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를 생각하며/ 항왜 김충선

2008. 7. 23. 21:25포스트 저서/독도를 생각하며

 

독도를 생각하며


우리나라에 관한한 일본은 참 못된 나라입니다.

일본이 독도를 제 것이라고 버젓이 교과서에 올린답니다. 그렇잖아도 이웃한 나라 살림이 어려운판인데, 참 무람없는 짓을 해댑니다.

지금으로부터 416년 전, 그때도 그랬습니다. 그런 일본의 몹쓸 짓을 온몸으로 막아 보려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조국이면서도 일본을 등진 사내, 그가 1592년 임진왜란 때 조선에 투항하여 선조에게 ‘사성김해김씨’를 제수 받은 사야가, 아니 김충선입니다. 우리나라의 조총기술은 그때 이 김충선에게서 전수받은 것입니다. 지금도 대구 우록마을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습니다. 저 일본의 정치인들, 어둠을 버리고 밝음에 투항한 선조에게 부끄러움을 느꼈으면 합니다.

제 책 <기인기사>(푸른역사, 2008)에 그 대략이 실려 있지만, 여기서는 <기인기사록> 원본과 해석을 2회에 걸쳐 게재하겠습니다.

(혹 이용을 하시는 분들은 반드시 아래 원본이 ‘송순기 저, <기인기사록>하, 1923, 문창사(간호윤 소장)’소재 ‘十三, 棄暗投明丈夫志, 能文兼武英雄才’라는 점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2008년 7월 23일

간호윤 

 

十三, 棄暗投明丈夫志, 能文兼武英雄才(上)

過去의 朝鮮은 元來東方禮義의 邦으로 稱하야 禮樂文物이 燦然히 具備하얏스며 人倫은 上에 明하고 敎化는 下에 行하야 風俗의 美가 中華에 侔擬함으로 朝鮮을 稱하야 小中華라하얏다함은 旣히 先賢의 正評이 有하얏도다 如斯히 誇耀할만한 禮敎의 俗은 他國人이라도 宜히 悅慕하야 化에 歸하는 것은 足히 괴이할 바ㅣ가 안이나 人의 善한 것을 慕하고 義에 歸하야 其 本을 忘한 者는 金忠善이 其人인져 金忠善은 本來 日本人으로 宣祖 壬辰에 歸化한 人이니 元名은 沙也可이며 號는 慕華堂이니 朝鮮을 慕한다하야 其 號를 爲함이라 幼時로보터 聰明多才하며 倜儻不羈 博學多才하야 文章이 大就하얏스나 日로 聖賢의 書를 讀 하기를 喜하야 又 勇力이 人에 過하고 智謀 淵深하야 能文能武의 兩全의 才를 有하얏더라 朝鮮과 封疆이 各殊하고 言語가 不通하나 常히 朝鮮의 禮敎의 國임을 聞하고 心에 欣慕하는 心이 弛치 아니하얏더라

