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담론과 사건으로 보는 경기문학지도”-원효, 성호, 연암, 취석실을 중심으로

2023. 2. 6. 10:06카테고리 없음

이 글은 경기민예총연간지 다 다3호(2021.12)에 실린 원고입니다.

“‘처음’ 담론과 사건으로 보는 경기문학지도” -원효, 성호, 연암, 취석실을 중심으로

 

내 고향은 화성시 장안면 사곡리 흥천이다. 원고를 요청하는 측에서 “과거와 달리 말만 많고 행동 없는 시대의 운동과 예술”에 대해 써 달라 한다. 그렇다. 말만 많고 행동이 없는 시대이다. 지식은 널렸지만 실학(實學)은 가뭇없다. 화성지방 실학인 네 분 발자국을 발맘발맘 따라가 본다.

 

원효,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보련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내게 주려나 誰許沒柯斧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보련다 我斫支天柱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한 원효(元曉, 617~686)가 요석공주(瑤石公主)를 얻을 때 노래다. 시호는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이다. 우리가 흔히 ‘원효의 해골물 깨달음’으로 알고 있는 곳이 당항성이 아닌가 한다. 이 사건으로 원효는 당 유학을 포기하였다. 그는 백성들과 함께하며 신라 불교의 저변에 깔린 가장 핵심적인 사상인 화쟁사상(和諍思想)을 발전시켰다. 요석공주와 사이에 빙월당(氷月堂) 설총(薛聰,660경~730경)도 낳았다. 설총은 신라 10현의 한 사람이며 강수·최치원과 함께 ‘신라 3문장’으로 불린다. 설총은 자주성의 발로로 이두 문자를 정리하고 발전시켰다. 우리식 문자의 대두요, 한자에 대한 뚜렷한 자국어 표기의식이다. 그는 <화왕계(花王戒)>도 지었다. <화왕계>는 우언(寓言)으로 〈풍왕서(諷王書)〉라고도 한다. 꽃나라의 화왕이 처음에는 아름다운 장미를 사랑했으나 할미꽃의 충언을 듣고 마음을 바꾼다는 내용이다. 할미꽃을 빗대어 바른 도리로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경계의 글이다. 한국사에서 원효 부자는 종교계와 문학계에 “하늘을 떠받칠 기둥”임에 틀림없다. 화성의 실학 첫 발로는 꽤 의미 있는 업적이다. 

고대 동아시아 한, 중, 일 해상교역로(대당교역로)이며 한반도 중부의 당항성의 위치가 주목된다. 출처 : 한신대학교 2010,『한신대학교 개교 7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한신대학교 박물관 20년의 발자취』

 

성호, 촉나라 개가 눈을 보고 짖다

안산에 삶의 터전을 두었던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 그는 안산 점성촌에서 태어난 농부이자 실학자였다. 그의 작품 중 『곽우록』이 있다. ‘촉나라 개가 눈을 보고 짖다!’란 촉견폐일(蜀犬吠日)부터 풀어본다. 촉(蜀) 지역은 항상 비가 내리고 음산하기 때문에 태양이 뜨면 개들이 마구 짖어 댄다는 의미다. 또 월(越) 지방은 눈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눈이 내리면 개들이 마구 짖어 댄다는 월견폐설(越犬吠雪)이란 말도 동일한 의미다. 흔히 식견이 좁은 사람이 저보다 나은 사람을 비난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성호 선생은 『곽우록(藿憂錄)』을 쓰는 자신을 이 개에 비유하였지만, 선생 말이 개소리일 리는 만무하다. 

선생은 사안에 따라 의견을 달리할 줄 알았다. 식무자(識務者)에 대한 견해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을 식무자로 꼽았기 때문이다. 식무자란 시무(時務, 시급한 일이나 그 시대에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일)을 아는 자다.

