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연암> 출판사 서평입니다.

2012. 10. 9. 08:40카테고리 없음

 

 

                                                     <당신, 연암>  출판사(푸른역사) 서평입니다.

 

 

 

해학과 골계의 나, 박지원이 아닌
11인의 이인칭들이 불러보는 다양한 당신, 연암


2012년 ‘국경 없는 기자회’에서는 인터넷을 검열하는 국가 중 하나로 한국을 선정했다. 4년 연속 선정이다. 다양성이 존중받아야 하는 문화라는 숲은 질서와 효율이라는 강박 아래 몇몇 쓸모 있는 목소리만 사육되는 거대 목장으로 변화되고 있다. 풍자는 수상한 세상에 대한 수상한 전복이다. 그래서 인터넷을 횡행하는 해학의 그림자에는 탄광 속의 카나리아처럼 세태를 민감하게 읽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도사리고 있다.
연암은 《열하일기》 등을 통해 자유로운 필체로 조선 후기를 비판한 대표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18세기 조선에서는 시대정신을 바로잡고자 순정고문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연암은 그때 사유를 담는 그릇인 글을 어지럽히는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되며‘문체반정’의 중심에 서게 된 인물이다. 그 시대, 풍자로 너스레를 떠는 너머의 연암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책은 연암과 대립했던 유한준에서 연암을 연구하는 저자에 이르기까지 11명의 시선으로 바라본 다양한 연암을 모자이크처럼 맞춰 지금 여기에 소환한 평전이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당대의 시대정신을 비판한 역사적 인물로 바라볼 때 놓쳤던 연암의 입체적인 얼굴, 웃음과 역설 뒤에서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는가 하면 ‘세상이 돌아가는 꼴이 미워 소설을 썼던’역사 밖으로 나온 개인 연암과 마주할 수 있도록 했다.

시대와 불화했던 조선의 문제적 선비, 당신

“섭씨 233도! 화씨451도(섭씨 233도)는 책이 불타는 온도이다. 종종 언론통제용 상징으로 쓰이는 이 말은 진실과 정의의 소멸이라는 지知의 비극적 은유를 내포한다.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는 《화씨451도》에서 ‘불태우는 일은 즐겁다’로 시작하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그렸다. 연암의 손자뻘인 박남수 또한 《열하일기》가 못마땅하다면서 불을 붙였다.
이틀에 한 번 꼴로 7옥타브쯤의 고성을 내뱉는 세상이다. 순결한 양심을 간직하고 살아감이 그만큼 고통이다. 글깨나 읽고 쓴다는 자들의 책 따로 나 따로인 ‘서자서아자아書自書我自我’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저 시절 진실을 외면하려 했던 박남수의 행위는 지나간 현재와 미래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다. 이 시절 연암의 삶과 글이 현재성을 띠는 이유요, 연암의 삶과 글이 우리에게 비수처럼 꽂는 성찰이요, 미래의 예언이다. 구정물 같은 세상, 연암의 삶과 글로 정수처리 좀 하여 오이 붇듯 달 붇듯 진리, 정의, 양심이 넘실거리는 세상을 기대한다.”

-‘연암의 몽당붓조차 감당 못하는 깜냥’으로 연암의 평전을 쓴 이유에 대해서

‘사이비似而非는 아니 되련다!’ 연암의 평생 화두였다. 사이비란 ‘두루뭉술 인물’인 향원鄕愿이다. 향鄕은 고을이요, 원愿은 성실이니 고을의 성실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연암은 이 향원을 무척이나 싫어했고 저들로 인해 마음의 병을 얻었다. 향원이 실상 겉과 달리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아첨하는 짓거리를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향원은 말은 행실을 돌보지 않고 행실은 말을 돌보지 않는 겉치레만 능수능란한 자들이었다. 연암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했기에 “글자는 병사요, 뜻은 장수이고 제목은 적국”이라 규정하고 전쟁하는 마음으로 글쓰기를 했다. 글을 쓰며 연암은 문둥이, 파락호, 술미치광이라 불렸고 스스로를 조선의 삼류선비라 칭했다. 조선의 삼류선비 연암이 글 속에서 꿈꾼 세상, 인간다운 세상이었다.

