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언론 <민들레>에 가입하며

2022. 11. 15. 07:25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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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언론 <민들레>에 가입하며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가 되기를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라는 제하의 민들레 신문이 창간되었다. 축하하며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창간 일성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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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시민 언론 민들레에 가입하며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라는 제하의 민들레 신문이 창간되었다. 축하하며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창간 일성으로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 155명 공개합니다’를 보고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희생자 명단 공개는 당연하다.

(사실(事實)은 이태원에 간 분들의 참사이다. 그러나 진실(眞實)은 이태원이란 특정 장소도, 그곳에 왜 갔느냐는 목적도 아니다. 진실은 국가 공권력의 태업(怠業)이요, 방기(放棄)로 인한 참담한 희생이기 때문이다.
 
국가애도기간 선포도 그런 연유에서 아닌가. 국가는 그날 그 시각부터 그분들의 이름과 안치 병원을 알려야 했다. 희생자 분들의 아픈 이름을 위패에라도 모시고 그 가족들의 손을 잡고 함께 슬퍼해야만 했다.
 
후일 그 자리에 한 분 한 분 이름을 새겨넣은 위령비라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그 피어보지도 못한 넋들의 곡성이 조금은 잦아들지 않겠는가? 가족분들 모임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 이름을 숨길게 아니라 한 분 한 분, 희생자로서 그 이름을 부르며 아파해야 한다. 이것이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한 의미이다.
 
하지만 참사 전에도 참사 후에도, 공권력은 작동하지 않았고 않고 있다. 우리는 일그러지고 후안무치한 공권력의 행태에 참담함을 느낄 뿐이다.)
 

이미 외국 언론은 참사자 사진까지 상세히 보도하며 애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이하 생략한다.
모쪼록 '권력보다 펜이 강하다'는 직필로써 이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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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인천일보>2022.01.25 15면(http://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9476)에
쓴 나의 언론관이다.
[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 (2)언론, '광제일세(匡濟一世)' 세상을 지향해야 - 인...
“선제타격”, “살인멸구(殺人滅口)”, “무식한 삼류 바보들”, “영화 같은 현실에 공포”, …도사와 법사, 박물관에 박제된 “멸공”을 살려내...www.incheonilbo.com


[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 (2)언론, '광제일세(匡濟一世)' 세상을 지향해야




미(美)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하고
자(刺) 미운 것은 밉다하며
권(勸) 선을 권장하고
징(徵) 악을 징계해야

“선제타격”, “살인멸구(殺人滅口)”, “무식한 삼류 바보들”, “영화 같은 현실에 공포”, …도사와 법사, 박물관에 박제된 “멸공”을 살려내 불을 지피고 확증적 편향을 술술 내뱉는 후안무치형 정치 논객,…모두, 사이비 언론 잘못이다. 저런 눈흘레와 혐오성 어휘 나열이 언론인가. 언어 수준이 폭력과 저열, 퇴행인 황색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이다. 과장보도에 선정적인 제목, 남·녀·노·소와 지역 갈라치기, 무지(無知)와 교언(巧言)으로 옳고 그름을 어지럽게 만들고 국론을 분열시키는 천박한 글과 말이 하수구 물 역류하듯 한다. 공정성, 공익성, 정론을 생명으로 하는 언론의 비평 없는 보도는 사뭇 야만적인 작태다. '개는 요임금을 보고도 짖는다'는 사실 전달은 언론 기사가 아니다. 국민은 집단지성은커녕 집단혼돈 속으로 빠져들어 민주주의는 파괴되고 국격은 한없이 추락한다. 2019~2020년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에서 발표한 한국 '언론신뢰도'가 46개국 중 최하위인 46위라는 사실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러니 기사에 달리는 댓글마다 난잡한 저주성 어휘들로 자음 17자 모음 11자를 가을 도리깨질하듯, 조자룡 헌 칼 쓰듯 하니 훈민정음도 곡(哭)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정경이다.

그렇다면 언론은 무엇을 어떻게 써야하는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은 '미자권징'이라 답한다. 언론인 말 한 마디, 글 한 줄은 그 나라 여론을 형성한다. 막힌 것은 소통케 하고 시무(時務, 그 시대에 다급한 일)에 대해서는 북극성과 가늠쇠 역할을 해야 해서다. 선생은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하고 미운 것은 밉다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려는 뜻이 없다면 시가 아니다(非有美刺勸徵之義非詩也)”라 하였다. 여기서 시는 글이고 이러한 글이 바로 시대의 공민(共悶)을 아우르고 인간으로서 아름다운 공명(共鳴)을 펴는 정론(正論)이다.

언론이라 함은 골수에 박힌 나랏병을 고치려는 결기가 있어야 한다. 마음속에 부글부글 울분을 토해내듯, 도끼 하나 옆에 놓고 '오두가단(吾頭可斷)' 각오로 손등에 서슬 퍼런 정맥 솟게 붓을 잡아야 한다. 시비를 가르는 죽비소리 같은 글과 말은 정언명령이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이나 뽑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내시 이 앓는 소리인지 웅얼웅얼 쓰다말거나 엉뚱한 요설(饒舌)로 속내를 감춘, '홀수 쪽과 짝수 쪽 사이에 책갈피를 넣으려는 글과 말'은 언론이 아니다.

육하원칙에 맞추어 기승전결, 정연한 글과 말이라고 언론이 아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돼지들은 읽고 쓰는 게 완벽하다는 이유로 특권을 누린다. 바로 미자권징 없는 언론 기사가 저 동물농장 짝이다. 공적인 선을 지향해야 정론이요, 직필이다. 우리 사회가 이렇듯 선악조차 모르게 변한 것은 선을 가장한 언론사주나 물질만을 탐하는 언론인척하는 사이비 언론이 그 주범이다.

다산은 서슬 퍼런 세도정치 시절 “천하가 이미 썩어 문드러진 지 오래다”라 토혈하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라 하였다. 자본, 권력, 불의, 요령이 세상살이에 더 편하고 그런 불한당들이 더 잘 사는 사회를 조장하는 언론은 언론이 아니다. 자고로 언론인이라면 '총보다, 칼보다, 펜이 더 강하다'는 신념 하나쯤은 가슴에 품어야 한다. 사회의 공분(公憤)을 개혁하고 미래를 밝힐 공기(公器)로서 언론이기 때문이다.

언론은 이 시대의 언관(言官)이다. '글과 말로 세상을 바로잡아 구제'하려는 '광제일세를 지향해야 한다. 언론은 그래, 이 막돼먹은 세상의 파수꾼으로서 방부서(防腐書)를 써야 한다. 늘 세상을 눈구석에 쌍가래톳이 설 정도로 톺아보아야 하는 이유다. 이것이 언론 사명이요, 나아갈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