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6. 09:47ㆍ카테고리 없음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146
나이 듦에 대하여 ― ‘투사적 혐오’의 언어
며칠 전, 한 공적 자리에서 씁쓸한 장면을 목격했다. 한 어르신이 좌중을 얼어붙게 할 정도로 격렬한 욕설을 쏟아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불만의 표출이 아니라, 공적 공간의 품격과 타인의 존엄을 무참히 훼손·약탈하는 언어적 폭력이었다. 이 안하무인 식 언어행태는 형법상 모욕죄에 해당할 소지가 충분하며, 경우에 따라 명예훼손의 경계선에까지 이른다. 오염된 말들이 귓가에 맴돌며 ‘어른’이라는 존재의 의미, 그리고 ‘분노’가 욕설로 변질될 때 드러나는 그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필자는 대학에서 인문학을 가르치고 글을 쓰며 사회적 정의나 정치적 올바름 같은 거대 담론에 익숙해져 있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르는 일에 자연스레 사유의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그날의 폭언이 사라지기도 전, 다음날 지하철에서 마주친 노년의 풍경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성찰을 요구케 했다.
우리는 흔히 서구 영화 속에서 한가로이 정원을 거닐거나 공원 벤치에 느긋이 앉아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절제되고 우아한 노년을 동경한다. 하지만 욕설을 들은 다음 날이라서인지, 내가 탄 지하철은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다. 진하게 풍겨오는 막걸리 냄새, 주변을 개의치 않는 통화 소리, 자리를 차지하려는 거친 몸짓들.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이상화된 노년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강퍅한 늙음이었다.
그럼에도 그 무질서의 한가운데서 묘한 생의 역동성이 읽힌다. 술기운을 빌려 세상에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어쩌면 “나는 아직 여기 살아 있다”는 절박한 자기 확인의 외침일지도 모른다. 현대 철학자 마사 C.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은 노년이 겪는 신체적·사회적 퇴행이 때로 자신의 취약성과 불안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젊은 시절의 고생과 열정이 충분히 보상받지 못했다는 감정이, 타인을 배려하기보다 과격한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려는 태도로 분출된다는 것이다.
고전 문학과 법학, 윤리학을 넘나들며 인간 감정의 구조를 탐구해온 누스바움의 사유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개념은 인간의 ‘취약성’이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병들며, 결국 죽음이라는 한계에 이른다. 이 불가피한 조건은 우리 내면에 불안을 심는다. 어떤 이들은 이 취약성을 정면으로 응시하기보다 타인에게 전가함으로써 심리적 우월감을 확보하려 한다. 누스바움이 말한 ‘투사적 혐오(投射的 嫌惡:projective disgust)’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자신의 취약성·불안·결핍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즉, 혐오의 대상이 실제로 ‘나쁘거나 위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두려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투사한 결과라는 뜻이다. 공적 자리에서 폭언을 쏟아낸 어르신이나, 지하철 안에서 마주한 노년(老年)들 역시, 그러한 모년(暮年)의 상실감을 품고 있었을지 모른다.
누스바움은 『분노와 용서』에서 분노를 두 갈래로 나눈다. 상대에게 고통을 되돌려주려는 ‘보복적 분노(retributive anger)’와 더 나은 상태로 상황을 개선하려는 ‘전이적 분노(transition anger)’이다. 공적 공간을 오염시킨 욕설은 전형적인 보복적 분노의 표출이다. 그러나 민주 사회의 어른이라면 마땅히 전이적 분노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의존하는 불완전한 존재들이요, ‘인생’이라는 같은 열차에 오른 승객들이다. 이 열차는 새로운 사람을 태우고 누군가를 내려주며 계속 달리겠지만, 각자에게는 언젠가 반드시 내려야 할 ‘나만의 종착역’이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는 내가 내리는 그 역이 곧 세상의 끝이자 종착역이다. 그 사실을 자각한다면 고집스럽게 움켜쥐고 있던 분노의 끈도 조금은 느슨해지지 않을까. 지하철에서 막걸리 냄새를 풍기던 어르신도, 공적 자리에서 폭언을 내뱉은 분도, 그리고 필자 역시 같은 선로 위에서 하차를 준비하는 동승자들이다.
우리가 함께 머무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인생 열차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존엄한 공간이어야 한다. 노년의 역동성이 타인을 상처 입히는 무기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언젠가 각자의 역에서 내릴 때, 적어도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지 않았노라고 말할 수 있도록. 폭언이 멈춘 자리에서 비로소 사람이 살 수 있는 향기로운 공간이 열리기 때문이다.
써놓고 보니: 필자 역시 칠순을 바라보는 세월이다. 어찌 위의 단 한 문장에서조차 자유로울 수 있으랴. 책상 옆에 써 놓은 『대종경』 「요훈품」36장을 읽어본다. “사람이 말 한 번 하고 글 한 줄 써 가지고도 남에게 희망과 안정을 주기도 하고, 낙망과 불안을 주기도 하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