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절교론(廣絶交論)’과 ‘비절교론(非絶交論)’

2023. 1. 5. 12:35카테고리 없음

‘광절교론(廣絶交論)’과 ‘비절교론(非絶交論)’

 

 

1.

오늘 아침 나보다 연배가 높으신 지우(知友)께서 글을 보내오셨다. ‘오교삼흔(五交三釁)’이란 글이다. ‘잘못된 다섯 사귐에서 오는 세 가지 흠’이라. 이 고사의 출전은 중국 양(梁) 나라의 학자 유준(劉峻, 458~521)이 쓴 ‘광절교론(廣絶交論)’이 출처이다. 한때 황문시랑(黃門侍郞)을 지냈고 당대의 대문장가였던 임방(任昉)의 아들들이 몰락하여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평소 임방에게 은혜를 입었던 자들 그 누구도 그 아들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세태를 보고 탄식하여 지은 글이란다. 한(漢) 나라 주목(朱穆)이 ‘절교론’을 지었는데 그것을 부연한다는 뜻에서 ‘광(廣)’자를 붙여 ‘광절교론’이라 하였다. 

 

다섯 가지 사귐이란, 세교(勢交, 권세 있는 자에게 붙는 사귐)‧회교(賄交,재물 있는 자에게 알랑거리는 사귐)‧담교(談交, 세치 혀로만 살살거리는 사귐)‧궁교(窮交,궁할 때 찾다가 한순간에 등 돌리는 사귐)‧양교(量交,이익을 재는 사귐)를 말한다. 유준은 자기 잇속만을 위하는 사귐인 ‘이교(利交)’라며 이 다섯 사귐을 ‘장사치의 물건 팔기’라 하였다.

 

이 다섯 가지 사귐에는 세 가지 문제가 생기니 이것이 삼흔이다. 삼흔의 ‘흔(釁)’은 결점이란 의미다. 그 세 가지 흠은 첫째 패덕진의 금수상약(敗德殄義 禽獸相若, 덕에 어긋나고 의리를 무시하여 금수와 다름이 없는 자), 둘째 난고이휴 수송소취(難固易攜 讎訟所聚,마음이 굳지 못하고 쉽게 이끌려 다툼질 속에 사는 자), 명함도철 정개소수(名陷饕餮 貞介所羞, 탐욕에 빠져 명예를 실추하여 지조 있는 이들이 수치로 여기는 자)이다. 

 

그렇다면 유준이 원하는 사귐은 무엇인가. 그는 이러한 사귐을 소교(素交)라 한다. ‘소교’의 ‘소(素)’ 본디, 흰, 맑음 이란 뜻이다. 그러니 소교의 사귐이란 가식 없는 맑고 순결한 벗 사귐이다. 

 

2.

 

그런데 유준의 이 ‘광절교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이가 있다. 춘소(春沼) 신최(申最,1619~1658)이다. 춘소는 그의 『춘소자집(春沼子集)』 ‘비절교론(非絶交論)’에서 유준의 ‘광절교론’을 속 좁다며 이렇게 말한다. 

 

교제할 상황이면 교제하고 절교할 상황이면 절교하면 된다. 찾아오는 것을 보고 떠나갈 줄을 알며 떠나가는 것을 보고 찾아올 줄 안다. 한번 오고 한번 가는 것, 나는 이익이나 손해에 무관하니 어찌 일률적으로 세상의 교분을 끊을 수 있겠는가?(當交則交 當絶則絶 見其來也而知其去也 見其去也而知其來也 一來一去 吾無與加損 何可槩以絶世之交云爾哉)

 

 

춘소의 말은 상황에 맞춰 교제할만하면 교제하고 절교할만하면 절교하면 된다는 말이다. ‘광절교론’이 절교의 원인을 벗에게서 찾았다면 신최 선생은 교제의 주체는 나이기에 절교 또한 벗과 상관없는 나에게서 찾는다.벗이 나를 찾는 것은 권세나 명성을 보고 찾고 떠나는 것이기에 벗이 나에게 이익이나 손해를 주는 게 없다한다. 춘소는 벗에 대해 사뭇 냉소적이다.

 

바야흐로 그가 찾아오는 이유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요 권세와 명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또 그가 떠나가는 이유는 나를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요 내게 권세가 없고 명성이 없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다만 권세와 명성의 유무로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찾아오고 떠나가니 찾아온다고 해서 기뻐할 만한 것이 무엇이며 떠나간다고 해서 슬퍼할 만한 것이 무엇이겠는가?(方其來也 非愛吾也 愛勢愛名也 且其去也 非惡我也 惡無勢惡無名也 特勢與名之有無 而人爲之來去 來何足喜而去何足戚也?)

 

3.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1803∼1877)는 유준의 ‘광절교론’도, 춘소의 ‘비절교론’과 다르다. 혜강은 『인정(人政)』, 「오륜(五倫)」 ‘절교(絶交)’에서 이렇게 적어 놓았다.

 

절교는 다양하여 그가 먼저 끊는 것도 있고 내가 먼저 끊는 것도 있고 남에게서 들은 일 때문에 끊는 것도 있고 일이 맞지 않기 때문에 끊는 것도 있다. 혹 끊었기 때문에 유익한 것이 있고 무익한 것이 있으며 끊었기 때문에 도리어 해로운 것도 있다.(絶交多端 有彼先絶者 有我先絶者 有爲人所間而絶者 有爲事不遇而絶者 或因絶而有益者 或有無益者 或因絶而反有害者)”

 

혜강은 절교를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첫째 그가 먼저 끊는 경우, 둘째 내가 먼저 끊는 경우, 셋째 남에게서 들은 일 때문에 끊는 경우, 넷째 일이 맞지 않아 끊는 경우이다. 또 여기에는 절교로 인한 세 가지 결과를 든다. 절교하여 유익한 경우, 무익한 경우, 해로운 경우이다.

 

4. 

새해가 밝았다. 이맘때면 수첩을 꺼내들고 절교 명부를 만드는 이들이 많다. 내 수첩의 이름 석 자를 내가 지우는 경우도 있고 저쪽 수첩에서 내 이름 석 자가 지워지는 경우도 있다. 맺은 인연(因緣)이 이연(離緣)이 되는 순간이다. 모쪼록 나든 저쪽이든 소교(素交)는 못 되어 절교했으리라. 이왕지사 절교했으면 무익보다는 유익했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이 새해에, 지우 분이 나에게 ‘광절교론’을 보내 온 의미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