또 선생은 정주(程朱)와 이황(李滉) 학문을 탐독한 성리학적 질서를 존숭하면서도 주자에게만 치우치는 폐풍에서 벗어나 수사학적(洙泗學的)인 수기치인학(修己治人學)을 추구하였다. 그것은 당시 사회 실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경세치용의 실효를 목적으로 하는 실학이었다. 당연히 사장(詞章)과 예론(禮論), 주자집전(朱子集傳)·장구(章句) 풀이에만 경도된 주자학적 학풍을 배격하는 한편, 나아가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학(西學)까지 독서 폭을 넓혔다. 선생이 정통적인 유학자이면서도 당대의 성리학적 사고에 경도되지 않은 이유는 이러한 독서 덕분이었다. 선생은 그래서 “한 자라도 의심을 가지면 망언이라 하고 참고·대조만으로도 범죄라 한다. 주자의 글도 이러하니 고대 경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 학문은 고루와 무지를 면하지 못한다”고 당시의 학문 세계를 일갈한다. 

선생의 학문과 세계관은 중농주의가 바탕이었다. 따라서 상업을 노골적으로 배척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실학(實學)에 초점을 둔 것은 사실이다. 선생은 “어려서 배움은 성장해서 행하려 함이다. 평소에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 하는데 알려질 만하게 되기를 힘써야 한다. 반드시 그만한 재료를 준비해 놓아야만 실학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선생이 학문 하는 목적은 현실에 적용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넉 자로 줄이면 ‘경세치용(經世致用)’이다. 학문은 실제 사회에 이바지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선생의 실학은 아들 맹휴, 손자 구환(九煥), 종자(從子) 병휴(秉休), 종손(從孫) 중환(重煥), 가환(家煥) 등에게로 이어졌다. 선생의 학통을 이은 제자로는 소남(邵南) 윤동규(尹東奎, 1695~1773), 산학(算學)의 하빈(河濱) 신후담(愼後聃, 1702~1761), 『동사강목』을 지은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 경학(經學) 분야의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천문학을 연구한 황운대(黃運大) 들이 있다. 이 흐름이 후일 다산 정약용에게까지 이른다. 이러한 성호 선생이 자신의 저서 『곽우록』에서 자신을 촉나라 개에 비유하였다. ‘촉나라 개’는 성호 선생인가? 아니면 저 당시나 지금이나 폐풍을 답습하여 현실에 안주하려는 무리인가? 

 

 

필사본 『성호 곽우록』, 개인소장

첫 줄에 “나는 천한 사람이다(余賤人也)”가 보인다.

 

곽식자가 육식자를 근심하다

성호 선생이 지은 『곽우록』(藿憂錄)의 집필 목적은 ‘간뇌도지(肝腦塗地)’다. 『성호사설』의 부록격인 『곽우록』은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는 천한 사람이다.…육식자(肉食者, 고기를 먹는 관리)가 묘당(廟堂, 당시의 의정부, 지금은 정부)에서 하루아침이라도 계획을 잘못하면 곽식자(藿食者, 콩잎을 먹는 백성)의 간(肝)과 뇌(腦)가 들판에 흩어지는 일이 어찌 없겠습니까?

 

‘콩잎 곽’(藿)은 백성이요, ‘근심 우’(憂)는 걱정이니 책 제목은 곧 ‘백성 걱정’이라는 뜻이다. 즉 “곽식자”는 콩잎을 먹고사는 백성으로, 고기반찬을 먹고사는 관리인 ‘육식자’에 빗댄 말이다.

선생은 “나는 천한 사람이다(余賤人也)”라지만, “관리가 잘못하면 간과 뇌수가 들판에 흩어져 죽는 것은 백성”이니 “어찌 목숨이 달린 일에 간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묻는다. 선생은 백성들의 간과 뇌수가 들판에 흩어지는 참혹한 죽음을 형상화한 ‘간뇌도지(肝腦塗地)’라는 표현을 끌어왔다. 이 말을 하는 선생의 심정을 구차하게 몇 자 글줄로 설명할 필요 없다. ‘나는 곽식자인 천한 백성이기에 국가 문제를 논할 자격이 없지만 육식자인 당신들이 잘못된 정책을 실시하니 우리 백성들이 이렇게 간뇌도지하지 않느냐’는 항변이요, 자신이 『곽우록』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격정적 절규이다. 

사실 국민이 백성인 이 시대에도 국민들이 관리를 상대하기가 버겁다. 더욱이 저 시절 조선은 왕국이었다. 왕에게 대드는 글줄을 쓴다는 것은 목숨 줄이 여러 개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매우 비효율적인 행위였다. 조선왕조인 저 시절과 대한민국인 이 시절, 무엇이 다를까? 우리는 선생에게서 무엇을 배우려 하는가? 아래는 『성호선생언행록』에 실린 글로, 성호 선생이 자신의 저서 『곽우록』을 두고 한 말이다.