너무나 유명한, 그러나 여전히 낯선 당신, 연암

“술 권하는 과거의 나라, 이 조선에서 태어난 나는 열일고여덟부터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스무 살 무렵부터는 더욱 심해져 속으로 볶다가 열화가 나 사나흘이나 잠 못 이루는 경우도 태반이었다. … 나는 장인과 처숙에게서 학업을 닦으며 과거를 생각했고, 깊은 우울증에 빠져들어 불면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나는 조선의 삼류선비다〉 중에서

이 책은 이러한 연암의 평전을 9할의 사실에 의거하되 1할의 저자 몫을 얹었다. 기존의 정전正典문화를 벗어나고자 11인의 필자도 내세웠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기에 본래적 결함을 지닌 존재다. 더욱이 모든 인간은 다층적이다. 인간 연암의 장단점, 호불호를 연암을 둘러싸되 다양한 위치에 있는 11인의 입을 통해 그리려 했고, 이는 온전히 11명 필자의 몫이다. 11인의 필자는 각각 연암의 삶의 결절인 문장, 성정, 학문, 미래를 나누어 연암의 빛과 그림자를 기술했다.

“이제 나는 거울을 가져다가 내 얼굴을 본다. 책을 펴 연암의 글을 읽으니 연암선생의 글이 곧 지금의 나로구나. 다음날 거울을 가져다 보고 책을 펴 읽으니 그 글이 내일의 나로구나.”
- 《연암집을 절대 간행될 수 없소》 박규수가 바라본 연암 중에서.

1부의 키워드는 ‘문장’이다. “종로를 메운 게 모조리 황충蝗蟲(벼를 갉아먹는 메뚜기)이야!” 황충은 백성을 숙주로 삼아 기생하는 양반을 기생충으로 통매하는 풍유이다. 〈민옹전〉에서 연암은 문벌을 밑천 삼고 뼈다귀를 매매하며 무위도식 양반에게 입찬소리를 해댔다. 문장은 곧 그 사람이다. 그 시절 연암 박지원은 문장으로 빛났고 문장으로 인해 버거운 삶을 살아냈고, 이 시절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남았다. 연암과 평생 등 돌린 유한준, 문체반정으로 각을 세운 군주 정조, 《연암집》을 간행하려다 끝내 실패한 후손 박규수를 통해 1부에서는 연암의 문장을 따라잡았다.

“영락한 시절 술미치광이라 불리니/인간세상 어느 곳이 발 가는 곳이랴/젊어서는 도리어 세상을 탄식하더니/중년에는 드리어 신선이 되려 하네/차차리 경륜으로 세상에 지낼 망정/과거 보아 문장으로 인정받진 마소서/흰머리 남루한 옷 아이들도 비웃지만/벌열로서 이 같음에 부인께 부끄럽네”
- 〈운 앞엔 빚쟁이가 기러기처럼 줄 섰고〉연암의 부인 이씨가 바라본 연암 중에서

2부는 ‘성정’이다. “개를 키우지 마라.” 연암은 아들 박종채에게 이리 일렀다. 그 이유에 대해 연암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개는 주인을 따르는 동물이니 개를 죽임은 차마 못할 일이라 처음부터 기르지 않느니만 못하는구나.”양반이 아니면 사람이기조차 죄스러웠던 시절, 개에게도 곁을 주었던 연암의 성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연암이 이승과 하직하자 뒤를 따르듯이 그 다음 날 조용히 눈을 감은 청지기 오복, 연암이 평생 사랑한 부인 이씨, 그리고 둘째 아들 박종채 등 당대 그 누구보다 연암을 가까이 보았던 가족의 눈에 비친 인간 연암의 성정은 어떠했을까? 2부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한다.

