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심(詩心), 그리고 기생(妓生)(7) (부용(芙蓉))

2022. 5. 6. 17:18카테고리 없음

 
7.

부용(芙蓉)1)은 성천(어떤 이는 평양이라고 한다)의 명기이다.

호는 운초(雲楚)이니 문장으로 한 시대를 울렸다. 일찍이 소약란(蘇若蘭)2)의 직금회문체(織綿回文體)3)를 모방하여 회문상사시(回文相思詩) 36운을 지어 그녀가 정을 둔 남정네에게 주었다. 그 시가 한 자, 두 글자로부터 구를 쫓아서 한 글자씩 더하여 변려(倂儷)를 이루니 천하에 없는 절창이었다.

그 시는 이렇다.

 

헤어짐別

보고픔思

길은 멀고路遠

소식 더뎌信遲

생각은 임에게念在彼

내몸은 여기에身留玆

수건과 빗 눈물에 젖었건만巾櫛有淚

가까이 모실 날은 기약 없어紈扇無期

향기론 누각 종소리 울리는 밤香閣鍾鳴夜

연광정4)에서 달은 떠오릅니다練亭月上時

외론 베개 기대어 못 다한 꿈 놀라 깨倚孤枕驚殘夢

가는 구름 바라보니 먼 이별에 슬픕니다望歸雲悵遠離

만날 날만을 근심으로 손꼽아 기다리니日待佳期愁屈指

새벽마다 정 밴 글 펴들고 턱 괴고 울지요晨開情札泣支頣

초췌한 얼굴로 거울 대하니 눈물만 흐르고顔色憔悴開鏡下淚

흐느끼는 노랫소리 기다리는 슬픔 머금었네歌聲嗚咽對人含悲

은장도로 애간장을 끊어 죽는 것 어렵지 않으나提銀刀斷弱膓非難事

비단신 끌며 먼 하늘 바라보니 의심만 자꾸 느네躡珠履送遠眸更多疑

봄 지나 가을도 안 오시니 낭군은 어찌 신의가 없나요春下來秋不來君何無信

아침저녁으로 먼발치에서 바라보니 첩만 속는 게 아닌가요朝遠望夕遠望妾獨見欺

대동강이 평지가 된 뒤에나 말을 몰고 오시려 하시는지요湞江成平陸伋鞭馬其來否

장림이 바다로 변한 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오시려는지요長林變大海初乘般欲渡之

전일 이별한 뒤 만날 길 막혔으니 세상일을 누가 알 수 있고前日別後日阻世情無人其測

어찌 그리 끊어져 놀람을 그리 품었는지 하늘의 뜻 누가 알리胡然斷愕然懷天意有誰能知

운우무산에 행적이 끊기었으니 선녀의 꿈을 어느 여인과 즐기시나요一片香雲楚臺夜仙女之夢在某

월하봉대에 피리 소리 끊기었으니 농옥의 정을 어느 여인과 나누십니까數聲淸蕭奏樓月弄玉之情屬誰

생각 말자해도 절로 생각나 대고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젊은 얼굴 아깝구나不思自思頻倚牡丹峯下惜紅顔色

잊고자 해도 잊기가 어려워 다시 부벽루 오르니 외려 검은머리 꾸밈만 가련해라欲望難忘更上浮碧樓猶憐綠鬢儀

외로이 잠자리에 누워 검은 머리 파뿌리 된들 삼생의 가약이 어찌 변할 수 있으며孤處深閨頭雖欲雪三生佳約焉有變

홀로 빈 방에 누워 눈물이 비 오듯 하나 백 년을 정한 마음이야 어찌 바꿀 수 있으랴獨宿空房淚下如雨百年定心自不移

낮잠을 깨어 창을 열고 화류소년을 맞아들이기도 하였지마는 모두 정 없는 나그네뿐罷晝眠開竹窓迎花柳少年摠是無情客

향내 나는 옷을 입고 옥 베게를 밀치고는 동년배와 가무를 해도 모두 가증한 사내뿐香衣推玉枕送歌舞同春莫非可憎兒

천리 밖 임을 기다리고 기다림이 이토록 심하니 군자의 박정은 어찌 이토록 심하십니까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之薄情如是耶

끼니때마다 문을 나가 바라보고 바라보니 슬픈 천첩의 외로운 심정은 과연 어떠하겠는지요三時出門望出門望悲人賤妾之孤懷果何其

오직 너그럽고 인애하신 장부께서 결단을 내려 강을 건너와 머금은 정 촛불 아래 흔연히 대해 주세요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含情燭下欣相對

연약한 아녀자가 슬픔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어 외로운 혼이 달 가운데서 길이 울지 않게 해 주세요人勿使軟弱兒女含淚歸泉哀魂月中泣長隨

이 시는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이다. 이러한 시를 '층시(層詩)'라고도 하고, 또 탑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보탑시(寶塔詩)'라고도 한다.