宣祖 壬辰 關白 豊臣秀吉이 加藤淸正과 平行長 等으로 大將을 拜하야 三十萬의 大軍을 提하고 來功할 셰 舳艫가 海를 蔽하고 旌旗가 千里에 亘하얏더라 淸正이 平素부터 忠善을 甚愛하얏는 此時에 淸正을 隨하야 軍에 從하니 時年이 二十二라 慷慨하야 人다려 謂하되 元來 朝鮮이 禮義로써 名이 有하야 世人이 小中華라 稱하는 國이어늘 今에 無名의 師를 興하야 徒히 隣國을 禍코져하나 我가 寧死할지언정 從軍치 아니하리라하고 確1)然이 自斷한 바 有하다가 旣已오 心에 悟한바ㅣ 有하야 曰 我가 一次 朝鮮에 出하야 禮樂文物을 觀하는 것이 卽 我의 願이라 하고 軍을 領하고 朝鮮에 先到하야 釜山에셔 下陸한 後에 비로소 文物衣冠을 見 하고 이에 大喜하야 曰 今日에 我가 得所하얏도다 엇지 此와 如한 禮義의 民 에게 兵을 加하리오 하고 卽時 文을 爲하야 一般 民衆에게 諭告하되 余가 朝鮮을 素慕하야 爾 國을 攻伐할 意가 無하고 又 爾等을 侵暴할 意가 無하니 或 爾等은 各히 安堵樂業하고 或 走匿하야 我兵을 피하지 말지어다 我兵이 萬一 汝等에게 一人이라도 殘害하는 者이 有 하면 此를 斬하야 汝等에게 謝하리라 하얏는 諭告文이 一般에게 頒布되 人民이 其 令을 信하야 耕하는 者가 野에셔 撤치 아니하며 商하는 者가 變치 아니하얏더라 是時에 忠善이 歸順할 心이 日로 益切하야 먼져 密使를 慶尙兵使 金應瑞에게 移하야 來附를 約하야 曰 余가 夙히 貴國을 欽慕하야 草莽의 氓이 되고져한 지 已久하얏스나 尙今지 其 機會를 得치 못하얏더니 今에 軍을 鎭하고 貴國의 境을 踏하야 貴國의 文物制度를 觀코 歸化할 心이 湧함과 如한지라 謹히 部下 三千人을 率하고 軍門에 投하야 向日의 微忱을 盡하야 尺寸의 功을 建코져하오니 幸히 遐棄치 말기를 望한다하얏거늘 應瑞가 書를 得하고 中心에 甚喜하야 其來使를 厚待하고 卽時 回書를 裁하야 馳送하니 部下諸將이 一齊히 帳에 入하야 諫止하되 彼敵人이 元來 奸譎多詐하거늘 엇지 一片의 書를 接하고 此를 輕信하야 彼 奸計에 墮코져 하나잇가 應書曰 그 書意의 懇篤함을 見하건대 其 眞意에셔 出함이 無疑하고 決코 邪를 挾함이 아니라 古人의 言에 自信者는 不疑人이라하얏스니 人이 誠心으로 我에 附할진대 我도 한 誠心으로 納치 아니하면 不可하다하고 諸將의 諫하는 言을 納치 아니하니 諸將은 各自 疑惑이 未定하야 尙히 其 不可함을 力說하는 者가 多하얏는대 應瑞는 尙히 聽치 아니하고 更히 書를 致하야 時日을 約하야 出迎할 準備를 爲하얏더라

 

<번역문>

 

13, 어둠을 버리고 밝음에 투항한 장부의 뜻, 문무를 겸비한 영웅의 재주(상)1)

과거의 조선은 원래 동방예의의 나라로 불리었다.

예악(禮樂) 과 문물(文物)이 찬연히 구비하였으며 인륜은 위에 밝고 교화는 아래로 행하여 풍속의 아름다움이 중화에 거의 흡사함으로 조선을 칭하여 소중화(小中華)라 하였다.2)

이러한 것은 이미 선현의 정평이 있었다. 이와 같이 자랑하여 빛나게 할만한 예의(禮儀)에 관한 가르침의 풍속은 다른 나라 사람이라도 마땅히 기쁘게 여기어 사모하야 국적을 얻어 그 나라의 국민이 되는 일은 족히 괴이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선한 것을 사모하고 의에 귀하야 그 근본을 잊은 자는 김충선(金忠善, 1571∼1642)3)이 그 사람이다.

 김충선은 본래 일본사람으로 선조(宣祖) 임진(壬辰)4)에 우리나라에 귀화한 사람이니 원래 이름은 사야가(沙也可)이며 호는 모화당(慕華堂)이니 조선을 사모한다하여 그 호를 지은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많았으며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서 남에게 얽매이거나 굽히지 않았으며 박학다재(博學多才)하여 문장이 크게 성취하였다. 날마다 성현의 글 읽기를 즐겼으며 또 용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슬기 있는 꾀가 매우 깊어 문무(文武)의 모든 재주가 있었다. 조선과 영토가 각기 다르고 언어가 불통하나 일찍이 조선이 예교(禮敎)의 나라임을 듣고 마음에 흔연히 사모하는 생각이 느즈러지지 않았었다.

