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16일 Facebook 이야기
2013. 2. 16. 23:59ㆍ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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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선생 외출기(2)
“어! 선생님 그 차림으로 학회에 가셨어요.” 문하생 중 가장 인간다운 맹 군의 말이 반갑게 나를 맞는다. 그러고 보니 요즈음 내가 제일 잘 입는 청바지 차림이다. 학회와 청바지 차림보다는 학회와 양복이 더 어울려서인가보다. 1997년쯤이던가. 여하튼 그때 처음 발표하러 모 학회를 갔을 때 나는 양복에 넥타이까지 잘 댕겨 맸다. 학회가 끝나고 술이 두어 순배 돌고,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간 선생님 논문은 국어국문학회에 0.01%도 도움을 안 주는 논문입니다.” 아무튼 그런 뉘앙스였다.
술집이면 어떠랴. 제자의 절을 선생님이 깍듯이 맞는다. 문하생들과도 인사를 나눈다. 처음 보는 얼굴이 많고, 앳된 얼굴들이 한 잔 술로 꽤 불그레하다. 요즈음 한학을 한다는 것도 기특하고, 가만 보니 상긋 웃는 얼굴이 참 잘들 생겼다. 나도 한자 책 옆에 끼고 저런 시절이 있었을 텐데…선생님은 늦게 자리에 참석한 50이 넘는 제자의 칭찬에 바쁘시다. “이 사람은 휴헌이라고 책을 여러 권 냈지. …” 그래, 선생님을 만나면 언제나 공부 맛이 난다. 중산 선생님은 우리나라 한학계에서 내로라하는 분이다. 언제나 책을 내면 선생님께 올리지만 묵묵하니 보시고는 “수고했네.”하신다. 내가 책을 열두어 권쯤 냈을 때, 비로소 “응 좋아 졌네.”하셨다. “수고했네.”에도 “응 좋아 졌네.”에도 진정성은 똑같다. 선생님께 모르는 것을 물으면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은 “몰라.” 두 글자다. 물론 다음날 반드시 전화가 온다. “응, 휴헌! 어제 그것은 이렇게 해석을 하는 걸세.” 그런 분이다. 참 마음이 정갈하신 분이시다. 스승은 모름지기 선생님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리를 파하고 사람 좋은 문하생과 종로로 자리를 옮겼다. 이야기 끝에 한 대학, 한 과에 부부교수가 있다는 말을 했다. 나와도 인연의 끈을 잠시 맺은 분들이다. 하마터면 “허어, 그런 일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시나브로 시간은 잘도 간다. 어제 나와 오늘이 되었다. 새벽 두어 시쯤, 택시는 성수대교를 넘는다. 문득 연암 박지원 선생의 호가 떠오른다. 그래, 웃을 소 두 개 ‘껄껄(笑笑) 선생’이시지. “껄껄!” 그래, 그 분은 조선후기를 그렇게, “껄껄”로 살아내셨지. 가로등도 따라 껄껄 웃고, 한강물에 떨어지는 달빛도 껄껄 웃는다.
애가 둘인가 셋인가한다는 내 또래 늙수그레한 택시기사의 말소리가 가스통 바슐라의 몽상과 겹치고 내 얼굴과 겹치고, …. 나는, 내 서재, 휴휴헌으로 간다.
2013년 2월 15일. -
간 선생 외출기(1)
4-5년은 자료를 모았건만 깜냥도 적공도 모자라선지 <고소설도의 목록화와 문화접변 연구>라는 꼴이 되지 않은 녀석을 들고 한양대에서 하는 학회를 찾았다. 학회 주제는 <고전문학의 재미, 흥미, 의미>였고, 학회가 끝날 즈음에 내가 이런 말을 하였다.
“의미는 있습니다만 재미와 흥미는 좀… 발표자께서 ‘체험의 연출’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대학로에서 이러한 학회를 열면 안 되겠는지요. 고소설이야 사실 저 대중들 것 아닌지요. 우리들만의 리그를 하는 것 같아…‘서사놀이’니 ‘전통콘텐츠의 발굴’이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고소설에 <산대놀이>, <무당놀이>, <춘향이놀이>, <글자풀이요> 등 고소설관련 놀이가 좀 많습니까. 그렇다면 그야말로 재미와 흥이 있는 발표장이 되지 않겠는지요.”
내 말만 귀양 보내는 셈치고 한 말이지만 유학자요 의병장 안방준(安邦俊,1573~1654) 선생의 <구잠(口箴, 입을 경계함)>이란 시가 불현 듯 스쳤다.
言而言 말 해야 할 때 말하고,
不言而不言 말해서 안 될 때 말하지 말고,
言而不言不可 말해야 할 때 말 안 하면 안 되고,
不言而言亦不可 말해서 안 될 때 말해서도 안 된다.
口乎口乎 입아! 입아!
如是而已 이렇게만 해다오.
늘 외우고 다니는 말이건만 하필이면 이때 잊을 건 뭐람. 하기야 논문과 교제를 끊은 지 5년 여 만이니 학회도 그만큼 안 나왔을 테고 현실감이 떨어 질만도 하다. 그래, 저녁에 정릉 사시는 중산 선생님 문하생이 모이는 날이라 가기로 했건만 학회가 끝난 뒤 뒤풀이에 따라 붙었다. 그냥가자니 내가 한 말이 저 차가운 강의실에 잔뜩 옹크리고 앉아 영 섭섭할 듯해서다. 고명딸 졸업식도 참석 못하고 온 학회 아닌가. 반기는 사람 없건만 1차는 소주에, 2차는 맥주까지 먹었다. 취기가 오르자 ‘이키나! 가스통 바슐라의 몽상기법 이야기 안 한 게 어디야’하는 생각이 든다.
전화를 걸어보니 정릉의 선생님께서도 자리를 옮기셨다. 서둘러 택시를 타고 정릉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