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와 빨갱이

2023. 9. 25. 18:08카테고리 없음

그날, 아직도 아스팔트는 맹렬히 지열을 뿜어댔다.

 
 

엊그제 추석도 되고 하여 이발소를 찾았다. 내 서재 근처에는 모두 미용실로 18000원~22000원까지 한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이발료가 비싸다 하였더니 지인께서 머리는 자기가 감고 커트만 하는 데 10000원인 이발소가 있다 하였다.

 

지인에게 연락하여 주소를 받아보니 10여 분쯤 걸어야 했다. 가을이 되었나 보다. 한낮인데도 확실히 햇볕은 여름이 지났다. 그 맹렬히 아스팔트를 달구던 열기가 사라졌다. 아주 자그마한 이발소였다. 의자가 셋, 10여 평 공간은 단출해 보였다. 내 또래의 사내가 머리를 막 깎고 내려왔다. 언뜻 보니 이발사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지인은 분명 젊다하였는데 요즈음은 쉽게 나이 가늠이 어렵다. '시간을 잘 맞추었네'하고 자리에 앉으려는데 이발사는 안쪽에서 머리 감고 나오는 이에게 자리를 권한다.

 

이 이발소에서는 머리를 감고 한 번 더 다듬어주는 듯했다. 머리 감고 나온 이는 상고머리로 깎았는데 70대쯤 되어 보였다. ‘내 또래 사내가 머리를 감으면 또 다듬어주겠구나.’ 무료한 시간을 줄이기 위해 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들고 신문사에 보낸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고 또 보아도 오타는 나온다. 채 두어 줄도 못 읽었는데 이런 말이 들렸다.

 

“이 나라는 빨갱이 세상이에요.”

“맞아요.”

“빨갱이가 여기저기 널렸어요. 그렇지 않아요?”

“네.”

한 사람이 크게 말하면 한 사람이 작은 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작은 미용실이기에 말소리를 안 들으려 해도 도리가 없었다. 거 나이가 많은 분이라고 저렇게 크게 ‘빨갱이 운운’을 해야 하나? 이발사는 꼼꼼히 다듬는 듯했다. 핸드폰 속 원고를 읽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4~5분쯤은 족히 흘렀고 70대쯤 되어 보이는 이가 이발 가운을 벗으려 했다.

 

도저히 참지 못하여 그들의 뒤통수에 대고 한 마디 했다.

 

“아, 요즈음 세상에 빨갱이가 어딨습니까!”

 

이발사가 돌아섰다.

 

“아니, 왜 남의 이야기를 엿듣습니까?”

 

눈을 부릅뜨고 이발사는 나에게 반 발 짝 다가오며 말했다. 한 발 짝 오면 내 몸과 부딪쳐서다.

 

“아니, 엿들은 게 아니라 그렇게 크게 말하니 들린 거지요.”

 

당황한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빨갱이라든 뭐든, 왜 엿듣냐고요? 왜! 왜! 아니, 누가 들으라 했어요. 누가 들으라 했냐 말이요.---”

그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손에 들려있는 가위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70대쯤 되어 보이는 이가 이발사를 말렸다.

 

아! 그때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뒤에서 앉아 핸드폰에 눈길을 두고 있어서 몰랐다. ‘빨갱이 운운’ 큰소리가 이발사요, 70대가 “맞아요.” “네.”였다. 문을 나서는 내 뒤통수에 이발사의 말이 따라왔다.

“깎거나 말거나. 누가 깎으라 했나.---”

 

가을 햇볕은 간 곳이 없었다. 아직도 아스팔트는 맹렬히 지열을 뿜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