선조 임진년에 관백(關白)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가등청정(加藤淸正)5)과 평행장(平行長)6) 등으로 대장을 제수하여 삼십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침공할 때 뱃머리와 꼬리가 서로 잇달아 바다를 덮고 군대의 깃발이 천리에 걸쳐 있었다. 청정이 평소부터 충선을 매우 아끼었는데 이때에 청정을 따라 군에 들어오니 그때 나이가 22세였다. 강개하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원래 조선이 예의로써 이름이 있어 세상 사람이 소중화라 칭하는 나라이거늘. 이제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켜 이웃 나라를 해치려하니 나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종군치 아니하리라.”

그리고 확실히 스스로 딱 잘라 결정을 한 바가 있었다. 그러다가 앞서 마음에 깨달은 것이 있어 말하였다.

“내가 한 번 조선에 나아가 예악문물을 보는 것이 곧 나의 원이라.”

그리고 군대를 거느리고 조선에 남보다 먼저 도착하여 부산에서 뭍으로 내린 뒤에 비로소 문물과 의관을 보고 이에 크게 기뻐하여 말하였다.

“오늘에야 내가 알맞은 자리를 얻었도다. 어찌 이와 같은 예의의 백성에게 병장기를 쓰리오.”

 즉시 글을 지어 일반 백성들에게 알렸다.


“내가 조선을 본래부터 사모하여 당신네 나라를 공격하여 정벌할 뜻이 없고 또 그대들을 침범할 마음이 없다. 그대들은 각자 마음을 놓고 즐겨 생업에 종사하고, 혹 달아나 숨어 우리 병사를 피하지 말지어다. 우리 병사들이 만일 그대들에게 한 사람이라도 잔인하게 굴고 물건을 파괴하는 자가 있으면 이 자를 목 베어 그대들에게 사죄하리라.”


이 유고문(諭告文)이 일반에게 널리 알리니 사람들이 그 영(令)을 믿어 밭을 가는 자는 쟁기를 걷어치우지 않고 장사하는 자도 달라지지 아니하였더라. 이때에 충선이 귀순할 마음이 날로 더욱 간절하여 먼저 밀사(密使)를 경상병사(慶尙兵使) 김응서(金應瑞)에게 보내어 와서 항복할 것을 약속하여 말했다.


“내가 일찍이 귀국을 흠모하여 초야의 백성이 되고자한 지 이미 오래되었소. 그러나 아직까지 그 기회를 얻지 못하였더니 지금에 군대를 주둔하고 귀국의 국경을 딛고서야 귀국의 문물제도를 보고 귀화할 마음이 용솟음치는 듯하오. 삼가 부하 3000명을 인솔하고 그대의 병영에 투항하여 작은 정성이나마 다하여 조그마한 공을 세우고자하오니 바라건대 내치지 말아주시오.”


응서가 편지를 보고 마음속으로 심히 기뻐하여 사신으로 온자를 후하게 대접하고 즉시 회답을 써 말을 달려 보내니 부하 여러 장수들이 일제히 장막에 들어와서 간하여 말렸다.

“저 적은 원래 간사하게 속이는 것이 많거늘, 어찌 한쪽의 편지를 접하고 이를 가벼이 믿어 저 간계에 떨어지려고 하십니까.”

 응서가 말하였다.

“그 편지의 뜻이 정성스럽고 정이 두터운 것을 보건대 거짓이 없는 본마음에서 나온 것을 의심할 수 없다. 결코 간사함이 들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옛 사람의 말씀에 ‘스스로를 믿는 사람은 남을 의심하지 않는다’라 하였으니, 사람이 성심으로 나에 기댈진대 나도 또한 정성스런 마음으로 받아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은 각자 의혹이 아직도 결정하지 못하여 여전히 그 불가함을 역설하는 자가 많았다. 응서는 여전히 듣지 아니하고 다시 글을 보내어 날짜를 약속하야 나가서 맞을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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