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 106 애초부터 한 마리의 개가 되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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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윤의 실학으로 읽은 지금 - 한겨레:온
희대의 재판을 한 ‘조희대 청문회’에, ‘지귀연 룸살롱 접대설’까지 나온다. 법치국가 대한민국에 사는 민주시민으로서 한없이 부끄럽고 부끄럽다. 저런 자들을 지금껏 공경하고 정의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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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부터 한 마리의 개가 되지 말았어야 했다 - 콩나물신문
희대의 재판을 한 ‘조희대 청문회’에, ‘지귀연 룸살롱 접대설’까지 나온다. 법치국가 대한민국에 사는 민주시민으로서 한없이 부끄럽고 부끄럽다. 저런 자들을 지금껏 공경하고 정의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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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 106
애초부터 한 마리의 개가 되지 말았어야 했다.
희대의 재판을 한 ‘조희대 청문회’에, ‘지귀연 룸살롱 접대설’까지 나온다. 법치국가 대한민국에 사는 민주시민으로서 한없이 부끄럽고 부끄럽다. 저런 자들을 지금껏 공경하고 정의를 세워준다고 생각하고 받들어 모셨으니 말이다. 이를 보면 우리는 그동안 사법부가 ‘공정하다는 착각’ 속에 산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마저 든다. 저들 대부분이 ‘청맹과니(靑盲과니:겉으로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지만 실제로는 앞을 보지 못함)형(型) 법 종사자’들인데 말이다.
“나는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 1906~1962)의 말이다.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수백만 명 학살, 치클론-B 독가스 도입 및 운용, 리투아니아 8만 명 학살, 라트비아 3만 명 학살, 벨로 루시아 4만 5천 명 학살, 우크라이나 7만 5천 명 학살, 키예프 3만 3천 명 학살 계획 입안 등 모두 15가지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1961년 4월 11일 이스라엘 검찰이 반인륜적 범죄로 기소한 아이히만의 첫 재판이 열렸고 그는 위와 같이 말했다. 반인륜적 범죄자였지만 반성하기는커녕 상부의 명령과 법을 충실하게 이행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실상 그의 얼굴에는 반성의 빛이 없었다. 오히려 충성스럽게 ‘법’을 이행했다는 숙연함까지 맴돌았다.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영향을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처지도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하는 생각함의 확장성이 그에게는 없었다.” 재판장에서 이를 직접 지켜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나 아렌트는 ‘악’은 본래부터 악한 사람이 저지르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저지를 수 있다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이야기한다. 홀로코스트를 만든 그, 아이히만은 악마가 아닌 ‘생각할 능력이 없는 평범한 공무원’이었다는 말이다. 그는 다만 선과 악을 구분할 줄 모르며 관료제적 타성과 명령과 관례만 따른 ‘생각이 없는 법 수행자’였다. 물론 ‘생각이 없는 법 수행자’를 부추긴 것은 ‘생각이 없는 법 집행자’였으니, 당시의 사법부 판사들이다.
“무지는 용서할 수 있다. 지식의 부정이니까. 그러나 무사유(無思惟:생각이 없는)는 용서할 수 없다. 그것은 의미의 부정이니까.” 역시 아렌트가 히틀러에 동조하여 홀로코스트에 함께 부역한 생각 없는 판사들에게 한 말이다. 이 판사들을 독일에서는 ‘넥타이 맨 살인자(Tie-wearing murderers:타인과 공감 능력이 없어 사무적이고 냉정한 태도로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는 엘리트 관료)’라고 한다. ‘넥타이맨 살인자’란 ‘법’을 빙자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비리를 비호하여 결국 국가를 붕괴시킨 자들이란 뜻이다.
저들은 하나같이 ‘능력주의’라는 허황된 신화를 신봉한다.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는 새로운 폭군이다”라 하였다. 샌델은 이 능력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가장 위험한 정서를 ‘휴브리스(hubris)’라 불렀다. ‘휴브리스’의 핵심은 자신의 성공이 전적으로 스스로의 노력과 재능 때문이라는 자기 확신에서 오는 도덕적 오만과 자기 합리화이다. 이러한 인식은 사회를 분열시키고, 인간으로서의 유대와 공감 능력을 마비시키며, 종내는 민주주의를 훼손한다.
그러고 보니 저 눈을 감고 제멋대로 판결하는 ‘청맹과니형 법 종사자’들인 휴브리스들이 하는 꼬락서니가 꼭 ‘주인 잃은 개 지리산 보듯 한다’라는 우리네 속담에 딱 맞아떨어진다. 아무리 지리산이 아니라, 서초구 서초동의 ‘아크로비스타’를 쳐다본들 먹이 줄 주인은 돌아오지 않는다. 애초부터 옆집 개가 짖으니 생각 없이 따라 짖는 한 마리의 개는 되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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