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적 상상력』을 보며-

2023. 1. 25. 12:55카테고리 없음

 

『사회 역사적 상상력』을 보며-

 

 

새해, 별 감흥이 없다. 세월은 그렇게 나를 변하게 했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 하는 대중가요도 있지만 그렇게 세월은 간 듯하다. 사실 세월은 무형(無形)이라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생각을 정돈하기 위해 새해 첫 책을 집어 들었다.

유종호 선생의 평론집 『사회 역사적 상상력』이다. 얼마 전, 헌 책방을 자주 순례하는 지인 서재를 방문했다가 빌려왔다. 꽤 오래전 책일 텐데 하며 펼쳐보니 1987년 판이다. 첫 장, 첫 구절이 눈길을 잡아 끈다. 「변두리 형식의 주류화」라는 글이다. "러시아 형식주의 관용구의 하나에 ‘아버지에게서 아들로가 아니라 숙부에게서 조카로’란 것이 있다."라는 구절이다. 이 말은 변두리에 있다가 갑자기 어엿한 문학 형식으로 부상한 장르를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문학사에 기술하며 쓴 말이다. 즉 지배적 규범이나 형식과 단절된 어떤 장르가 문학사의 주류로 등장했다는 것을 비유한 표현이다.

문학사에는 이런 경우가 꽤 있다. 이른바 기존 형식의 파괴요, 문학사 진행의 비연속성이다. 이를 형식주의자들은 뜬금없이 나타난 것이기에 ‘낯설게 하기 수법’이나 ‘지각의 갱신’을 형식주의의 고유한 속성으로 이해한다. 문학이 주는 감동과 탄식, 여운과 변화는 여기서 자연스레 나타난다. 

천대받던 우리 [한글]고소설이 조선 후기에서 20세기 초기에 문학사의 전면으로 떠 오른 것은 그 한 예이다. 한자로 된 한시나 한문학이 주류를 형성하다가 어느 날 변두리 천 것인 고소설의 습격을 받아 주류서 밀려난 경우이다.

문학사는 이렇듯 ‘아버지에게서 아들로’가 아니다. 자판이 툭 튀겨 딴 글자를 입력하듯 ‘숙부에게서 조카로'가 등장한다. 이렇게 보면 변두리 형식은 이미 문학의 주류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꿈을 잉태하고 있는 셈이다.(물론 이 주류 또한 어느 날 한문학처럼 비주류로 강등되는 날이 오겠지만.) 언어와 문학, 여기에 사회적 상상력이 빚어낸 멋진 묘미이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는 '아버지에게서 아들로'만 있을 뿐 '숙부에게서 조카로'가 없다. 오직 항구여일 ‘아버지에게서 아들'이라는 '그들만의 리그’만 작동할 뿐이다. ‘낯설게 하기’에 대한 불편함, ‘지각의 갱신’에 대한 번거로움은 모두 ‘그들만의 리그’가 만들어 낸 ‘출중한 작품’이다. 

‘출중한 작품’은 껍데기만 존재하는 박제(剝製)된 지식이요, 사회 구조적인 창살에 영어(囹圄)가 돼버린 정신이란 뜻이다. 이는 일제 식민지, 이승만 독재, 군사독재를 거치며 고식화, 정형화라는 프레임으로 강압적인 위계질서를 구조화하였다. 이것이 현재의 순응하는 한국 사회를 만들었다는 생각이다. (촛불혁명을 이끄는 이들도, 기타 민주화를 외치는 이들도 그렇다. 우습게도 그 나물에 그 밥이다. 그들만의 리그는 그곳에서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기타 국민들'은 무기력과 체념(특히 정치)에 빠져있다. 이들에게 현실은 강파르고 희망은 신기루이니 미래는 암담할 뿐이다. 사회 역사적 상상력은커녕 무 상상력과 몰 상상력의 심해로 끝없이 끝없이 잠수한다.

 

두 분 다 생존해 계신데 이 책이 어떻게 지인의 서재에 꽂혔는지를 생각해 본다. 지인은 헌 책방에서 구입했단다. 만약 내 책에 서명하여 누군가에게 준 책을 내가 보았다면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하다. (지인 말씀이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이런 책만 구입하는 이들도 있단다. 판매 가치가 있어서란다. 모두 물질로 가치 전환하는 이 나라여서인지 그 물질 사회 상상력만큼은 꽤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