 향약 등 글을 기술하였다.

한때 충성과 절의로 이름 높은 이덕형(李德馨), 이정암(李廷馣), 김명원(金命元), 이시발(李時發), 김성일(金誠一), 곽재우(郭再祐, 1552~1617)4), 이순신(李舜臣), 김덕령(金德齡), 정철(鄭澈,1536~1593)4) 등 여러 사람이 모두 매우 공경을 하고 예를 다하여 나라 사람이 모두 그 풍모와 위의를 사모하여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4) 조선시대 종친, 의빈, 문무관의 종2품 품계.

5) 지금의 부산시 동래구의 지명.

6) 지금의 부산시 기장군의 지명.

7) 지금의 울산광역시의 남동쪽을 흐르는 태화강(太和江) 어귀의 삼각주에 있는 해발고도 50m의 학성산 정상부 대지상에 있는 성. 울산 학성(蔚山鶴城), 시루성이라고도 한다. 정유재란 당시 남해안까지 패퇴한 왜군이 방위선을 구축하기 위하여 축성한 것으로,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헐어 충당한 것이었다. 이 성을 근거로 1597년(선조 30) 12월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은 조·명 연합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8)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에 있는 산. 이 산 아래 우록마을에서 김충선의 후손이 지금까지 살고 있다.

9) 조선 때 문무관의 품계로 후에 종친. 의빈의 품계와 병행.

10) 본관은 고성. 자는 백규(白圭).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을 왕으로 세웠으나 다음날 장만 등의 관군에게 파주 길마재에서 크게 패하여 광주·이천으로 후퇴하던 중 부하 장수 이수백(李守白)·기익헌(奇翼獻) 등에게 죽음을 당했다.

11) 지금의 경기도 광주의 한 지명.

12) 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의리.

13) 본관 현풍(玄風). 자 계수(季綏). 호 망우당(忘憂堂). 시호 충익(忠翼). 의령(宜寧) 출생. 1585년(선조 18)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파방(罷榜)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의(紅衣)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도 불렸다. 말년에는 창암(蒼巖)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둔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는 『망우집』이 있다.

14)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칩암거사(蟄菴居士).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성품 탓에 동서 붕당정치의 와중에 동인으로부터 간신이라는 평까지 들었다. 정치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여 국문시가를 많이 남겼다.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성산별곡〉 및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가의 질적·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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