 

이 계책이 지금은 끝내 시행되지 못하더라도 후세에 만일 채택되어 시행됨으로써 평범한 한 남편과 아내가 그 혜택을 받게 된다면 내가 죽은 후라도 어찌 큰 행복이 아니겠느냐.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대한민국은 출범한 지 겨우 5달이 안 된 대통령 지지도가 30%를 밑돌고 있다. 하지만 후안무치한 저들은 꼬박꼬박 불로소득을 잘만 챙긴다. 모쪼록 성호 선생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기를 간곡한 마음으로 기대해본다. 현재 안산에는 ‘송곳 꽂을 땅조차 없다’고 토로하였던 성호 선생을 기리는 <성호기념관>이 썩 훌륭하게 건립되었다. 모쪼록 성호 선생의 ‘실학이란 지적 향기’가 욱욱하니 퍼졌으면 한다. 

 

연암, 종로거리를 메운 게 모조리 황충蝗蟲이야

원효가 깨달음을 얻은 구봉산에서 10킬로쯤 가면 남양읍(南陽邑)이 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민옹전(閔翁傳)> 배경이 바로 이곳이다. <민옹전>의 민 영감이 바로 이 남양 사람이다. <민옹전>은 󰡔연암별집󰡕 「방경각외전」에 실려 있다. 실존인물인 민유신(閔有信)이 죽은 뒤, 그가 남긴 몇 가지 일화와 연암이 민유신을 만나 겪었던 일들을 엮고 뇌(誄, 죽은 사람의 생전의 공덕을 기리는 글)를 붙인 소설이다.

남양에 사는 민유신은 이인좌의 난에 종군한 공으로 첨사를 제수 받았으나, 집으로 돌아온 후로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영특하였으며 옛사람들의 기절(奇絶)과 위업을 사모하여 7세부터 해마다 고인들이 그 나이에 이룬 업적을 벽에다 쓰고 분발하였으나 끝내 아무런 일도 이루지 못한다. 70세가 되자 그 아내가 “올해는 까마귀를 그리지 않느냐?”고 조롱하는데도, 민옹은 기뻐하며 “범증은 기이한 계교를 좋아했다”고 엉뚱하게 쓰고는 태연해 하는 사람이다.

민옹은 정의가 불한당이던 시절, 도덕이 결여된 자들의 폭악으로 정신이 유폐된 자였다. 수다한 언롱(言弄)으로 덮인 소설이지만, 민옹이 이미 한계성을 갖고 태어난 그저 그런 무관 출신이라는 상황을 조선 후기 사회사와 더불어 읽는다면 ‘뜻을 펴지 못하는 자의 비애’로부터 해석을 열어가야 한다. 비록 몸은 저잣거리를 헤매 돌고 불뚝 심사를 부리는 민옹이지만, 삿된 욕망으로 세상의 누린내를 풍기는 자들과는 다르다.

누군가 해서(海西)에 황충(蝗蟲)이 생겨 관가에서 황충 잡이를 독려한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민옹은 곡식을 축내기로는 종로 네거리를 메운 ‘칠척장신의 황충’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그것들을 잡으려 하나 커다란 바가지가 없는 것이 한이라고 한다. 여기서 민옹이 말하는 황충은 하는 일 없이 놀고먹으며 곤댓짓만 하는 양반네이다. 

이 황충 이야기가 이 소설에서 사자의 어금니에 해당한다. 연암은 <민옹전>을 쓰는 이유에 이 황충을 넣었다. 

 

민옹은 놀고먹는 사람을 황충으로 보았다. 도를 배워 용과 같았는데, 골계로 풍자의 뜻을 붙여 세상을 희롱하고 불공하였다. 벽상에 글을 써놓고 스스로 분발한 것은 게으른 사람들에게 경계가 될 것이다. 이에 <민옹전>을 쓴다.

 

‘황충’이란, 메뚜기과에 딸린 곤충이다. 떼를 지어 날아다니며 벼에 큰 해를 끼치는 해충으로 ‘누리’라고도 한다. 앞뒤 문장을 고려하면 민옹이 황충이라 부르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들’이요, ‘탐관오리’들이다. 연암이 적어 놓은 황충의 모습은 이렇다.