운초가 김이양을 만난 것은 그녀의 나이는 겨우 19세, 당시 김이양의 나이는 77세였다. 무려 58세의 나잇살 차이이다. 그러나 시문을 통해 일찍이 김이양의 인품을 흠모해 온 부용은 평양에 머물면서 김이양의 신변을 돌보아 드리라는 사또의 명에 기쁜 마음으로 따랐지만, 김이양은 나이를 들어 거절하였다 한다.

그러자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연세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 라고 하여 부용을 거두게 되었다. 이 시는 김이양이 호조 판서가 되어 한양으로 부임하게 되어 이별하게 되자 쓴 시라고 한다. 건장한 풍채에 구레나룻 뻗친 헌걸찬 사내도 관후한 장자풍의 도포자락 휘날리는 점잖은 선비도 아니련만 팔십 객을 향한 순정이 되려 애달프다.

후일 김이양은 직분을 이용하여 부용을 기적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정식 부실(副室)로 삼았다가 83세로 벼슬에서 물러나자 부용과 한양 남산 중턱에 신방을 꾸몄다. 그 집을 녹천당(祿泉堂)이라 하였으며, 이곳을 찾는 이들은 운초를 '초당마마(草堂)'라 불렀다 한다.

그렇게 15년이 되는 1845년 이른 봄, 김대감은 부용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는데, 김이양은 92세요, 부용의 나이는 겨우 33세였다. 부용은 방안에 제단을 모시고 밤낮으로 김이양의 명복을 빌며 애통한 심정을 시로 달랬다. 그 중, 한 수를 보면 아래와 같다.

풍류와 기개는 호산의 주인 (風流氣槪湖山主)

경술과 문장은 재상의 기틀 (經術文章宰相材)

십오 년 정든 님 오늘의 눈물 (十五年來今日流)

끊어진 우리 인연 누가 다시 이어줄꼬 (峨洋一斷復誰栽)

눈물이 시어를 따라 흐른다. 시 구절마다 꿰어 놓은 김이양에 대한 정이 애처롭다. 부용은 고인과의 인연을 회상하면서 일체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오로지 고인의 명복만을 빌며 16년을 더 살았고, 그녀 역시 님을 보낸 녹천당에서 눈을 감았다. 임종할 때, 부용은 “내가 죽거든 대감마님이 있는 천안 태화산 기슭에 묻어주오.”라고 하였다.

사실 저 시절에 기생은 부용 같은 여인들이 많았다. 그녀들은 대개 나잇살깨나 든 양반들에게 노후를 의탁하였다. 노리개로 데리고 노는 젊은 첩이란 뜻의 ‘노리개첩’이니, 꽃처럼 가꾸고 본다는 ‘화초첩(花草妾)’은 그런 슬픈 여인들의 삶을 증명한다. 부용과 김이양 같은 사랑이 그래서 새삼 귀하게 여겨진다.

작자·연대 미상으로 1913년 신구서림(新舊書林)에서 간행한 활자본 소설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이라는 작품도 있는데, 우연히도 운초의 보탑시와 유사하다. 내용은 미모의 평양 기생과 서울 선비 김유성이 파란만장한 연애의 역정을 거쳐 혼인하기에 이른 이야기를 그린 애정소설인 점으로 미루어, 운초와 김이양 이야기가 소설의 원천 자료일 가능성이 크다.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면·송악면과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에 걸쳐 있는 태화산 <운초 김부용시비>

 

어떤 사람은 이 시가 평양 기생인 죽향(竹香)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또 아무개 어사에게 준 시가 있었다.

난새와 봉새 같은 풍모와 자태 길 오른편에 자라 비치고 鸞鳳風姿映道周

좁은 길 낀 집집마다 발을 걷어 갈고리로 걷어 올렸다네 家家夾路捲廉鉤

북쪽지방에 설령 양주지방에서 나는 유자가 있다 한들 北方縱有楊州橘

멍하니 수레 먼지를 바라보며 감히 던지지 못하옵니다 悵望車塵未敢投

1) 운초 김부용(金芙蓉, 1820~1869)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하였다고 한다. 열 살 때 부친을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마저 잃으니, 어쩔 수 없이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2) 진(晉) 나라 때 장군(將軍) 두도(竇滔)가 사막(沙漠)에 강제로 옮겨지자, 그의 아내 소약란(蘇若蘭)이 비단을 짜면서 거기에 즉 전후좌우로 아무렇게 보아도 다 말이 되는 매우 처절한 내용의 회문선도시(回文旋圖詩)를 지어 넣어서 남편에게 보냈던 데서 온 말인데, 그 시는 모두 8백 40자(字)로 됐다고 한다. 『晉書 竇滔妻蘇氏傳』

3) 직금회문체(織綿回文體)란 직면에 수놓은 회문시의 문체를 말한다. 그리고 ‘회문시란(回文詩)’란 첫 글자부터 순서대로 읽어도 뜻이 통하고, 제일 끝 글자부터 거꾸로 읽기 시작하여 첫 자까지 읽어도 뜻이 통하는 시를 말한다.

4) 연광정(練光亭)은 평양에 있는 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