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시집』을 보다가

2022. 4. 1. 15:54카테고리 없음

 『한산시집』을 보다가 이 봄, 벙그레 꽃망울 터지듯 웃는다. 한산은 스님이라는 데 스님치고는 장난기(?)가 여간 아니다.

 

총명한 놈 명줄은 아주 짧고    (聰明好短命) 

바보같은 놈 도리어 오래살아   (癡騃卻長年)  

멍청한 놈 재물이 넘쳐나는데   (鈍物豐財寶) 

깨쳤다는 놈은 무일푼이로구나  (醒醒漢無錢) 

 

내가 연구하는 실학파 분들은 대부분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찰가난꾼들이다. 그중, 간서치 이덕무와 영재 유득공이 있다. 

 

“내 집에 가장 좋은 물건은 『맹자』 7책뿐인데, 오랫동안 굶주림을 견디다 못하여 돈 200닢에 팔아 밥을 잔뜩 해 먹고 희희낙락하며 유득공에게 달려가 크게 자랑하였소. 그런데 영재 역시 굶주림이 오랜 터이라, 내 말을 듣고 즉시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그 남은 돈으로 술을 사다가 나에게 마시게 하였으니, 이는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左丘明 : 『춘추좌전』 저자)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이덕무, 『간본 아정유고』 제6권 문(文)-서(書), 「이낙서(李洛瑞) 서구(書九)에게 주는 편지」 구절이다. 이덕무와 벗 유득공의 지독한 가난이다. 고양이 죽 쑤어 줄 것 없고 생쥐 볼가심할 것 없는 가난이었다. 그러한 가난이건만 책 팔아 굶주림을 면하는 장면이 꽤 희화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은 지독한 가난을 고독한 글쓰기로 이겨냈다. 

 

총명하고 깨친 분들이었지만 서얼이었다. 이덕무는 53살에 유득공은 그보다 조금 더 살아 60살로 생을 마쳤다. 세상 복은 어지간히 없는 분들이다. 내 살림이 없다한들 두 분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고 나이 또한 유득공보다도 더 살았다.

 

저이들 가난 훔쳐 글 몇 자 쓰자니 꽤 송구하고 겸연쩍다. 다만 ‘나 역시 내 서재 책 팔아 술 받아먹을 날이 올지 모르겠다’ 생각하니 조금은 덜 미안한 듯하다. 하지만 저 시절에는 그래도 책값이 비쌌지만 이 시절에는 폐휴지로 달아 파니 술값이 나올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