 

이것들은 조그만 벌레이니 조금도 걱정할 것은 없지. 내가 보니 종로거리鍾樓를 메운 것은 모두 황충이야. 키는 모두가 칠 척 남짓이고 머리는 검고 눈은 반짝이는데 입은 커서 주먹이 들락거리지. 웃음을 치면서 떼로 다니니 발꿈치가 닿고 엉덩이를 잇대고는 얼마 남지 않은 곡식을 모조리 축내니 이 무리들과 같은 건 없을 게야. 내가 이것들을 잡아버리고 싶은데 커다란 바가지가 없는 것이 한스럽다네.

 

어떤 문장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 또는 그런 글 마디를 읽음으로써 맛보는 재미를 ‘글맛’이라고 한다면 <민옹전>은 꽤나 매운 소설이다. “키는 모두가 칠 척 남짓이고…얼마 남지 않은 곡식을 모조리 축내”는 것들이 누구인가. 바로 종루(鍾樓, 지금의 종로) 근방으로 조선의 국심(國心) 거리를 활보하는 저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이 ‘진짜 황충’이라는 소리이다.

성종 7년(1476년)의 기록을 보면 당태종이 이 ‘황충’을 날로 먹었다는 흥미로운 기록이 보이니 잠시 살펴보고 넘어가자. 당시에 왕가 사람들이 수시로 보고 참고하라는 뜻에서, ‘훌륭한 임금’, ‘처음에는 훌륭했지만 나중에 나빠진 군주’, 그리고 ‘훌륭한 왕비’ 등을 주제로 시를 짓고 글을 써서 병풍 3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메뚜기∥

황충蝗蟲은 풀무치라고도 하는데 메뚜깃과에 속한다. ‘황충이 간 데는 가을도 봄’이니, 사전에도 “좋지 못한 사람은 가는 데마다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말”로 뜻을 달아 놓고 있다. 요즘도 저자거리에는 이런 황충이 많다한다. 이런 잡것들을 용수로 걸러내면 좋으련만, 내남없이 용수를 들 자 또한 없다.

 

 

당태종(唐太宗, 재위 626~649)이야기는 그 중, 첫 번째 병풍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조선에서 당태종은 나라의 기틀을 놓은 훌륭한 군주로 알려져 있었고 그가 지었다는 『정관정요貞觀政要』 라는 책은 정치학 교재처럼 읽혔다. 그런 그를 칭송하는 대목에서 언급된 것이 바로 이 황충이다. 당태종은 메뚜기 떼가 들이닥치자 “백성은 곡식을 생명으로 하는데, 네가 곡식을 먹으니 차라리 나의 폐장을 파먹어라.”고 외치며 황충을 삼켰다고 한다.

잠깐 이야기를 저 건너 나라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 이탈리아 최대의 시인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 으로 옮겨본다. 『신곡』 은 장대한 서사시로서 <지옥>․<연옥>․<천국> 등 3편으로 되어있다. 이 글에서 『신곡』 을 언급하는 이유인 즉은, <지옥편> ‘제3곡’의 지옥 입구에서 이 민옹이 황충으로 비유하는 ‘게으른 자들과 비열한 자들’의 최후가 보이기 때문이다.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본 일이 없는 이 게으른 자들은 벌거벗은 채로 왕파리와 벌들의 쏘임으로 신음하고 그들의 얼굴은 상처로 피투성이가 되었다. 또 벌레 떼는 저들의 얼굴에 피를 흘리게 했는데 그 피는 눈물에 뒤섞이어 더러운 벌레들의 다리에 엉켜 있었다.

 

문자 그대로 목불인견이다. 단테가 목격했다는 이들은 태만한 탓으로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기를 거절한 ‘정치인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민옹전>에서는 그 ‘게으른 자들’, 하는 일 없이 돌아다니는 발록구니들은 누구일까? 조선을 살아 간 천한 백성, 그 누구도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며 살 수 없다. 종로 거리나 어슬렁대는 경화의 사족부류인 7척의 대황(大蝗)들에게만 해당하는 용어이다. 이쯤 되면 황충은 겉가량으로 단순하게 벼만 갉아먹는 메뚜기로 읽히지 않는다. 황충의 외연을 조금만 넓히면 백성을 해코지하는 무리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증산교(甑山敎) 창시자인 강증산(姜甑山, 1871~1909)이 썼다는 『중화경(中和經)』 에도 이 황충을 언급하고 있으니 여기서는 ‘국가가 망할 징조’였다.

