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姜邯贊)인가? 강감찬(姜邯瓚)인가?

2023. 1. 19. 14:13카테고리 없음

강감찬(姜邯贊)인가? 강감찬(姜邯瓚)인가?

 

<강감찬전> 번역이 꽤 길어진다. ‘姜邯贊’의 한자 이름에서 도울 ‘찬(贊)’자가 아니라, 제기 ‘찬(瓚)’가 맞다는 견해를 소개한다. 『정조실록』 20년 병진(1796) 7월 21일(갑자)에 보이는 기록이다.

 

예조 판서 민종현이 아뢰기를, “현충사의 위차(位次)에는 이미 고려 태사(太師) 강감찬(姜邯贊)…또 아뢰기를, “송경(松京) 흥국사(興國寺)의 옛터에 탑 하나가 있는데, 탑면에 음기(陰記)가 남아 있습니다. 이는 곧 강감찬이 쓴 것인데 그 이름이 찬(瓚) 자로 적혀 있어 공사 서적에 실려 있는 바와 다릅니다. 대개 석각(石刻)은 목각 판본에 비하여 훨씬 더 믿을 만한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 강감찬의 이름을 모두 찬(瓚) 자로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니, 따랐다.

 

이러한 견해는 옥유당(玉蕤堂)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의 『해동역사』에도 보인다. 『해동역사』는 한치윤이 중국과 일본의 각종 전적(典籍) 540여 책에 나오는 우리나라 관계의 기사를 뽑아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양식의 한국 통사(韓國通史)이다. 이 책 제32권 「석지(釋志)」 ‘사찰(寺刹)’ 항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흥국사(興國寺)를 …금상(今上) 무진년(1748, 영조24)에 내가 송경(松京)을 유람하면서 유적(遺跡)을 찾아보니, 절의 옛터가 부내(府內) 북부(北部) 병부교(兵部橋) 서남쪽에 있는 해온루(解慍樓)의 북쪽에 있었다. 3층의 부도(浮屠)가 밭 가운데에 있는데, 높이가 겨우 어깨에 미쳤으며, “보살계(菩薩戒)를 받은 자제(子弟)인 평장사(平章事) 강감찬(姜邯瓚)이 나라가 태평하고 국내가 안정되기를 빌기 위해 공경히 이 탑을 만들어서 영원히 공양에 충당한다. 때는 천희 5년(1021, 현종12) 5월이다.[菩薩戒子弟 平章事姜邯瓚 奉爲邦家永泰 遐邇常安 敬造此塔 永充供養 時天禧五年五月日也]”라는 38자가 새겨져 있었다.… 혹자는 강감찬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강감찬(姜邯瓚)의 이름자 가운데 찬(瓚) 자를 『고려사』에서는 모두 찬(贊) 자로 써서 구슬 옥(玉) 변이 없는데, 탑에 새겨진 것을 정확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견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천희 5년(1021, 현종12) 5월'이란 뚜렷한 기록이어서다. '강감찬(姜邯瓚)'에 대한 기록으로는 이 부도가 가장 빠른 기록이 아닌가 한다.)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유득공(柳得恭,1748~1807)의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성해응(成海應,1760~1839)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 『연천집(淵泉集)』 등 실학자들의 글에서 종종 목격된다. 1907년 서우학회(西友學會)에서 발간한 잡지명도 『姜邯瓚』이고 「조선중앙일보」 1934년 12월 7일 기사도 ‘姜邯瓚塔을 博物舘에 移轉’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강감찬(姜邯贊)’으로 널리 쓰인 것은 『고려사』 94권 〈강감찬전(姜邯贊傳)〉, 『고려사절요』3권 〈현종 10년조〉 기록을 따라서 인듯하다. 그러나 이 기록들이 모두 조선에 들어 와 만들어진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관심 있는 연구자들의 고증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강감찬' 한 자 번역조차 이렇게 어렵다. 사람살이야 말하여 무엇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