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가 되지 마라

2009. 2. 12. 15:43카테고리 없음

책벌레가 되지 마라

선생이라 그런지, 서울 위성도시에 살면서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후보들의 공약도 훑어보았습니다. 그 중, '이 후보는 안 되겠는 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인 제가 생각하여도 지나치게 우수한 몇 아이들을 위한 ‘수월성교육’에 치중된 공약이더군요. 공부의 목적은, 경쟁이 아니라 마음공부여야 합니다. 끊임없는 경쟁은 공부의 야만성입니다. 많은 학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저러한 경쟁 속에서, 폭압적인 공부의 야만성에 노출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제 생각이 여지없이 틀렸습니다.

그래, 공부 이야기 한 번 해보겠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Schopenhauer, Arthu)는 그의 『문장론』에서 이렇게 말했다지요.

“책벌레가 되지 마라.”

책을 마음으로 읽지 않으면 읽어도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공부는 ‘머리공부’가 아닌 ‘마음공부’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공부의 진정성입니다. 마음공부는 뜻을 세움이지요. 하여, ‘뜻(志)은 만사의 근본(志者萬事之根柢)’입니다.

“말은 다함이 있지만 뜻(志)은 다함이 없는 법(言有盡而意無窮)입니다”

마음을 가다듬어 먹을 갈며 묵향(墨香) 속에 넣어 둔 마음은 말이 없습니다. 그러니 작품들을 제대로 읽어보려면 글의 행간(行間)을 짚어가며 따지면서 읽고, 내 뜻으로써 저 이의 뜻을 읽어낸다는 이의역지(以意逆志)로써 헤아려야 합니다. 작가들이 종종 사용하는 수사적 기교 속에 독자에게 은밀히 건네는 시사점은, 우리가 ‘고매함으로 위장한 한 글들’에서 종종 발견하곤 하는 ‘인식되지 않는 불확실한 경계선’을 넘은 저쪽에 의연히 있습니다. 그저 글자만 읽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황현(黃玹, 1855~ 1910) 선생을 아시지요.

조선의 뒷자락을 예리한 칼로 베어버린 1910년 8월 29일, 그로부터 꼭 열흘째 황현 선생은 목숨을 끊는다는 <절명시(絶命詩)> 네 수를 짓고 이승을 달리합니다. 그 둘째 수 결구는 이렇습니다.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나라 잃은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한 법(亡國奴不如喪家之犬)’이지요. 배운 자로서 망국(亡國)의 백성인 그에겐 단 세 가지 길밖엔 없었습니다. 창검의 기치를 높이 들든가, 굴욕적인 삶을 살든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죽을 수밖에요. 허나, 나이 쉰하고 여섯의 늙은 지식인, 그저 생목숨 떼는 수밖에요.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용기나 양심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 저렇게 힘겹게 얻는 것이지요. 오죽하였으면 마음공부를 다부지게 한 저 이도 이러한 시를 지었겠습니까. 황현 선생을 보면 용기란 두려움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비틀거리며 행동하는 양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모든 책에는 실종된 정의는 그렇게 찾는 것이라고 씌어있습니다.

그래 저 이의 말씀마따나, ‘글 아는 사람 노릇’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조선8도에 어디 황현 선생만 글자를 배웠던가요. 그런데 황현 선생 같은 이를 손가락 몇으로 헤는 것을 보면, 대부분 머리공부만 하였거나 마음공부가 짧은 것이겠지요. 하여, 공부도사라 자임하는 분네들 자중자애해야 할 겁니다. 자칫 ‘인간공부’라는, ‘마음공부’라는 문패를 큼지막하게 내 건 인문학 집안에, 파산위기를 부른 장본인으로 지목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두 뼘도 안 되는 거리건만 머리와 가슴이 하염없이 멀어선, ‘행동하는 위선’의 표본실에 안치되기 십상입니다.

마음공부를 하려고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면, 저 서울시교육감이 되려고 읽는 책이라면 패대기쳐야합니다. 정녕 맹물에 조약돌 삶듯 머리로만 책을 보아서는 아니 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