책방에 가면 연암에 관한 서적들을 자주 접한다. 전공서적에서 초․중․고등학교 읽기자료는 물론 입시자료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연암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독서인이라도 만나면 고전을 전공하는 사람으로 마음 한 구석이 흐뭇하다. 따지자면 일제하 국문학자 김태준이 “연암의 시대는 닥쳐왔다. 연암이 사랑하던 민중은 이제야 가지가지 찬사를 봉정하였다”한 지도 꽤 오래된 이야기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세기가 바라보이는 지금, 우리에게 여전히 현재성으로 남아있는 연암 문학의 반향은 무엇일까? 연암 연구야 예전부터 있었지만 이제는 중증의 연암학질이라도 걸린 듯이 너도나도 재채기를 해대고 심지어는 입시에 자주 출제된다고 신열까지 앓으니 부디 오래오래 앓기를 바랄 뿐이다. 학질이란 병이 본래 발작적인 열과 냉의 극단을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여하간 연암에게 저러한 상황을 기별이라도 넣고 싶다.

 

 

후원놀이∥신윤복申潤福, 1758~?

18세기, 연암 당대 황충족蝗蟲族의 놀이문화를 엿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의관치장이 야단스러운데-, 남이 보거나 말거나 의식치 않는 왼쪽 편 저 황충은 어떠한 벼슬살이를 하는지 궁금하다. 저들이 바로 야차(夜叉, 악마)이다. 인두겁을 쓰고 하는 행실짓거리가 고약하기 이를 데 없다. 하기야 저들은 태어날 때부터 빈들빈들 놀면서도 먹고사는 걱정이 없는 ‘매팔자’였다. 오죽하였으면 다시 다산으로부터 반세기 뒤인 19세기 말, 조선에 가장 근접한 기록을 남긴 영국 여인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은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란 책에서 저러한 부류인 관리들을 “하층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면허받은 흡혈귀”라고까지 저주스럽게 묘사해놓았을까.

안타깝게도 아직도 이러한 매팔자 신황충족新蝗蟲族들이 여전히 살아있다. 살아서는 여의도나 저자에 어정버정하는 치들이 득시글거리니 어디 진짜 큰 바가지 하나 없나. 몽땅 퍼다 버리게!

 

우하영, 내 일념은 동포를 모두 구제하는 데 있다

2022년 9월,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라가 시끄럽다. 대통령이 외교 무대에 나가 욕을 하고 여당은 이를 감추려 온갖 부끄러운 행태를 서슴없이 한다. 듣는 귀가 따갑고 보는 눈이 시리니 하루 살아내는 것조차 힘겹다. TV만 켜면 한 사발도 되지 않는 깜냥으로 세상만사 전지전능한 듯 말인지 됫박인지 설레발치며 어불성설 호기롭게 내 뱉는 수준 이하 자칭 논객들, 온통 먹자타령에 처첩간의 갈등 드라마와 조상님보다 숭배 대상이 된 개~고양이 동물농장과 호들갑을 떠는 연예인 관음증, 반백년 전 노래를 거푸 내보내 국민의 의식을 영구히 박제화시키는 것을 품격 높은 미디어의 사명이라 믿고 오매불망 시청률 올리기에 치성 드리는 방송도 모자라, 글 한 줄 말 한 마디 천 근 활을 잡아당기듯 해야 할 언론인들이 지라시급 뉴스 주워 모아 정론이라며 자음 17자 모음 11자를 ‘가을 도리깨질하듯’ ‘조자룡 헌 칼 쓰듯’하니, 그 훌륭한 바른 언론을 전달하는 훈민정음도 곡을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저 시절, 이런 때면 임금은 백성들에게 구언(求言)을 하고 신하는 상소(上疏)를 하였다. 여기서 언필칭 상소라 함은 처절하고도 서슬 퍼런 심정에 ‘오두가단(吾頭可斷, 제 말이 안 맞으면 제 머리를 자르옵소서!)’ 각오로 도끼 하나 옆에 놓고 골수에 박힌 나랏병을 고쳐달라는 언론(言論)이다. 1796년(정조 20) 수원 화성(華城)이 축성되던 해가 그러하였다. 

