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감 선거 즈음에

2022. 5. 27. 15:58카테고리 없음

교육감 선거 즈음에

 휴헌  10분 전
지방선거를 한다. 선생이라 그런지 ‘교육감’에 더 관심이 간다. 후보들의 공약을 훑어본다. 그 중, ‘이 후보는 안 되겠는 걸’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게 우수한 몇몇 아이들을 위한 ‘수월성교육’에 치중된 공약이어서다. 공부의 목적은, 경쟁이 아니라 마음공부이다. 끊임없는 경쟁 교육은 공부의 야만성이요, 폭력성이다. 많은 학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저러한 경쟁 속에서, 폭압적인 공부의 야만성에 노출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 공부 이야기 한 번 해본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Schopenhauer, Arthu)는 그의 『문장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책벌레가 되지 마라.”

 

책을 마음으로 읽지 않으면 읽어도 소용없다는 뜻이다. 공부는 ‘머리공부’가 아닌 ‘마음공부’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공부의 진정성 아닌가.

황현(黃玹, 1855~ 1910) 선생, 조선의 뒷자락이 몇몇 파렴치한 수월성교육의 수혜를 받은 만고의 역적들에 의해 댕강 베어져버린 1910년 8월 29일, 그로부터 꼭 열흘째 황현 선생은 목숨을 끊는다는 <절명시(絶命詩)> 네 수를 짓고 이승을 달리한다. 그 둘째 수 결구는 이렇다.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難作人間識字人).”

나라를 빼앗긴 나이 쉰하고 여섯의 늙은 지식인으로서 어찌 할 지는 명확하다. 창검의 기치를 높이 들 수도, 굴욕적인 삶을 살 수도 없으니 죽을 밖에. 허나, 생목숨 떼는 일이 어디 쉽던가. 오죽하였으면 마음공부를 다부지게 한 저 이도 이러한 시를 지었겠는가. 저 이의 말씀대로, ‘글 아는 사람 노릇’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조선 8도에 어디 황현 선생만 글자를 배웠던가. 황현 선생 같은 이를 손가락 몇으로 헤는 것을 보면, 대부분 머리공부만 하였거나 마음공부가 짧은 것이다.

우리 역사상 공부의 최고수이신 이황(李滉, 1501~1570) 선생께서 ‘학문의 자세’를 읊은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12수도 그저 이렇다.

 

우부(愚夫)도 알며 하거니 긔 아니 쉬운가?

성인(聖人)도 못다 하시니 긔 아니 어려온가?

쉽거나 어렵거나 가운데에 늙는 줄을 몰래라.

 

이황 선생은 공부가 ‘쉽기도 어렵기’도 하단다. 어리석은 우부도 능히 할 수 있는 게 공부지만, 성인이라도 경지에 이를 수 없는 것이 공부라는 뜻이다. 배움이 시작이라면 배움의 실천은 끝이다. 어리석은 자도 배워 알 수 있지만 성인이라도 배운 바를 실천하기는 어렵기에 하는 말씀이다. 공부는 마음공부여야 한다는 말이니, 공부의 비등점(沸騰點)은 이러하여 없다. 제대로 공부한 이들이라면 저 익은 벼처럼 고개를 숙이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여, 지금도 유학 갔다 왔다고, 1류 대학 나왔다고, 공부깨나 한 박사랍시고, 거들먹거리는 분네들 자중자애해야 한다. 제 논문에 온갖 좋은 글은 다 써 갈겨 놓고 행동은 영 딴판이니, ‘인간공부’라는, ‘마음공부’라는 문패를 큼지막하게 내 건 인문학 집안에, 파산위기가 아니 오겠는가.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書自書 我自我)’ 이니, 두 뼘도 안 되는 거리건만 머리와 가슴이 하염없이 멀고도 멀다. 모쪼록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는 교육감을 잘 뽑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