“세상 사람들은 모난 것을 싫어하고 둥근 것을 좋아한다. 글자를 써서 글을 만드는 데에도 무너지고, 풀어지며, 기름지고, 미끈하나, 실은 다 아슬아슬해 계란을 포개놓은 것 같다. … 매형은 글자를 쓸 때 삐쭉하건, 모나건, 비스듬하건, 바르건 못 쓰는 것이 없다. 다만 둥근 것을 싫어한다.”
-〈글쓰기는 전쟁이다〉 연암의 처남 이재성이 바라본 연암 중에서

3부는 ‘학문’이다. “기와조각과 똥거름, 이거야말로 장관일세!” 실학자 연암은 청나라 여행 중, 끝없이 펼쳐진 요동벌에서 ‘한바탕 울고 싶다!’라 했고, 기와조각과 똥거름을 보곤 ‘이거야말로 장관!’이라고 외쳤다. 연암은 정쟁으로 날을 새는 소국 조선의 선비였다. 그래서 저 거대한 요동벌에서 한바탕 울었고, 기와조각과 똥거름에서 조선의 미래를 찾았다. 이것이 학문을 하는 조선 선비 연암이 울고 감탄한 이유다. 연암의 학문은 실학이었다. 그 학문의 길을 3부에서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과 호협한 제자인 무사 백동수, 그리고 평생지기 유언호에게 들었다.

“아이들이 나비를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앞다리는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을 벌리고 앞으로 가서 손을 닿을 동 말 동 할 때, 나비는 날아가고 만다. 사방을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겸연쩍게 웃고 부끄러운 듯 성난 듯한 이 경지가 바로 사마천이 글 지을 때다.”
-〈백지에 조선의 달빛 같은 글이 떨어진다〉 저자 간호윤이 바라본 연암 중에서

4부는 ‘미래’이다. “《연암집》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지.” 연암의 글과 갑신정변을 연결하는 박영효의 말을 추리자면 저렇다. 조선은 유학의 나라였다. 유학은 사람이 사는 아름다운 나라를 지향하지만, 저 시절 아름다운 조선은 없었다. 연암은 유학자로서 조선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었고, 우리가 찾는 세상도 다를 바 없다. 연암 자신과 이 책을 쓰는 저자가 필자로 나섰다.

인간다운 세상을 바랐던 우리 옆의 인간, 연암

“개를 기르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씀은 아버지의 성품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결절이시다. 나는 이 말씀이 아버지 삶의 동선이라고 생각한다. …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개는 주인을 따르는 동물이다. 개를 기른다면 죽이지 않을 수 없으니 처음부터 기르지 않느니만 못하구나. 이 시대, 누가 저 견공들에게 곁을 주겠는가. … 아버지께서는 또 기러기는 형제를 뜻한다고 잡숫지 않으시고 까마귀는 반포지효의 새라며 애틋하게 대하셨다. 나는 아버지 외에 이런 분을 뵌 적이 없다.”
-〈개를 키우지 마라〉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바라본 연암 중에서

이 책은 인간다운 세상을 꿈꾼 연암의 궤적을 4부에 걸쳐 좆는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연암 땅에 말을 키워보려는 원대한 목축업 구상, 요동지역을 우리 조선의 땅이라 역설하는 강개함, 한 줌의 상투나 붙잡고 흰옷을 숭상하는 어리석음을 직시하는 연암도 만난다.
지금도 연암을 풍자로 세상을 비판한 당대 지식인 정도로만 읽는 경우가 많다. 연암은 시대와 불화하며 전쟁하는 마음으로 꾹꾹 눌러 글을 썼다. 낮은 백성들과 개를 세상의 한복판에 양반과 함께 두었다. 해학과 골계를 걷어내고 바라본 연암은, 조선의 신음 하나하나를 글로 거두며 때로는 함께 호탕하게 웃고 때로는 같이 졸렬하게 진흙탕을 뒹구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조선이 인간다운 세상이기를 바라는 문둥이 삼류선비였다.
문둥이라 불린 조선의 삼류선비 연암이 뿌린 ‘인간’이란 역병이 조선의 후예들에게 강하게 전염되는 그 날이, 《연암집》의 먹물들이 글발마다 살아나 열을 지어 행진하는 ‘인간다운 세상’이라고 믿는다. 이 책이 그런 어울림을 환기시키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