정조는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전격 실시하였다. 신해통공은 육의전(六矣廛)을 제외한 일반 시전이 소유하고 있던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누구나 자유로운 상행위를 할 수 있게 한 정책이다. 금난전권은 국역을 진다는 조건으로 육의전과 시전 상인이 서울 도성 안과 도성 밖 10리의 지역에서 난전을 금지하고 특정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권리였다. 독과점이기에 이 육의전의 폐단은 이루 형용키 어려웠다. 정조는 이 금난전권을 비단·무명·명주·모시·종이·어물 등 6종류의 상품에 대한 육의전만 남기고 모두 없앴다. 이른바 그들만의 리그를 혁파하여 조선의 경제를 개혁해보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부 상업은 성장하였으나 백성들의 궁벽한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러자 정조는 백성들에게 구언을 하였고 이때 근기 실학자 유생(儒生) 우하영이 올린 상소가 바로 『천일록』이다.

화성시 매송면으로 어촌리로 가본다. 우하영(禹夏永, 1741~1812)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선생의 자는 대유(大猷), 호는 취석실(醉石室), 성석당(醒石堂)이다. 선생이 즐겨 쓴 호 ‘취석’은 여산(廬山) 앞을 흐르는 강물 가운데 있는 반석이다.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술에 취하여 이 바위에 누워 잤다 하여 이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즉 ‘술에 취해 취석에 누우면 구태여 신선이 될 필요가 없다’는 의미쯤이니 선생의 삶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선생은 실학자 겸 농부이고 여행인이기도 했다. 당파는 힘없는 남인이고 3대 동안 벼슬이 끊어져 평생 신세가 곤궁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이상은 컸고 기개는 꽤나 강개했다. 현인군자들처럼 “천하를 경륜하는 데 뜻을 두리라”하였다. 또 인생 백 년도 못 된다며 “이름과 행적을 죽은 뒤에 남겨야 겠다”고 다짐장을 스스로에게 놓았다. 선생은 「취석실주인옹자서」에서 이것이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온 이유로 들고 있다. 이런 면면으로 선생은 인생경영으로서 글쓰기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큰아버지에게 입양된 뒤에도 한동안 글공부를 하지 못하다 15세 때부터 과거 공부를 다시 시작하였다. 그해 가을 감시(監試, 사마시 초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그 후에도 선생은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회시(會試)만 모두 12번이나 떨어졌고 생활은 더욱 궁핍하여 조석으로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천일록』을 지은 선생의 능력으로 보건대 저토록 과거에 낙방한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할까? 굳이 답할 필요가 없기에 독자들의 문견(聞見)에 맡긴다.) 

 

선생은 71세인 1812년(순조 12)에 한 많은 삶을 마쳤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숙곡리에 있다. 선생은 평생 궁벽하였고 사람들에게 꽤나 모욕을 받았다. 2,060자로 삶을 정리해놓은 「취석실주인옹자서」에서 그 모욕과 멸시를, 선생은 이렇게 담담히 묘사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모욕하고 멸시해도 모욕하고 멸시하는 까닭은 진정 나에게 달려 있다. 나는 이런 일을 당해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모욕과 멸시를 받으며 구차하게 그들을 좇아 살기보다는 차라리 그들과 교류를 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였다.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고 경조사도 모두 끊었다. 본래 좋아하던 산수유람 즐겨 전국에 걸쳐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언어는 한 개의 사회적 행동이다.” 일제하 모더니스트 김기림(金起林)이 「시와 언어」에서 한 말이지만 언어가 어찌 시만 한정하겠는가. 우하영 선생의 글은 조선말엽을 치닫고 있던 저 시절, 나름 사회적 행동이었다. 그것도 임금에게 쓴, 시무책(時務策)이다. ‘시무’란 그 시대에 시급히 해결해야할 일이다. 하지만 모든 일은 양면이 있는 법, 이쪽에서는 부정적인 시무지만 저쪽에서는 이득이 곱으로 느는 긍정적인 시무일 수 있다. 

