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 (42) 홍범도 장군을 육사에서 퇴출하지 말아야 할 이유 ②

2023. 9. 30. 13:36카테고리 없음

 
[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 (42) 홍범도 장군을 육사에서 퇴출하지 말아야 할 이유 ②

 

③의병 대장: 1895년(27세)에 시작한 홍범도 장군의 의병 활동은 1908년(40세) 고문당한 아내의 죽음과 첫아들 양순을 전투 속에 잃는 참담함에도 이어진다. 이 해 일본군을 피해 중국 길림성으로 부대원을 이끌고 들어가고 아들 용환은 러시아로 간다. 이후 용환 역시 아버지를 따라 봉오동 전투에도 참여하는 등 의병 활동을 하다 날짜조차 모르는 어느 날 러시아 스파스크 이국땅에 뼈를 묻었다.

홍범도 장군은 중국, 국내,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오가며 의병 활동을 하는 한편, 자금 마련을 위해 노동판 짐꾼(43세), 항구 노동자로 모은 품삯으로 신문잡지를 발행(45세)한다. 계연수(桂延壽, ?~1920)가 1911년 펴낸 단군 관련 고대사 『환단고기』 머리말에 보이는 “홍범도 오동진 두 벗이 돈을 냄으로 모든 분들에게 부탁하여 펴낸다.((洪範圖·吳東振 兩友之出金付諸剞劂)”라는 기록은 흥미롭다. 우리 단군신앙을 독립운동과 연결하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오동진(吳東振,1889~1944) 역시 평안북도 의주 출신 독립운동가였다. 홍범도는 이후 만주에서 조직된 단학회에 참여한다. 단학회는 단군을 섬기는 단체로 오늘날 대종교 전신이다. 서일, 김좌진 등 상당수 독립운동가가 대종교 출신이다.

홍범도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금광에서 노동(46세~47세)을 해 무기를 구입, 북만주 밀산으로 들어간다. 1915년(47세)부터 3년 동안 학교를 설립하고 후학을 길러내다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에 지금의 중국 길림성 화룡현 봉오동에서(6.6~7)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하였다. 『홍범도 일지』에는 “일본군 오륙백 명이 죽었다.”고 하였다. 4개월 뒤, 홍범도는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와 연합하여 청산리 천보산에서(10.21∼26) 전투를 치른다. 이것이 우리 역사와 독립운동사에 찬연히 남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이다. 이때 그의 나이 이미 중년도 지난 초로의 53세였다. 박은식(朴殷植,1859~1925)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의 전략전술을 기록해 놓고 일본군 1천 200명을 죽였다고 하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통합 교섭에 나섰던 서로군정서 교성대의 지도자 김승빈은 <레닌기치>(1968.8.27)에 기고한 글에서 청산리 전투를 치른 후 안도현(화룡현) 홍치허(홍기하)에서 휴식하고 있던 장군을 만났다면서 “홍 장군과 첫 상봉에서 나는 앞서 들은 바와 같이 그의 체격이 과연 장대하고 성품이 인자하고 태도가 겸손하며 일처리에서 태도가 과단성이 있다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홍범도의 사심 없고 과단성 있는 결정으로 10월 하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 교성대, 광복단이 연합하여 400여 명의 군인으로 '조선의용군'(대한의용군)이 결성되고 홍범도가 대한의용군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던 것이다.

④신출귀몰: 언급한 박은식의 기록 등을 보면 홍범도는 전술전략에 탁월하였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장군 지략은 일본군을 놀라게 했다.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청산리 전투 기록(『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10집(1976, 237~238쪽)을 보면 '주력부대는 독립군이라 칭하는 홍범도가 인솔한 부대', '홍범도의 성격은 호걸의 기풍', '부하들로부터 하느님 같은 숭배를 받고' 등 적군인 홍범도에게 그 지략과 인품에 외경심까지 보인다. 이 기록에 '홍 장군이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하나 어느 문헌에도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들의 소망이 아니었을까 한다.

1928년 가을 이만의 '차우돈까'라는 한인마을에서 홍범도를 직접 만난 고려인 작가 김준은 이렇게 회상한다. “'신장구척'-그럴 듯하다. 실로 장대한 분이었다. 거의 다 그를 쳐다봤다. 보면, 말로만 들었던 '홍범도'란 그의 이름에 알맞은 인상이 떠오른다. 정기 끓는 시꺼먼 눈, 역시 시꺼먼 수북한 윗수염, 길고 거무스레한 얼굴, 옛말에 있는 장수 같다. '축지법' 우연한 말이 아니다. 과연 홍범도 대장은 의병대를 거느리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다. 오늘은 삼수갑산, 내일은 북청, 모레는 봉오골.…'신출귀몰' 왜놈들한테서 생겨난 말이란다. 홍범도 의병대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왜병 웅거지를 족치었다. 놈들이 둘러싸려고 한다거나 둘러싸면 홍범도 의병대는 온데간데없었다. '신출귀몰!”(「홍범도 장군을 회상함」)

▶다음 회에서 계속

▲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인하대학교 초빙교수/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인하대학교 초빙교수/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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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의병 대장: 1895년(27세)에 시작한 홍범도 장군의 의병 활동은 1908년(40세) 고문당한 아내의 죽음과 첫아들 양순을 전투 속에 잃는 참담함에도 이어진다. 이 해 일본군을 피해 중국 길림성으로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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