전대미문의 코로나 19라는 긴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백성들은 하루 살아내는 것조차 힘들다. 개인은 전염이라도 될까 문밖출입도 삼가고 국가는 오죽하면 설 명절조차 부모형제 간 만남도 숫자화하였다. 하지만 방송국은 연일 시청률이 올라 광고로 인한 호황이요, 각종 언택트 관련 제품은 호황에 호황을 거듭한다. 정치인들은 물리지도 않는지 이 ‘코로나’를 콧궁기는 발씸발씸, 입궁기는 오물오물 씹어댄다. 오죽하면 혼술족에 소주판매가 고공행진 중이란다. 

각설(却說)하고, 선생의 학문은 실학이었다. 선생은 「취석실주인옹자서」에서 “문헌을 널리 연구하고 고금에 얼마나 적합한지를 참작하여 정밀하게 생각을 다하고 어느 게 이롭고 어느 게 해로우며 어느 게 편리하고 어느 게 그렇지 않은지를 생각하느라 먹고 자는 것도 거의 잊었다”고 하였다.

선생은 역사에도 관심이 깊었다. 단군과 기자를 한민족의 기원으로 보고 수천 리조차 안 되는 영토의 산천·풍토·민요·풍속 등에 무지한 우리의 현실을 개탄하였다. 선생은 세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았고 일체의 법과 자연은 자연스레 변한다고 여겼다. 상생론적 우주관이다. 이른바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 노마드(nomad)적 사고요, 실학적 사고다. 선생은 나라와 시대에 따라 통치 방법도 다르다고 보았기에 현재의 폐단을 고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천하 만물은 세월이 오래되면 으레 해지고 망가지게 됩니다. 옷이 해지면 기워서 완전해지고 집이 망가지면 수리하여 새로워집니다. 아무리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제도라도 시행한 지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니 폐단이 생겼을 때 바로잡으면 소생할 수 있습니다.…아침 해가 환히 빛나지만 석양이 시들하게 식는 것은 하루 사이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태양빛이 점차 희미해지기 때문이고 봄에는 화창하다가도 겨울에 추워지는 것은 1년 중에도 봄부터 겨울까지 세율(歲律, 세월의 자리)이 변하기 때문이니 하물며 사람 일처럼 느슨해지고 폐단이 쉬운 거야 말하여 무엇하겠습니까?”

 

이러한 생각이 있었기에 선생 글은 조선의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였다. 선생은 유학을 통한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하였고 구체적으로 현실의 폐단을 바로잡아 하・은・주 삼대라는 이상적인 국가는 못 되더라도 현재보다는 나은 ‘소강조선(小康朝鮮)’을 꿈꾸었다. 선생이 보기에 소강조선의 바탕은 『소학』이요, 이를 위해서는 유교로 백성을 가르치는 ‘이유교민(以儒敎民)’ 정책이 필요했다. 선생이 지은 『시무책』은 그러한 생각의 결정체다. 1796년, 정조의 구언에 선생은 그중 시급한 시무에 관한 것만 골라 책자로 만들어 “평소에 모아 기록해둔 것이 있는데 끝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대략 깎고 간추려서 책자를 만들어 분에 넘게 응지하는 구(具)로서 바치오니 성명(聖明, 정조)께서는 깊이 살피옵소서”라 하였다.

선생은 평생 시골 유생으로만 지낸 학자였기에 사람들과 거의 사귀지 않았다. 대신 천성적으로 혼자 산수 유람하기를 좋아해 전국에 선생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 여행을 통해 선생은 “우리나라의 산천·풍토·민요 등을 알지 못한다면 우물 안에서 벽을 보는 것과 같다”면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우리나라 풍토를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선생이 산천을 유람하며 보고 들은 체험, 옛 문헌과 당대 제가들의 논설을 널리 읽고 수집하여 국가·사회 경영 및 개혁 방안을 종합한 것이 바로 『천일록』이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나라 역사·지리·토지제도·군제·국방·관제·농업 기술 등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었다. 선생의 사유가 나라 전체에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 총체적 사유 방식은 18세기 조선 실학자들의 공통된 모습이기도 하다.

<『천일록』 제5책에 보이는 「염방」 부분>

첫줄에 “염치는 곧 사유 중 하나다(廉恥卽四維之一也)”라는 글줄이 선명하다. 선생은 이 염치가 없는 병든 사회를 치료할 약으로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떳떳한 본성을 든다. 인간이면 누구나 염치를 갖고 있기에 이를 진작시키고 흥기시킬 수 있다고 한다. 선생은 의외로 간단한 처방을 내린다. 바로 ‘상대성’이다. 선생은 “공자 마을 사람들처럼 대우하면 사람들이 모두 공자 마을 사람들과 같이 된다.…만일 염치 있는 사람들을 높인다면 어찌 본받아 힘쓰고자 하는 사람이 없겠는가?”하였다.

 

선생은 두 번 상소를 올렸고, 임금들은 두 번 비답을 내렸다. 선생의 글은 당대의 진단서였고 사회적 병폐에 대한 구체적인 처방전이었다. 정조는 검토하고 명령도 내렸지만, ‘난훈 관리(難訓官吏)’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선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것은 왕도 백성도 아닌 ‘난훈 관리’들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상소와 왕의 비답은 조선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하였다. 

이제 선생의 상소와 왕의 비답은 슬픈 외침으로 남아 이 시절을 사는 우리에게 도착했다. 일개 서생 우하영, 그러나 “내 일념은 동포를 모두 구제하는 데 있었을 뿐”이라 손등에 푸른 정맥이 솟도록 쓴 『천일록』 맨 뒤, 「취석실주인옹자서」를 다시 읽어 본다.

 

“내 일념은 동포를 모두 구제하는 데 있었을 뿐이다. 시장에서 물건을 볼 때마다 가난한 백성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책을 고민하였고 길에서 사람을 만날 때도 백성들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래서 전국 물건 값이 언제 올랐다가 언제 떨어지는지, 궁벽한 시골에 이르기까지 그곳 요역이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 수 있다.”

 

나가며

실학을 외친 이들 글은 중병을 고치는 약재로 가득 차있다. 실학을 외친 이들의 삶은 코로나 19보다도 엄혹한 조선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의 미래를 그렸다. 이들의 글은 하나같이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글이었다. 그것은 따뜻한 인간이 살아가는 조선의 미래였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우리가 그리는 미래이다. 

받아든 지면이 적다. 실학을 주창한 분들은 대부분 근기지방에서 삶을 영위하였다. 혜강 최한기, 고산자 김정호, 동무 이제마, 풍석 서유구, 문무자 이옥, 수운 최제우, 담헌 홍대용, … 등. 실학을 주창한 분들 삶은 대부분 현실과 어그러진 고달픈 인생이었지만 글과 삶은 한결같이 백성들에게 향했다. 이 분들 외에도 정조의 ‘비변문체(丕變文體)란 그물에 걸려 희생된 남양 매화동에 살았던 이옥(李鈺,1760~1815), 근대로 내려와 수원 출신으로 카프[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 일원인 박팔양(朴八陽, 1905∼1988), 역시 카프 수원지부를 결성하였고 후일 월북한 박승극(朴勝極,1909~?) 등 허다한 실학인이 있다. 지면 관계로 후일을 기대한다. 

이 글을 쓰며 ‘난훈’이란 말이 온 몸을 짓누른다. 난훈은 몸은 호랑이와 비슷한데 호랑이보다 크다. 멧돼지 어금니에 꼬리는 5미터나 되는 악수(惡獸)이다. 바로 사흉(四凶,큰 개의 모습을 한 혼돈, 눈이 겨드랑이에 있는 도철, 날개가 달린 호랑이 궁기와 도올) 중 하나인 도올(檮杌)이란 짐승이다. 이 도올은 전욱(顓頊)이라는 고대 전설 속 황제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허울만 좋은 하눌타리일 뿐이다. 오로지 악행만 일삼고 싸움질을 하면 물러나는 법이 없다. 또 거만하고 완고하여 남들의 의견도 전혀 듣지 않아 난훈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제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 주고 백성들이 열심히 가르쳐도 도저히 제 버릇을 못 버리는 ‘난훈들’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요, 개꼬리 삼 년 묵어도 황모 못 된다는 말이 정녕일시 분명하다. 

저 시절 저러한 난훈이 이 시절에도 도처에서 활보한다. 그러니 저 시절 저러한 실학이들이 이 시절에도 있을 터, 주위를 둘러 이러한 실학인을 찾아 국정을 경영토록 한다면 어찌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아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